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보통은 당황한다.
거꾸로 역행하는 하천도, 양옆 산책로까지 시체에서 나온 피가 범람할 정도로 많은 혈강시와 혈교도들도, 범람한 피의 강을 그대로 들어 올려 뒤편의 동산까지 무빙워크처럼 이어진 혈괴도(血塊道)까지.
“호호호.”
팔괘(八卦術)에 혈식(血式)을 섞어 만든 기기묘묘한 술법들. 류웨이와 손을 잡고 아득한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 완성해낸 이 술법들은, 모산파에서도 수련을 금기시하는 방문좌도(傍門左道)의 사술이었지만.
“야! 이···거, 말······고···오···.”
“영광으로 아십시오. 주인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고 싶어하십니다.”
아직 하이라이트는 터지지 않았다.
붉은 피가 응고되어 만들어진 다리 위에서, 개천가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손가락으로 허공에 문양을 그리고 있는 오향희.
파파파파팟-!
그녀의 어깨 좌우로, 여태까지 대기하고 있었던 혈강시 본대들이 화살비처럼 솟구쳐 오른다. 허공에 붉은 궤적을 죽죽 그리며 솟구친 놈들이, 저 개천가 아래에서 칼을 꼬나쥐고 달려드는 무림인에게 유성우처럼 내리꽂히는 순간.
♪~♬~♩~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동시에, 하늘 위에서 격렬한 운율이 쏟아진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그 운율은, 곧 전투를 시작한 저 천마 도둑과 어우러진 혈강시들에게 스며든다.
- (완성됐나?)
- (거의 다 됐습니다.)
노예들이 멘 가마를 탄 채 오향희의 옆에 자리한 류웨이. 그가 뚱땅거리는 비파 소리가 빠르고 커짐에 따라, 혈괴도 아래에서 전투를 벌이는 혈강시들이 점점 고강해진다.
“···············!!!”
“···············!!!”
“···············!!!”
의식이 사라졌음에도 고문당할 때의 고통이 기억이라도 났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찢어져라 벌리며 전신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혈강시들. 이도류를 쓰는 사내 머리 위로 후두둑 쏟아져 혈전을 벌이기 시작한 놈들을 본 류웨이의 입에 흡족한 미소가 걸린다.
♬!♬!♬!♬!♬!♬!♬!
현을 뚱길수록 개천가 곳곳에 고인 핏물 위로 회오리가 일어난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피 안개가 하늘 곳곳에 구름처럼 뭉치고. 검붉은 소용돌이와 피 구름이 저 태양을 가릴 정도로 떠오른 가운데.
∼∼∼♩!
피의 소나기가 퍼부어진다.
콰콰콰콰콰-!
거대한 동산처럼 천마 도둑을 덮친 혈강시들의 사이사이로 꽂히는 불그죽죽한 직선들. 까만 먹지 위에 붉은 펜을 든 어린아이가 낙서하는 듯한 어이없는 광경이 반경 200m 안에 그려진다.
- (어때?)
- (확실히, 천마의 힘은 다르군요.)
느껴진다.
혈진으로 강화를 한 뒤, 직접 비파를 뜯어 조종하는 혈강시의 본대와 오향희가 저 공간에 새겨넣은 사술의 보조로 그려 넣은 지옥도 깊은 곳에서.
“크···으···아아아···!”
챙챙챙-!
귀신처럼 섬뜩한 함성을 내지르며, 여기까지 달려들려는 천마 도둑의 살벌한 기운이. 지금쯤 ‘시작’되었을 텐데도, 여전히 정신을 잃지 않은 채 2개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저 맹렬한 기세가.
- (한국에 있을 때는 얼굴도 모르는 자입니다. 이름도 없던 평범한 자가, 아직도 미치지 않았다는 건 천마가 아니고서야···.)
- (지금, 몇 번이나 씌웠지?)
- (총 5번 씌웠습니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지금 오향희가 벌써 5번이나 저놈에게 덧씌운 사술은, 시간을 다루는 정신계 사술. 한번 덧씌울 때마다 1분이 하루로 늘어나는 이 사술에 의하면.
- (몇 분?)
- (마지막에 씌운 것 이후로도 벌써 8분이 다 됐습니다.)
- (최소 40일이 지났겠군.)
- (예.)
지금 저 검붉은 재해 속에서 여전히 칼을 휘두르고 있는 놈은, 벌써 한 달을 훌쩍 넘어가는 시간을 버텨 낸 것이나 마찬가지.
- (그런데 아직도 저렇게 싸운다고?)
- (······예.)
보통은 훨씬 전에 미쳐 버린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멈춘 듯 느려진 세상에 던져진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한 고통이니까. 바늘에 찔리는 1초 남짓의 따끔한 고통도 저기서는 몇 시간짜리 고문으로 바뀐다. 지금쯤 지옥도를 겪고 있을 저자가 아직도 멀쩡하다는 게 의미하는 건 한 가지.
