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맹주는 웬만하면 마지막에 도착해야 한다.
보통 무림지사(武林之事)라는 게, 무림맹주가 ‘개입하는 일’이냐 ‘수습하는 일’이냐에 따라 세간의 평가가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경공을 펼친 한주빈이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타닥-!
빌딩숲 근처의 후미진 골목에 착지한 한주빈.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맹주가 탑승한 리무진이 도착할 시간을 계산한 그녀가, 한숨을 쉰 뒤 대로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까지 울려퍼지는 요란한 경적음과 군중들의 아우성을 들은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진다.
‘하.’
안 그래도 급한 상황이다.
혈폭사(血爆死).
차이나타운을 넘어서, 인천 곳곳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혈교의 흔적. 은밀한 동시에 대담하게 진행되는 그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작전을 짜야 하는 시점에서, 또 일이 터져 버렸다.
‘······.’
쎄한 느낌이 든다.
저 너머로 보이는 삼일 타워. 그 벽을 따라 자욱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먼지 안개. 도로에 정차된 수많은 차량들과, 차문을 열고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인파들.
타다닥-!
삼일 타워 앞을 향해 뛰어가는 한주빈은, 가까워지는 주변의 풍경에 따라 이번 일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미치겠네······.’
거인이 포라도 뜬 듯 박살 난 횡단보도. 그 위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는 괴산파 문도들. 그리고, 여태껏 뭘 했는지 이제야 황급하게 가까워지는 군중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백검단원들.
“부, 부단장님!”
보도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을 막던 그들이, 한주빈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 뿐이었다.
“단장님은요.”
“그게···.”
등 뒤로 엄지를 날리는 백검단원.
쎄한 느낌이 든다.
반환식의 악행도 악행이지만, 하필이면 괴산파의 이휘택이 엮여 있음을 알자마자 발동했던 그녀의 불안감이, 마천루 바로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았을 때 현실로 드러난다.
‘아.’
와르르 부서져 있는 괴산파의 동상 조각들.
그녀의 가슴이 철렁한다.
백검단이 개입한 사건에서, 3대 문파의 화합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부서졌다는 건 꽤 큰 논란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단장님.”
“···.”
“반환식 이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
하지만 아직까진 수습 가능하다.
저 옆에,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반환식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이자가 일으킨 악행에 대한 증거와 녹취록이 있는 이상, 국가 소속 무림감찰부가 개입한다고 해도 백검단이 이 소란에 대해 독박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아직 죽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네요. 곧 맹주님 오시니까 일단 묶어놓은 다음에···.”
“어이, 한주빈이!”
문득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멀리서 자신에게 손짓을 하는 이휘택이 보인다.
“우리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야. 이 새끼 말에 대꾸해 주지 마.”
“웅태 너 질투하냐?”
“미친놈이 남의 식구한테 친한 척은···.”
“잠깐 이리 좀 와봐.”
정확히는, 피투성이가 된 박웅태에게 오랜 친구처럼 농담을 건네는 친근한 이휘택의 모습이.
‘뭐야.’
이휘택이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면 기감도 느끼지 못할 뻔했다. 두 고수 모두, 특유의 기도와 살기를 완전히 거두고 있었던 탓이다. 분명 비무가 일어났다고 메시지를 받았는데, 지금 저기서 담소를 나누는 둘의 모습에서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부단장님.”
옆에 선 백검단원에게 설명을 요구한 한주빈.
“비무가 있긴 있었습니다만···.”
“지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경비실 인원들까지 맹주님을 모시고 오는 중입니다.”
“그게, 음.”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천천히 들어 올리는 백검단원의 손끝 너머로, 그녀는 그제야 주목할 수 있었다.
“·········!?”
서로에 대한 적의를 완전히 거둔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웅태와 이휘택. 그 뒤편에서, 엉망진창으로 쓰러져 있는 한 나신의 남자를.
“누굽니까? 저 사람은.”
* * *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이휘택과 박웅태가 피어 올린 자욱한 살기(殺氣)의 소용돌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그 공간을 천천히 잠재웠던 그 정체불명의 검법은.
“갑자기 난입하더니, 이리저리 날뛰지 뭡니까.”
“난입이요?”
“예.”
“저 둘 사이로요?”
“솔직히, 저희는 어떻게 말릴 엄두도 못 냈습니다.”
1급 무인증을 가진 백검단원들은, 애초에 끼어들 마음조차 품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현장일 터였다.
