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달빛이 떨어지는 한옥 정원.
백검단의 간부들을 포함, 경호실에서도 경험이 많은 최측근 단원들까지 맹주의 다음 지시를 받기 위해 한데 모여 있는 이곳에서.
“못 보던 칼인데.”
창규를 향해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단장 박웅태였다.
“이휘택에게 받았나?”
“예.”
“·········다행이군.”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박웅태.
할 말이 없었던 탓이다.
정식 단원이 되자마자 대전에 보낸 것은 그렇다 쳐도, 사이비 교도들에게 시달리다 온 녀석에게 반연문을 감시하게 한 것도 모자라, 이휘택 그 또라이까지 만나게 해 버렸다.
“칼 좋아 보이네.”
“감사합니다.”
괜히 창규의 허리춤에 달린 칼자루나 쳐다보던 박웅태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본론으로 들어간 건 맹주 곽용범이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아니긴.”
여태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말투에 담긴 조급함이나, 아직 표정에서 지워지지 않은 진노(眞怒)의 흔적뿐만 아니라, 창규는 지금 곽용범에게서 전투를 준비하는 장수에게나 느낄 수 있을 결의에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네 덕분에, 괴산파를 거쳐 중국 쪽 문파들과 연결할 수 있게 됐는데.”
이런 건 처음 보았다.
전운(戰雲).
수십 수백이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나 느낄 법한 흉악한 기운이, 곽용범이 들고 있는 넓적한 대도(大刀)에서 배어 나오는 모습은.
“좋아. 이걸로 인천 쪽에 새로 보급되는 혈강시들의 수는 최대한 줄일 수 있겠고···.”
맹주의 묵직한 한 마디 한 마디가, 공명이라도 하듯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리에 꽂힌다. 살이 떨리고 근육이 긴장하는 동시에, 심장박동이 쿵쿵 뜀박질을 시작한다.
“······해외 특임조 단원들한테 복귀 명령은 내렸지?”
“오지 파견 인원을 제외하고, 2일 안에 복귀 가능한 단원들에게는 전부 소집령을 내린 상태입니다.”
“그럼.”
“네, 그들을 포함하면 현재 이번 임무에 투입될 특임조 단원들은 총 38명입니다.”
“경호실 인원을 모두 합쳐도 100명이 안 되는군.”
“예, 맹주님.”
“흠.”
모두가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가운데.
가만히, 손에 든 대도를 둘러보는 곽용범.
번-쩍!
달빛을 담은 대도의 넓적한 칼이 움직일 때마다, 환한 조명이 비치듯 사택 곳곳이 번쩍거린다. 창규로서는 처음 보는 맹주의 병기와, 처음 겪는 그의 말투.
“맹 본부 무림인들은.”
“말을 계속 빙빙 돌리는 게, 이틀 내로 소집령에 바로 응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대부분의 본부장들이 3대 문파 쪽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곳들이라···.”
“이것들 봐라.”
느껴진다.
“결국 중요할 때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얘기군.”
도성(刀聖)이라 불리던 곽용범.
그가 몸 곳곳에 묻은 진한 분노 사이에서 꿈틀대는 묘한 설렘이. 창규가 느끼기에 그건, 드디어 칼을 쓸 명분을 찾은 은둔고수의 그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좋아. 어차피 한번 싹 다 갈아엎어야 하긴 했어.”
그럴 수밖에.
감찰부장 장일철이 3대 문파와 손을 잡았다는 건, 결국 그들이 곽용범 대신 새로운 무림맹주를 앉히겠다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본디 무림맹주라는 자리가, 곽용범 등장 전까지는 3대 문파 출신의 원로들이 돌아가며 맡던 자리. 생각해 보면, 맹 곳곳에 자신들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수많은 중소문파들을 가진 3대 문파가 곽용범을 탐탁해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그게 아니라면, 맹주씩이나 되어서 그렇게나 많은 암살 시도를 겪었을 리 없는 일 아닌가. 수많은 크고 작은 흑도들이 ‘감히’ 맹주의 암살을 노릴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대사건들이 그저 신기한 해프닝처럼 취급된 것도, 모두 곽용범이 3대 문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
“단장.”
“예.”
