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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림 견문록-74화 (74/150)

74화.

튀어 오른 돌 조각이 귀를 스친다.

살짝 베인 귓바퀴 끝에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지만, 솔직히 지금 이딴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애초에, 수백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리고 있는 것처럼 몸 전체에 오싹한 감각이 도는 상황 아닌가.

꿀꺽-!

간신히 침음성을 삼킨 백검단원 하나.

전신의 기도를 끌어올려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솔직히 그녀의 몸은 아까부터 적색 경보를 울리고 있는 중이다. 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무의 살벌함에, 이미 전신의 솜털이 수세미처럼 일어난 지 오래다.

콰콰콰콰콰-!

백검단장과 괴산파 문주의 비무(比武).

허공마다 피어나는 저 고수들의 검흔(劍痕)은, 아까 백창규의 요란한 등장 및 괴산파 문도들과의 싸움조차도 머리에서 지워버릴 정도로 치열하고 선명했으니까.

“말··· 려야 하는 거 아냐?”

“가까이 갈 수는 있고?”

“쫄지 말고 다들 자리나 잘 지켜.”

“그래, 여기 뒤로 넘어가면 민간인들 말려든다. 일 더 커진다고.”

애초에 그녀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저 뒤편에 있을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저 비무는 칼 밥 먹는 한 사람의 무림인(武林人)으로서 절대 놓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봤어?”

“······대충은.”

허공을 베고 지나가는 칼.

햇빛이 번쩍인 칼날 뒤로, 희끄무레한 잔상이 짧은 꼬리를 끌며 사라진다. 하나, 둘, 셋, 이에 맞서 반대편에서 부딪힌 칼이 몇 차례의 불꽃을 터뜨린 직후.

쾅-! 쾅-! 쾅-!

한 박자 늦게 터진 충격음이 귀를 울린다.

허공에 요란스럽게 섞인 노란 불꽃과 하얀 섬광들이 뱉어 내는 소음에 귀를 막을 정신도 없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백검단원들의 코끝에 쇠 타는 냄새가 묘한 향기와 함께 도착한 순간, 그들은 볼 수 있었으니까.

“············매화꽃이다.”

매화검(梅花劍).

박력 넘치는 박웅태의 칼을 농락하듯 사방에서 피어나 눈을 어지럽히는 매화의 잔상을 말이다. 심상(心想)을 칼끝에 담는 경지에 다다랐다는 매화검수 중에서도 한국 정점이라 불리는 이휘택의 매화검.

카각-! 쾅-! 쾅-!

그리고, 그딴 건 상관없다는 듯 난무하는 매화꽃 사이로 몸을 욱여넣은 뒤 강맹한 검격을 꽂아 넣는 박웅태. 전신에 자잘한 상처가 나고, 떨어지는 핏방울들마저 허공에 수놓아진 검격에 증발할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다.

쾅━━━!

그야말로 고수들의 혈투(血鬪).

이를 보는 백검단원의 전신이, 흥분과 전율로 떨리기 시작한다.

“············미쳤어.”

저 둘은 특급이라 불리는 무림 고수들.

지금 여기 백검단원 중에서도 1급을 넘어선 특급 무림인이 몇 있긴 하지만, 이들 중 그 아무도 저들과 자신이 같은 영역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디 신 무림체계에서 나눈 ‘공식적인 무인 등급’은 그 이상의 경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으니까.

“············.”

모두 알고 있다.

같은 특급 무림인이라도, 저들의 싸움은 아직 산등성이도 오르지 못한 자신들은 끼어들 수 없는 ‘산봉우리’에 올라선 이들의 싸움이라고.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지금은 다만, 눈에 담고 탐닉할 뿐이다.

쾅-! 쾅-! 쾅-!

일합(一合)에 보도블럭이 들썩이고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고수들의 싸움. 보는 것만으로도 무의 성취가 오를 것 같은 저 대결을 바라보던 백검단원들의 몰입은, 누군가의 외침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부, 부단장님이다!”

핸드폰을 꺼낸 백검단원 하나의 고함.

“맹주님도 곧 오신대!”

“3분! 3분만 더 버티라고 하시는데?”

“자, 잠깐만!”

그 말에 순식간에 정신이 돌아온다.