“수(手)가 안 보였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보십쇼.””
“단장님이 밀리는 걸 보고 합공(合攻)을 계획하긴 했는데, 갑자기 이휘택 저 자식의 칼이 빛나잖습니까.”
“그래서, 보고만 계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래도 저희 쪽 인원이 더 많으니, 방위를 맞춰서 들어가면 되겠다 싶어서 빠르게 수를 계산하고 있는데···.”
“매화가 피어오른 뒤 계속 변했겠군요.”
“예. 솔직히, 괴산파 문주의 검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분명히 같은 초식인데, 한번 지나갈 때마다 도저히 다음 수를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변했습니다.”
“개화(開花)할 때마다 검초가 개변하는 괴산파의 검입니다.”
“그런 건···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망설임도 없이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거죠?”
“···예.”
1급 무인을 넘어서는 특급 무인조차 계산을 끝내지 못한 상황일 터였다. 자신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두 고수 사이에 끼어드는 건, 아무리 합공(合攻)을 하더라도 각자의 움직임과 수를 정밀하게 맞춰야 하는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일이니까.
“바로 찢겨 죽을 줄 알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습니다. 자기도 무서운지 아예 눈을 감고 검을 휘두르더라고요.”
“그건, 초식도 뭣도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춤이라도 추는 줄 알았습니다.”
“정신 나갔는지 아무렇게나 칼을 휘둘러 대지 뭡니까? 지금, 저놈이 살아 있는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참, 우연이라는 게 뭔지···.”
입을 모아 방금의 난입을 증언하는 백검단원들.
그들이 짐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백창규가 펼친 유성일로(流星一路)라는 초식은, 본디 수많은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대규모의 전투에서 기세를 잡는 파천검법의 초식.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건, 이휘택과 박웅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짜 너희 애 아냐?”
“············너도 봤잖아.”
사방에서 격돌하는 검들의 충돌 순간마다 새로운 검격을 들이밀어, 서로를 향하던 살의를 다른 방향으로 흘리던 제3의 검. 그 검의 뿌리가, 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는 그들 역시 짐작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경호실에서도 저런 검은 안 가르쳐.”
“아까 그게, 우연이라고?”
“그럼 뭘로 설명할 건데.”
“모르지, 나야. 쟤네 독문무공 아냐? 쟤 어디서 데려왔다고 했지?”
“떠보지 마, 우리 애 아니라고 했잖아.”
우연인가, 실력인가, 언제 싸웠냐는 듯 이휘택과 박웅태 사이에 논검(論劍)이 펼쳐진 가운데. 그들의 옆으로 다가간 한주빈이, 가만히 누워 있는 남자의 나신에 눈길을 던진다.
‘·········백창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신이 묘한 기운을 품은 채 변해 있었지만, 이자는 백창규가 맞다. 저 나신에서 이전의 모습을 힘겹게 겹쳐 보이게 할 정도로 좋았던 한주빈의 기억력에 더해, 그녀는 저 전신에서 자신이 주었던 탈출용 영약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확실해.’
기절한 이후에도 붉게 달아오른 채 요란하게 꿈틀대는 전신의 근육과, 그 위로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형태. 거기에 튀어나온 힘줄과 맥박의 변화까지.
‘기폭환의 후유증이야.’
슬쩍 박웅태를 쳐다보자, 그가 그녀를 향해 눈짓을 보낸다. 그 역시 이자가 백창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태도. 하지만 왜 일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축하지 않은 채 이휘택과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어이, 한주빈이.”
그녀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한테 물어보자. 얘, 진짜 너희 백검단 애 아니야?”
“아니, 우리 애 아니라니까!”
“왜 자꾸 끼어들어? 그리고 정말 너희 애 아니면 내가 데려가도 되는 거잖아.”
“아니, 그건 안 되지.”
“왜 또.”
“말했잖아! 이번일 수습은 백검단이 한다고.”
“그걸 왜 너희가 해. 그리고, 저거 안 보여? 우리 애들이 이놈 하나 때문에 작살이 났어. 거기다 우리 쪽 동상도 박살이 나 버렸고. 수습하려면 이 새끼 우리한테 넘겨 주는 게 맞지.”
이휘택이 백창규를 노리고 있다.
심상(心想)을 검에 담기 위해 온갖 괴이한 수련을 하기로 유명한 괴산파. 대체 백창규 이자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그가 보여 준 행동이 이휘택의 마음에 썩 든 모양인데.