“행정본부장이랑 파견본부장한테 먼저 연락해 봐.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무소속 무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라고.”
3대 문파가 만들어놓은 한국 무림의 질서.
연맹까지 스며들어 있던 그 지긋지긋한 질서를, 이번에 바꿀 작정이다.
“그리고, 저번에 창염문 쪽 업장에서 가져온 장부 있나?”
“예,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그거 기연옥한테 붙은 문파들한테 직접 전달해. 아침 전까지 전부 처리하도록.”
“존명.”
파팟-!
그대로 담장 밖으로 경공을 펼치는 박웅태.
“부단장.”
“예.”
“거일문, 아직도 불편한가?”
“아닙니다.”
“새벽까지 다녀와.”
“존명.”
파팟-!
역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한주빈.
“그리고.”
맹주가 천천히 백창규에게 고개를 돌린다.
“······백창규.”
“예.”
벌써 3대 문파 중 두 개 문파와 연결된 맹 소속 중소 문파들에게 여태껏 모은 카드들을 보내려는 맹주. 이제, 남은 것은 괴산파 쪽에 붙은 중소 문파들인데.
“이휘택과의 만남은 어땠나.”
“어땠냐는 건···.”
“우리 쪽에, 어떤 식의 지원을 해 줄 수 있다고 했지?”
맹주에게 있어서 괴산파는 살짝 애매했다.
이휘택이 워낙 기분파인 탓에, 그들이 정부 쪽의 움직임에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지 짐작하기 힘들었으니까. 신이 난 목소리로 박웅태에게 도와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은 뱉었다지만, 그게 ‘실제로’ 어떤 형태의 지원이 될지는 까 봐야만 아는 일이다.
“일단, 내일 아침까지는 중국 해안 쪽 문파들의 직통 연락처를 보내 준다고 했습니다.”
“그건 나 역시 전달받은 사실이다. 그 외에, 직접적으로 어느 정도의 병력을 지원해 주겠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나?”
“일단, 오늘 잠부터 때리고 내일 확실하게 말해 주겠다고···.”
“쯧.”
맹주가 예측했다는 듯 혀를 찬다.
다만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 괴산파 쪽은 순전히 이휘택의 기분에 의해서 움직이고, 지금 저 명검(名劍)들을 봤을 때 그는 창규에게 큰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창규가 허리에 찬 두 자루의 명검.
칼자루에 보이는 표식으로 보아, 저건 괴산파에서도 정예라 불리는 매화검수나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검이다. 그걸 백검단원에게 줬다는 건, 이휘택 쪽에서도 유의미한 병력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럼 괴산파 쪽도 일단 내일 아침까지는 기다려 본 뒤···.”
“맹주님.”
문득 맹주의 말을 끊는 백창규.
맹주의 지시로 만들어지던 뜨거운 기세를 헤치는 듯한 그 행동에 주변 베테랑 경호단원들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나섰지만, 맹주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말하거라.”
“혹시, 지금 당장 인천으로 출발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추가 병력이 더 필요해. 보고된 혈교도와 혈강시의 물량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하지만···.”
“녀석들이 어디서 난동을 칠지 몰라.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다면, 최대한 많은 인력을 구해서 각 지역에 퍼뜨려야 해.”
“놈들이 계속 인천에 있겠습니까?”
“뭐?”
“추가 병력을 모았을 때까지, 그 혈교 놈들이 여전히 인천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
맞는 소리였다.
지금 맹주가 빠르게 중국 쪽의 혈강시 보급을 끊고 추가 병력을 모으려는 건, 모두 혈교의 본거지가 인천에 있다는 확신 때문. 다만, 이건 처음부터 틀린 가정이었다.
“듣기로는, 보고된 이후로도 계속 은신처를 옮기는 탓에 정확한 좌표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병력을 모아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눈을 빛내는 창규.
그는 알고 있다. 놈들이 쫓고 있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삼일타워 앞에서 찍힌 자신의 사진을 본 이상, 놈들은 더 많은 병력을 모아 서울로 올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 먼저 인천으로 가서 놈들의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 놈들의 동태를 파악한 뒤 본대(本隊)가 최대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녀석들을 잡을 수 있는 작전을 세워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놈들을 마음껏 박살내기 위해서는, 창규가 직접 인천에 행차해야 한다는 얘기다.