- (천마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군.)
- (그렇다면···.)
- (그래.)
오히려 기다리던 순간이다.
류웨이가, 자신의 가마가 자리한 피의 교각 아래 펼쳐진 개천가의 전장을 보며 웃음 짓는다.
- (이제부터, 곡조를 바꾼다.)
귀신처럼 칼을 휘두르고 있는 이도류의 사내.
자신이 등장한 이후 개천 반대편까지 넘어갔던 저자가, 다시 하천에 발을 담궜다. 도망가지 않고 계속 덤벼 볼 모양인데, 그렇다면 술법을 이렇게 일일이 쏘아낼 필요가 없지.
- (음을 뿌릴 테니, 저 하천을 매개로 대상진에서 범위진으로 술식을 바꾸도록.)
- (존명.)
여태, 오향희가 피 묻은 손으로 허공에 죽죽 긋고 자신의 음파를 통해 쏘아내던 사술. 어차피 여기까지 올 게 뻔하다면, 일일이 하나씩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둥-!
슬슬 완성되던 오향희의 술법이, 문득 운율을 바꾼 류웨이의 음파에 실려 저 아래 하천에 풍덩 빠진다. 그 리듬에 맞춰 수면 곳곳에 무수한 물기둥이 솟구치는 가운데.
팟, 파팟, 파파팟!
시간진이 공명하기 시작한 하천.
콰콰콰콰-!
이제, 저 개천은 한 발을 디딜 때마다 그자가 체감할 1분의 길이에 하루가 추가되는 지옥이 되었다. 감히 반도의 쭉정이 주제에 천마를 삼킨 저놈은, 저기서 다섯 발자국만 더 걸어도 1분이 10일처럼 늘어나는 신세가 될 터.
- (진법 바꿔.)
슬슬 한계가 올 수밖에 없다.
피 소나기와 혈강시의 폭풍 사이에서 지금쯤 정신이 너덜너덜해지고 있을 천마 도둑놈. 놈은 곧, 천마의 도움을 받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놈의 정신에 천마가 개입할 순간이야말로···.
- (추출진 준비해.)
- (존명.)
바로 류웨이가 천마를 추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순간.
- (이제.)
혈마가 될 수 있다는 기쁨에 입꼬리를 늘인 그가, 천천히 가마를 멘 노예들의 목줄을 잡아당겼다.
- (내가, 무림의 새 주인이 된다.)
* * *
부아아아아아아-!
국도를 질주하는 서정우.
그는 지금, 오토바이 헬멧을 뚫고 들어오는 저 광기 어린 고함에 벌써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차아아암! 하늘주니이이임-!”
“아아! 천마···음으로 경배하라-!”
“그분의 뜻이 옳고도 옳도다-!”
창규의 말이 맞긴 했다.
아까, 창규를 쫓던 대규모 혈강시와 혈교도들을 각각 3개의 방향에서 끊어놓았던 이 사이비 교도들. 수가 꽤 줄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혈교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이 새끼들,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야.’
흘깃 오토바이 백미러를 바라본 서정우.
좌우 후방에서 그를 따라오는 놈들의 그 악귀(惡鬼) 같은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미쳤어.’
저들 중 단 한 명도 오토바이 헬멧을 멀쩡하게 쓴 놈이 없다는 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저 새끼들은 마이크가 부착되어 있건 말건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듯해 보였으니까.
“푸, 푸하하하!”
“끼하하하하!”
질주하는 오토바이 위에서 각혈까지 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저 사이비 신도들의 눈은, 이미 마약이라도 맞은 듯 맛이 가 있다.
부아아아아아-!
도로 위에 피 비를 뿌릴 정도로 전신이 피 칠갑이 된 건 물론이요, 2인 1조로 오토바이에 앉은 이들 중에서 한쪽 팔이 날아가거나 등이 쩍 벌어지는 등의 큰 부상을 입은 자들도 꽤 보였지만.
“다아-들!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들은 모두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생각을 포기한 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을 때, 그의 오토바이 바로 옆까지 따라온 녀석들의 리더가 등 돌려 소리친다.
“어떠십니까, 장로님들!”
대전 지부 장로, 김두광.
‘······이 새끼가 제일 문제야.’
사술을 익히기라도 했는지 칼집 근처에서 검은 요기(妖氣)를 뿜어대던 그가, 아까부터 정우는 제일 신경이 쓰였다.
“다들, 그분의 복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느껴보셨지요?”
“의리!”
“의리!”
“의리!”
“의리!”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포함한 저 장로들이 써먹은 저 어이없는 검법들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확실히, 복음대로 어깨를 내리고 발 간격을 늘리니 성령이 깃들더군요! 의리!”