“이 녀석은 우리가 따로 조사할···.”
“이거, 수상한데.”
곤란하다.
“너희 애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감싸 줄 게 뭐야? 그냥 데려가게 놔 두면 되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조사할 게 있다니까!”
“뭘 조사해. 그냥 얘가 백검단원인 게 밝혀지면 너희가 저지른 행패에 대한 책임, 너희 영감이 질까 봐 이러는 거 아냐.”
“행패 같은 소리 하네.”
그야말로 명분 싸움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긴 3대 문파가 지분을 나눠 가진 삼일타워 앞. 이 난동이 정말 백창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그가 단원인 게 알려졌을 때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만약 백검단원이 아니라고 한다면, 괴산파 문도들을 박살낸 그를 이휘택에게 넘기지 않을 이유를 생각해야 하고.
“반환식 그 흑도 새끼 숨겨 준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행패라고···.”
“아, 이 새끼가 진짜.”
박웅태가 도움을 청하듯 자신에게 눈짓을 하지만, 아직 한주빈은 이 사태의 전말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여태껏 알아 낸 정보와 주변에 펼쳐지니 상황들을 파악해 빠르게 명분을 계산하는 한주빈.
‘·········안 돼.’
그녀는 곧, 이게 자신이 다룰 사이즈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연문 하나라면 모를까, 무림맹의 핵심세력인 3대 문파 중 하나와 무력 충돌이 생긴 뒤의 명분 싸움은 백검단의 부단장 정도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야. 한주빈이, 넌 어떻게 생각···.”
“이건, 감히 제가 말씀드릴 일이 아니네요.”
이휘택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목을 가다듬은 한주빈.
“그게 뭔···.”
“백검단 전원, 다들 주목-!”
애초에 이건 자신이 결정할 사이즈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저 뒤편에, 자신이나 박웅태보다 훨씬 더 명분 싸움에 강한 무림인이 등장했으니까.
“모두, 맹주님 맞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
자리에 있는 모두의 고개가 빙글 돌아간 도로 저편에, 맹주 전용 리무진이 도착한 뒤.
덜컥-!
한국 무림 연맹의 대표, 곽용범이 나타났다.
* * *
그날, 이휘택과 곽용범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강호는 알 길이 없었다.
『반환식, 그는 괴물이었다!』
『삼일 타워 평화상, 보수공사 시작!』
㈜반연 엔터테인먼트의 몰락과 3대 문파의 화합을 상징하는 동상들의 뜬금없는 보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도, 대중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주목할 뿐이었다.
『서울 한복판, 화안금정의 마인 출현!』
며칠 뒤 무림일보에 대문짝하게 실렸던 한 인물의 사진. 아니, 그건 ‘인물’이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 마인(魔人) 』
헤드라인 밑에 부가적으로 수록된 저 강렬한 단어만큼이나, 찍혀 있는 사진은 요 며칠간 있었던 크고 작은 잡음들을 하나로 수렴하게 할 정도로 자극적이었으니까.
카메라 렌즈가 번질 정도로 진하게 피어오른 노란 안광(眼光). 벌린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증기. 결 하나하나가 빨갛게 달아오른 전신의 근육에, 터질 듯 부푼 힘줄들까지.
‘이거 진짜 사람 맞아?’
‘마인이라잖아, 마인.’
본래 모습을 알아본 이들은 거의 없었다.
현장에 없던 이들 중에서.
체모 하나 없는 기이한 나신, 스테로이드라도 맞은 듯 부푼 몸, 안광에 가려진 눈가와 연기에 숨겨진 얼굴의 희미한 표정으로부터 백창규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와 깊게 교류했던 이들은 드물었으니까.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강호의 인연은 넓고도 깊은 법.
극히 일부지만, 저 희미한 사진만으로 창규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참하늘주님성회의 메시아를 향해 기도합시다. 의리!”
“의리!”
참하늘주님성회의 대전 지부,
김두광 장로.
“와, 이 새끼··· 진짜 정신병잔가···?”
백검단 경호실,
서정우 단원.
“······.”
마지막으로.
“사, 살려 주세··· 끄아악!”
“제발, 제발! 이, 미, 미친··· 커헉!”
인천 차이나타운.
“···············找到了.”
몇 달 전, 진백현이 보내 준 심상을 쫓던 혈강시들의 지배자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