“말이야 쉽지만···.”
“제가 가겠습니다.”
“·········뭐?”
“놈들이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구(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본격적인 전쟁을 하기 전에, 제가 가서 최대한의 정보를 파악해 놓겠습니다.”
문득 맹주의 눈이 커진다.
주변의 베테랑 경호단원들조차 생각조차 못 했다는 듯 숨을 몰아쉰 그때, 창규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가서 놈들의 동태를 살피겠습니다.”
“잠깐만.”
고개를 끄덕이는 백창규.
그를 향해, 맹주가 천천히 입을 연다.
“아무리 수색이라고 해도, 혼자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 얼마 전에도···.”
“혼자 가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뭐?”
그의 시선을 받은 백창규가, 허리에 찬 두 자루의 명검을 만지작거렸다.
“맹주님만 허락해 주신다면, 백검단 내에서 저와 함께 할 단원을 고르고 싶습니다.”
그렇다, 두 자루.
이휘택에게 받았던 세 자루의 명검 중, 창규는 이미 한 자루의 검을 저 밖에 서 있는 서정우에게 주고 온 참이다. 검을 받고 당황하던 서정우의 눈빛을 떠올린 백창규.
‘지, 지, 진짜로? 진짜 나 주는 거야? 이거 딱 봐도 사이즈가···.’
‘이제 네 거야.’
‘너 임마, 요새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길래 이런 걸 다···.’
‘수련 열심히 해 놨지?’
‘갑자기 와서 무슨 꼰대 같은 소리를 해?’
‘곧 필요할 거야.’
그는 이미, 혼자가 아니다.
맹주 암살 미션 때 어처구니 없이 빠른 속도로 바이크를 몰던 서정우. 허공에 붉은 선을 그었던 그의 운전실력이면, 혈교 놈들을 박살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맹주님.”
혼자서 혈교를 박살내기 위해 자신만의 팀을 꾸릴 생각을 하고 있는 백창규. 혈교도와 혈강시들이 드글드글할 인천이었지만, 그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어떻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가 팀원으로 섭외할 이는,
비단 서정우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 * *
툭.
화단 앞, 누군가의 발끝이 누워 있는 자신의 발끝과 부딪힌 탓에 깨어난 노숙자 하나. 인상을 쓴 그가, 욕설을 퍼부을 준비를 하며 벙거지 모자를 들어 올린다.
“에이 썅.”
이 근방의 거지와 노숙자들은 모두 『전자련』에 소속된 이들. 그 역시, 유명 문파 소속의 무림인만 아니면 겁낼 일이 없었다.
“어떤 새끼가 어르신 발을 치고도 사과 없이······ 헉!”
다만, 벙거지 모자를 위로 올린 노숙자는 자신의 성급한 행동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앗, 실례했습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
“아, 괘, 괘, 괜찮습니다!”
새하얗게 질린 노숙자의 얼굴.
그도 그럴 게, 방금 자신이 눈을 마주친 저 미친놈은 한국의 거지들에게는 흑도보다 더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놈이었으니까. 이 미친놈이 왜 여기에? 따위의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이런, 식사는 하셨습니까? 몰골이 말이 아니신데,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전도는 나중에 하시지요, 형제님. 한시가 급합니다.”
정신이 멍해진 그의 앞에서 대화를 하는 두 남자. 영문 모를 미친 소리를 하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성전(聖戰)을 앞둔 상황 아닙니까. 메시아께서 저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앗, 죄송합니다. 제가 장로님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전자련이 배포한 전국 요주의 인물지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미친놈들. 이 새끼들과 말 한마디라도 잘못해서 정신이 나간 거지들이 한둘이 아닌 걸 아는 상황에서, 그는 그저 눈을 감고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미친.’
이 순간이 무사히 지나가면, 일착으로 팔아먹을 새 정보를 되뇌며 말이다.
“그나저나.”
서울역 앞.
“서울 새벽은 많이 차군요.”
“그래도, 꽤 상쾌하지 않습니까?”
미친 사이비 신도 새끼들이 출몰했다고.
“·········참하늘주님 모시기 딱 좋을 정도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