광주 지부의 장로.
“칼을 고쳐 쥐는 것만으로 속도가 두 배는 더 빨라졌습니다! 의리!”
부산 지부의 장로.
“저는 두 팔이 잘릴 걸, 한 팔밖에 잘리지 않았습니다! 의리!”
경기 지부의 장로.
“하하하! 메시아의 복음이 진실이었습니다! 의리!”
평양 지부의 장로.
이놈들이 쓰는 검법은, 어딘가 자신이 아는 놈의 검법과도 닮아 있었다. 딱 꼬집어서 무엇이 닮았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는 분명 뭔가를 느꼈다.
‘·········백창규.’
맹주 암살 미션을 준비하는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단내를 풍기며 직접 검을 섞어가며 받았던 백창규의 검법. 그때 느꼈던 그 애매모호한 느낌이, 저 광신도(狂信徒)에게서 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부아아아-!
다만, 서정우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양 떼를 인도하는 목동처럼 국도를 질주하던 그의 눈에, 아까 창규와 헤어졌던 구간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
전소되고 부서진 차량들.
그 너머에서, 포토샵을 합성한 것처럼 괴이한 풍경들이 펼쳐졌다.
“이런 미친!”
개천가 반대편에 보이는 기괴한 모습의 빨간 교각, 그 위를 뒤덮은 검붉은 구름들, 그 아래로 퍼부어지고 있는 붉은 피의 소나기와, 그 사이로 보이는 아득한 수의 혈강시들이 보인 순간.
“이런 씨바···.”
“으아아아아아!”
엑셀을 당긴 서정우는, 자신의 좌우에서 일순 돌풍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우와아아아아-!
부아아아아아-!
부우우우우웅-!
자신을 추월해 개천을 향해 질주하는 사이비 교도들의 오토바이. 오토바이 간의 마력을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속도였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처럼 오랫동안 바이크 생활을 해 왔던 놈들도 아니지 않은가.
“백창규 형제니이님-!”
믿음이었다.
이것은 가히, 신격(神格) 대리자를 지키기 위한 믿음의 힘.
“전워어어어언-!”
눈에서 광기를 내뿜는 김두광.
믿음의 힘으로 순식간에 서정우를 추월한 그가 한계까지 엑셀을 당기자, 그를 태운 오토바이가 개천의 언덕을 뛰어넘는다.
“돌겨어어억-!”
부아아아아아-!
검붉은 피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뛰어든 그의 뒤를 따라 날아오른 수십 대의 오토바이.
“의리-!”
“의리-!”
“의리-!”
“의리-!”
후두둑!
김두광의 눈앞에 저 요사한 구름 위에서 쏟아지는 불경한 소나기와 끔찍한 괴물들이 가까워졌지만, 상관없었다.
“메시아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보인다.
저 삿된 무리들 사이에 끼어 있는 백창규 형제님이. 자신들에게 올바른 ‘그분’의 복음을 알려 주고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게 해준 진실한 신의 대리자가.
스릉-!
엑셀을 당기는 반대편 손으로 뽑아 든 성검(聖劍).
불그죽죽하게 스며든 피를 타고, 성검의 기운이 스며든다. 칼자루를 쥔 손으로, 여태껏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기적에 가까운 광명(光名)이 스며든다!
‘저분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기적을 느끼지 못했다.’
점점 가깝게 보인다.
믿음 없는 불경한 무리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곤욕을 겪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이. 전신에 불경한 피를 두른 채 칼을 휘두르는, 스스로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지옥에 빠진 성자의 모습이!
콰콰콰콰콰콰-!
온갖 피구름이 모여든 개천 한가운데.
저 멀리 보이는 사이비 교주를 단죄하기 위해, 신성한 싸움을 하고 있는 백창규.
“다들-!!!”
그를 보며 울컥한 김두광의 지시를 시작으로.
“·········메시아를 구하고, 이 성전(聖戰)을 끝낸다!”
수많은 신도들이 피가 범람하는 개천 위로 빠져들었을 때.
참방-! 참방-! 참방-! 참방-!
김두광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세상 모든 풍광들이 느려진다.
튀어오르는 핏방울이, 불경한 자들의 끔찍한 몰골이, 자신의 고막을 때리는 온갖 소음들이 선명하게 퍼지는 비상식의 풍경! 모든 감각이 새롭게 느껴지고, 이 영광스러운 시간이 무한(無限)에 가깝게 늘어나는 듯한 감각!
‘아아아아!’
오향희와 류웨이가 만든 술법에 걸려든 김두광.
그는 확신했다.
‘참하늘주님이시여·········!’
여기, 성전(聖戰)의 전사들을 위한 기적이 도래했다고!
‘··················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