지금 그들이 백검단의 이름으로 이 삼일타워 앞에 온 건, 어디까지나 반연문 1계파의 수장 반환식을 잡기 위한 것. 이렇게 한가하게 싸움 구경이나 할 시간 따윈 없다.

“일단 반환식 저 새끼부터 잡아!”

행동이 빠른 몇몇 단원이 벌써 저 너머에서 엉금 기어가는 반환식을 잡기 위해 달려간다. 비명을 지르는 반환식과, 그를 포박하는 단원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나머지 단원들이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한다.

“근데······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박웅태와 이휘택의 싸움.

지금은, 저 싸움에 대한 ‘그럴듯한’ 명분이 없다. 흑도 반환식을 숨겨 준 이들을 단죄한다는 명분이 있긴 하지만, 백검단원 모두는 알고 있다. 여긴 그들의 사유지인 삼일 타워 앞. 고작 이 정도 명분으로 3대 문파를 찔러 들어간다는 건,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 그래! 단장님 밀리고 있잖아! 다들 칼 들어!”

“잠깐만, 일단 맹주님 허가를···.”

그뿐만이 아니다.

삼일 타워 앞, 이 지역의 랜드 마크라 불리는 3대 문파의 동상들 중 하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강맹한 두 고수들의 충돌에 휘말려 쩌적, 허리 부근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건 하필이면 괴산파의 동상.

“야! 그냥 들어가!”

“우리가 씨발, 언제 그딴 거 신경 썼어! 그냥 다구리 까!”

“그래! 합공(合攻) 준비하라고!”

적어도 맹주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일단 둘을 떼어놓고 봐야 한다. 점점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하는 박웅태가 더 밀리기 전에, 저 3대 문파의 동상이 완전히 박살이 나기 전에, 그러니까 싸움에 더 불이 붙어 일이 진짜 심각해지기 전에.

“지금·········!”

“어············?!”

그렇게 칼을 빼 들고 나서려던 백검단원들은, 볼 수 있었다.

우지끈-!

일순 산산조각 박살이 난 괴산파 동상의 대가리.

그 너머에서,

검을 든 채 뛰어드는 미친놈 하나를.

* * *

‘뭐라는 거야······’

거의 들리지 않는다.

“━! ━━━!”

“━━━━━!”

“━━, ━━!”

자신의 고막을 때려대는 주변의 소음 따위는. 뭔가 다양한 감정을 담은 시끄러운 고함이 자신을 노리는 건 분명한데, 지금 창규의 고막은 그 소리들을 온전히 전해 주지 못한다.

‘앞이 가물가물하네······.’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방금까지 자신의 시야 앞에서 나름대로 형상을 이루어 일렁이던 것들이, 점점 그 빛을 잃어 가고 있다.

‘후.’

그렇다.

이제, 창규의 감각은 점점 차단되는 중이다. 아까 터뜨린 기폭환의 부작용이, 창규의 전신을 덮쳐오고 있다. 울컥울컥 전신에 솟구치던 황홀함과 짜릿함이, 신경체계와 근육 곳곳에 흐르던 활기가, 이제는 거대한 그물이 되어 그의 움직임을 옭아맨다.

피부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신경회로와 인대가 삐걱댄다.

전신의 기혈이 비명을 지른다.

‘아.’

쏟아지는 고통.

까매지는 시야.

‘아아···.’

칠흑이 드리워진다.

어둡다.

마치 세상의 조명이 꺼지기라도 하듯 눈앞의 모든 게 암전(暗轉)되었지만, 창규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아닌 희열감이 떠올랐다. 문득, 기이한 풍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뭐야, 저게···.’

까만 우주.

그렇다.

지금 창규는, 우주를 직시한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여행자가 된 것처럼, 차단된 감각 너머에서 보인 검은 무한(無限) 가운데.

‘하, 하하···.’

별빛을 보았다.

의미 없어 보이던 까만 공간 사이로 점점이 이어지는, 노랗게 반짝이는 별빛들. 은하수를 수놓는 별들의 그것처럼, 화려하게 쏟아지고 있는 저것들은.

‘그래.’

검광(劍光)이었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저 순간마다. 찰나가 조각하는 저 불똥들이, 마치 길 잃은 목동을 인도하는 별자리처럼 창규의 앞에 펼쳐지고 있다.

쾅-!

별빛 하나가, 박웅태를 희미하게 비춘다.

쾅-!

