100화.
괜히 소란 피울 것 없다.
“(형님 나가신다-!)”
“(오쓰!)”
“(오쓰!)”
“(오쓰!)”
목표가 곧 이루어지니까.
그림은 거의 완성되었고.
세상을 뒤집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부아아아아-!
그래.
세상을 뒤집는 것.
이번 승계식에서 ‘그’ 조각을 찾는다면, 더 이상 이런 변방을 왔다 갔다 하며 번거롭게 잠룡(潛龍)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건, 이 신무림이라는 나태한 세계를 부숴 버리기 위함.
“(살펴 가십쇼-!)”
“(오쓰!)”
“(오쓰!)”
“(오쓰!)”
삿포로는, 그 꿈을 위한 시작점일 뿐이다.
* * *
삿포로의 유명 라멘집.
탁.
살얼음이 동동 뜬 맥주잔을 내려놓고 돼지 뼈 육수로 우린 뜨끈한 라멘을 한 젓가락 흡입하니.
후루룩-!
입가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진다.
입안을 고소하게 맴도는 감칠맛에, 요 며칠 고단했던 밀항선에서의 고생이 싹 날아간다.
- 맛있냐······?
아니, 밀항선뿐만이 아니다.
도망자 신분이었던 태백시에서는 물론이요, 백검단 입단, 대전 참하늘주님성회, 반연문의 독각화망, 거기에 이번 인천의 혈교 사태까지. 생각해 보면 창규는 천마와 함께한 이래, 여태 단 한 번도 여유를 가진 적이 없지 않은가.
후루룩-!
인생 첫 여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일본 최북단 섬의 라멘집에서, 창규는 지금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다.
우물우물.
부드러우면서 찰진 면발.
씹을수록 고소한 감칠맛이 입과 혀를 범벅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아를 건드리는 바삭한 차슈의 식감이 창규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꿀-꺽!
식도를 넘어가는 뜨끈한 쾌락.
더운물에 몸을 푹 담근 것과 같은 충만한 나른함이 전신에 기분 좋게 퍼지는 지금.
‘아아아.’
창규는 더없이 행복하다.
- 야, 국물, 국물도 마셔 봐.
차디찬 맥주로 입안을 헹군 그가, 천마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양손으로 그릇을 잡고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을 때.
후룩.
입안에 맛의 바다가 범람하기 시작하며.
창규의 두 눈이, 번쩍 뜨인다.
“·········!”
32개 치아를 사방팔방으로 애무하듯 휘감고 들어가는 부드러운 풍미! 혀를 굴리자 그 위아래로 비처럼 쏟아지는 강렬한 고소함! 볼을 움찔거리게 만드는 짭짤함! 붉어진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정열적인 그 매콤한 충만감!
- 뭔데? 맛있어? 어? 얼마나?
궁금함을 못 견딘 천마가 던진 물음에 그릇에서 입을 뗀 창규가 뱉은 건, 단 한마디였다.
“············뻑예아.”
- 야, 나와 봐. 나도 좀 먹어 보자고!
천마마저 궁금하게 만들 정도의 리액션.
숨을 고른 창규가, 본격적으로 라멘 국물을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한다.
“크허.”
피로가 싹 풀리고.
“허헙.”
속이 든든해지며.
“후으.”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인다.
“······캬!”
탁-!
탁자에 내려놓은 그릇은 텅 비어 있다.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는 창규.
평생 제대로 된 맛집 한번 가 보지 못한 창규에게 있어서, 삿포로에서도 나름 맛집으로 알려진 이 집의 라멘 한 그릇은 그에게 해외여행의 즐거움을 주기 충분한 것이었다.
- 에이, 치사한 놈. 그걸 혼자 다 먹고···.
“그럼 어째요.”
창규가 작게 중얼대며 땀을 닦았다.
번화가의 맛집답게, 홀을 가득 채운 나무 탁자 위에서 후룩거리는 손님들은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점, 그러니까 온전히 외지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라멘 한 그릇 먹겠다고 강림할 수는······ 뭐야, 저거.”
지금, 홀에 걸린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천 앞바다의 유물 인양권(引揚權)을 중심으로 한중 사이의 외교적 마찰이 점점 심화 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과 중국이 부딪히고 있다.
인천에서의 혈교 사태가 끝난 이후 곧바로 벌어진 외교적 갈등이 서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저 갈등의 진짜 원인이 저깟 유물 인양권이 아니라는 점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정부가 제일 먼저 움직였다고? 대체 뭔 일이 일어나는지···.’