별빛 하나가, 동경하던 무림인의 가면을 비춘다.

쾅-! 쾅-! 쾅-!

고막에선 피가 흐르고 입에서는 각혈이 나오고 있지만, 지금 창규에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 우주의 별자리를 보며 깨달은 것이, 벼락처럼 그의 전신을 꿰뚫은 탓이다.

‘그런 거였나···.’

생각해 보니, 모든 게 별이었다.

천마를 만난 뒤 고수가 되기 전에도.

스무 살 때 저 매화검을 본 뒤 가슴이 두근거렸던 순간도, 남들은 전부 꺼려하는 시체 청소를 해 보기로 결심한 순간도, 무림의 끔찍한 뒷세계를 본 후 토악질을 했던 순간도, 매일 같이 홀로 남아 검흔을 공부하던 순간도.

- 자, 슬슬 한계야. 알지?

그 어느 것 하나 별빛 아닌 게 없었다.

무학(武學)을 동경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창규의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돌이켜보면 지금의 창규라는 별자리를 완성시켜 주었다.

- 딱 한방.

기폭환의 부작용으로 시야가 깜깜한 지금, 유일하게 자신의 앞을 밝히는 저 검광들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그 시절, 창규를 유지했던 순간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별빛이나 마찬가지였다.

- 거기에 모든 걸 다 쏟아붓는 거야.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

두 고수의 칼끝과 칼끝이 만나며 만들어지는 별빛. 그 별빛과 별빛이 이어지며 만들어지는 별자리. 깜깜한 시야와 그 별자리들이 빚어내는 거대한 우주(宇宙)와 겹쳐지는 자신의 인생(人生)이.

- 숨 한번 들이켜.

숨 한 번에 짜릿한 우주가 담긴다.

이제,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사람을 우주라고 칭하던 천마의 가르침이 담고 있던 깊은 뜻을, 단전(丹田)에 소우주(小宇宙)가 담기는 그 묘한 이치를. 내가 있어야 하늘이 있고, 하늘이 있어야 내가 있다는 그 심오한 묘리를.

“후우우우···.”

뭔가가 바뀌었다.

심법에 성취가 있는 듯했지만, 지금 창규는 그런 사소한 깨달음에 취할 새가 없었다.

쾅-! 쾅-! 쾅-!

은하수처럼 넘실거리는 저 검광들 사이에서, 자신이 취할 행동은 분명했으니까.

- 너무 걱정할 거 없어. 긴장할 것도 없고.

몸이 슬슬 말을 듣지 않는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활선과 사선을 넘나들며 경공을 펼치고 있는 창규는, 이제 까만 시야에서 자신을 인도하던 저 은하수 사이로 파고든다.

- 내가 누구냐. 이 정도 애들이야 내 초식만으로도 커버 가능해. 마침 상황도 딱 들어맞고.

고막이 터졌나? 다리가 부러졌나?

상관없다.

몸이야 절망을 말하고 있지만, 그는 지금 행복을 보고 있으니까. 은하수가 흐르는 시야 저 너머의 우주를 보며, 별빛으로 화하는 저 검광들을 보며, 창규는 여태까지와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했으니까.

- 준비됐어?

강호를 동경하던 마음을, 별로 만들고 싶다. 고수라는 걸 깨달은 이 벅찬 마음도, 별로 만들고 싶다. 무쌍을 찍는 것도 좋지만, 고수로서 군림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쾅-! 쾅-! 쾅-!

바로 저런 별빛을 만드는 것.

무(武)의 길을 걸으려던 자신을 인도해 주던 별빛들. 시대와 시대를 건너 이어지던 저 별자리들. 그 별자리들이 무수하게 수놓아진 무림(武林)의 하늘.

- 성난 하늘에, 치우기 힘든 별들이 쏟아진다.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이제, 창규는 저 하늘에 자신만의 별빛을 보태고 싶다.

- 별의 꼬리를 잡지 말고, 충돌하는 별들 가운데 들어가는 거야. 피하는 게 하니라 휘두르는 느낌으로.

천마의 구결을 들으며, 마지막 남은 힘을 그러모은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창규.

쾅-! 쾅-! 쾅-!

살의가 빗발치는 두 고수들 사이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 제5식, 유성일로(流星一路).

그는, 신무림(新武林)의 하늘에 새로운 별 하나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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