창규가 도망친 직후 한국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림감찰부와 중국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는 점 하나는 확실한 상황.
‘······빠져나오길 잘했네.’
창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과 감찰부 사이에서 어떤 갈등이 일어날지, 3대 문파를 위시해 맹에 가입한 중소 문파들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상상도 안 되는 지금, 삿포로까지 밀항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차라리 일본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삿포로에서 할 일은 간단하다.
서로를 향한 불만을 어설프게 드러낸 한국 무림의 고래들과 달리, 일본은 이미 거물들 사이의 질서가 확실하게 잡혀 있었으니까. 각 지방마다 문파들이 난립한 건 한국과 같지만, 이들은 절대 그 지역 대표 도시의 상징인 연합문파를 거스를 수 없다.
‘구향회.’
홋카이도의 삿포로는, 구향회가 대표한다.
구향회가 이 지역 전체 무림인들을 대표한다는 건, 바꿔 말하면 삿포로에서 칼밥 먹는 이들은 그게 누구건 구향회의 우산 아래 놓인다는 이야기.
‘여기서 그 사자인가 하는 놈을 잡는다.’
중국에서 만형진법을 보여 주고 다녔다는 그놈을 잡기 위해, 창규는 저 구향회 쪽에 접근해 볼 생각이었다. 위험하면 언제든 발을 뺄 자신도 있고, 실패하더라도 한국이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번다는 점에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추가 단서도 있고.’
등에 그림이 있다고 했다.
밀항선 내에서 김두광이 심문한 그 여자의 등에서, 죽기 직전 불탄 그것과 정확히 같은 그림이. 만형진법을 매개로 새겨지는 문신이라니. 대체 놈의 만형진법이 원본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지.’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테니까.
‘간다.’
참, 한 잔만 더 마시고.
“(사장님! 이거 한 잔 더 주세요!)”
“(네, 손님.)”
여유를 알게 된 창규.
쫓기는 위급함이 사라진 그에게, 이번 일본행은 어찌 보면 생전 가보지 못했던 해외여행의 즐거움을 주는 휴양이기도 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꿀꺽꿀꺽.
차가운 맥주를 쭉 들이켜며 가게 곳곳으로 시선을 던진다. 일본 손님, 일본 가게, 일본 음식··· 이 낯선 풍광을 모조리 눈에 담기 위해 곁눈질을 하던 그에게, 문득 카운터 위에 올려진 피규어들이 보인다.
‘그나저나, 피규어가 진짜 많네.’
비단 카운터 위뿐만이 아니다.
가게 좌우 벽에 붙은 선반 위에도, 화장실 열쇠가 걸린 벽 옆에도, 심지어 출입문 옆에도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모양을 본 따 만들어진 피규어들이 있다. 새삼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실감을 한 창규의 시선에.
딸랑-!!!
거칠게 열린 가게 문으로 들어온 야쿠자들이 잡힌다.
정확히 말하면, 평범한 야쿠자가 아닌 허리에 칼 찬 무림인들.
“(주인 나와!)”
“(다들 먹던 거 먹어요, 우리 나쁜 사람 아니니까.)”
“(어이! 뭘 봐!)”
하지만 이상했다.
누가 봐도 깽판을 치러 온 듯한 그 무림인들의 등장에, 가게 주인이나 직원들은 물론 음식을 먹던 손님들 중 누구 하나 동요하는 모습이 없었으니까.
“(손님들,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하실 수 있으니 조용히···.)”
“(헛소리하지 말고 돈 내놔.)”
“(예?)”
“(저번 달에 말했지. 이 구역은 우리가 관리한다고. 월에 50만 엔만 내면···.)”
“(하아.)”
“(한숨? 이 새끼가 미쳤나!)”
“(얘기 못 들으셨나 보군요.)”
“(얘기? 무슨 얘기.)”
“(켄상, 그거 보여 드려요.)”
사장의 말에, 문득 카운터 저 멀리에 있던 직원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든다. 무슨 총이나 칼 같은 무기라도 나오려나, 하며 맥주를 홀짝 들이켠 창규.
“(자! 보셨죠?)”
그는 곧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점원이 자랑스레 머리 위로 쳐든 건, 다름 아닌 피규어. 멀리서 봐도 여고생 복장을 한 피규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의기양양하게 들어 올린 그 모습에 휘둥그레 커진 창규의 눈.
‘·········뭐지? 몰카 찍나?’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진심어린 사과를 구하신다면, 방금 저지른 실례는 너그러이 넘어갈 용의가 있습니다.)”
육수를 삶다가 뇌까지 익은 것인가.
여고생 모양의 피규어를 가지고 방금 들어온 무림인들을 위협한 주인장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출입문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 창규.
“(······시, 시, 실례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는, 머금고 있던 맥주를 뿜었다.
* * *
터벅, 터벅, 터벅.
배를 두드리며 라멘집을 나온 창규.
“와, 아까 뭐였죠? 무슨 토테미즘 같은 건가?”
그는 아직도, 여고생 피규어를 본 뒤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던 무림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거 무림의 종말 아니에요? 칼 든 무림인이 피규어한테 쫀다고?”
천마 역시 말이 없다.
그 상징적인 장면에 넋이 나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선배님 웬일로 조용하세요. 설마, 아까 라멘 먹을 때 신체 대여 안 해 줬다고 기분 상하···.”
- 야, 저기로 가.
“예? 어디요.”
- 저기 오거리 횡단보도 옆에, 지금 애들 많이 가는 곳 있잖아. 저 간판 안 보여?
왠지 모르게 짜증을 내는 천마.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도로를 가로지른 거대한 간판이 보인다.
[유키하바라]
그 아래로, 보인다.
돌돌 만 브로마이드들이 툭 튀어나온 배낭을 메고 있는 이들, 옆구리에 직사각형 상자를 끼고 가는 이들, 신주 단지 모시듯 두 손으로 공손히 피규어를 들고 가는 이들까지.
‘·········유키하바라?’
유키하바라.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필적하는 피규어의 성지. 삿포로의 최대 번화가의 변두리에 펼쳐진 이 신천지에 잠시 창규의 눈이 어지러워진 순간.
- 여기서 제일 큰 가게로 가.
“선배님 피규어 좋아하셨어요?”
- 득츠그 쁠르 그르그.
무슨 이유에선지 이까지 뿌득뿌득 갈고 있는 천마의 말에 따라 인파 속으로 들어간 창규.
저벅, 저벅, 저벅.
꽤 인기가 있는 곳인지 인도까지 바글대는 사람들 사이를, 천마군림보의 독보(獨步)로 헤쳐나가던 그가 곧 이 유키하바라에서 가장 큰 가게에 도착했을 때.
딸랑-!
창규는 볼 수 있었다.
광활한 매장에 즐비한 선반 사이로, 온갖 매력을 뽐내는 각양각색의 피규어들을.
“오.”
문득, 창규의 눈이 반짝인다.
이곳에 있는 건, 애니메이션 캐릭터뿐만이 아니었다. 무림을 주제로 한 영화의 캐릭터나, 세계 비무 대회에서 컨텐더급에 드는 실존인물들이 칼을 차고 포즈를 취한 피규어도 즐비했다.
“이거 보여요? 무림인들도 피규어로 만드네?”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창규.
- 더. 더. 더.
왠지 모르게 자신을 재촉하는 천마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발을 옮길 때쯤.
그는 발견했다.
방금, 라멘집에서 보았던 ‘그’ 피규어와 비슷한 포즈를 한 피규어가 이 매장의 카운터 위에도 올려져 있는 사실을.
‘뭐야. 유행 같은 건가?’
한데, 뭔가 이상했다.
라멘집에서는 흘깃 봐서 그냥 넘어갔는데, 이거 가까이서 보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
“(이건 파는 게 아닙니다, 손님.)”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피규어에게 뻗는 창규의 손을,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찰싹 쳐내는 가게 주인.
“(파는 거 아니니까 딴 거나 보시라고요.)”
불쾌하지도 않았다.
“(쯧. 이거 업종을 바꾸던가 해야지···.)”
지금 창규는, 깨달았으니까.
가까이서 보니 알겠다.
왜 천마가 아까부터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었는지를. 왜 아까부터 천마의 얼굴이 폭발할 듯 빨갛게 부풀어 올랐는지를. 물론, 피규어를 본 창규의 머리에도 수많은 궁금증이 피어올랐지만.
‘대체 어떻게? 직접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초상화 같은 게 남아 있나?’
우선 순위를 매겨야 한다.
지금 중요한 건, 대체 ‘어떻게’ 이런 피규어들이 삿포로의 유흥가에 퍼져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사실이고.
그보다 중요한 건, 눈빛만으로 하늘을 찢을 듯한 맹렬한 살기(殺氣)를 내뿜고 있는 천마를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 야.
그러니까 지금.
- 이 새끼한테 말해.
식빵을 입에 문 여고생 차림으로 모에화(萌え化)된 자신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이, 뒤집히고 있었다.
- 지금 당장 셔터 내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