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가지고 계신 승차권을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대전역, 출발 직전의 기차 안.
- 야, 성심당에서 빵 안 사 가냐?
시체처럼 좌석에 누워 있던 창규.
아까부터 계속되는 천마의 이죽거림에, 그가 창가 쪽을 향해 슬쩍 턱짓을 한다.
의 리
아직도 보인다.
기차 창문 바로 옆에 붙어서 입을 뻐끔대는 장로 김두광의 미소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에도 창규의 뒤를 따라와 결국 이 기차역 플랫폼까지 배웅을 나선 저 광기 어린 미치광이의 소름 끼치는 모습이.
- 참나, 저거 아직도 안 갔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창규.
성심당이건 나발이건, 괜히 여기서 딴짓하다가 저놈이랑 또다시 엮이고 싶진 않다.
- 그래도 대전은 성심당인데···
드러누운 창규가 새우처럼 몸을 만다.
구매한 열차 좌석은 좌우앞뒤 총 6자리.
비단 천마와의 대화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정신을 도저히 유지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 어쨌든 끝났네.
“하. 이제 좀 천마···음이 놓인, 미친!”
문득 내뱉은 말에 깜짝 놀란 창규.
“시발, 내가 방금 뭐라고···.”
- 이거 주화입마 걸리기 직전이네, 어.
사실, 아직도 정신이 혼미하다.
첫날을 포함한 총 4일이라는 시간 동안, 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기했던 것들이 창규의 정신에 벌써 깊게 새겨졌기 때문이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창규.
그가 품 안의 지갑에 박혀 있던 명함을 꺼낸다.
그래도 결국, 얻어 냈다.
『 참하늘주님의성회 대전의 집
장로 김두광 』
천마를 향한 광신도(狂信徒)의 신뢰.
복음, 기도, 예배에 더해 방언까지 터뜨려 대며 겨우 얻어 낸 이건, 추후 창규가 위험에 처했을 때 커다란 힘으로 돌아올 것이다. 천마 복음을 듣는 자를 지키는 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칼은 무슨, 잘못 잡다가 주화입마 올 뻔 했네.’
부스럭.
명함을 집어넣은 창규의 주머니에서 펜이 느껴진다.
‘뭐, 그래도 성과는 쏠쏠하구만.’
이 펜으로 찍어댄 경전의 사진들.
이건, 백검단으로 복귀했을 때 임무 보상으로 용환단을 얻어 낼 증거가 될 것이다. 눈치로 보아 백검단은 저들의 경전이 ‘대장로가 가져온 성물’을 제각각 해석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솔직히 아무려면 어떤가.
‘용환단···.’
지금 중요한 건 용환단.
앞으로 2개 정도만 더 먹으면, 창규의 내공은 거의 2갑자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건 솔직히 2개는 받아야 한다, 진짜.’
급하게 보내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영혼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맹주 곽용범의 표정을 떠올린 창규가 이를 으득 갈았다. 솔직히, 저 미친놈들의 소굴에 보내놓고 용환단 한 개 정도로 퉁치면 양심 불량 아닌가.
- 너 뭐, 그래도 얻은 게 또 있지 않아?
사실, 천마의 말대로다.
창규가 얻은 건 비단 장로의 명함과 영약 획득권만이 아니었다.
“의···리.”
- ···입 밖으로 내뱉진 말고.
광기 가득한 기도실에서 얻어 낸 것.
초식의 발현 사이사이의 찰나마다 잡념이 끼는 창규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바로 저 미친놈들이 가진 무념(無念)의 경지였다.
- 걔들, 기도실 한번 잘 꾸며 놨어. 그치?
수십 명이 집단으로 모여 내뱉는 성언(聖言).
벽마다 부딪혀 사방에 진동하는 낮은 공명음(共鳴音)과, 빠른 템포로 정신을 두드리는 일정한 리듬의 북소리까지. 광신도들이 집단적으로 쏟아 내는 기도음과 천마를 향해 달리는 광기 사이에서, 개인이 가진 상념은 희미해진다.
일종의 집단 트랜스 상태.
좋게 말해서 집단 트랜스지, 말만 바꾸면 세뇌 직전이나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방언이 터지고, 침과 피가 머리 위로 튀겨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광기에 휩싸이는 상태.
- 멍 때리기 딱 좋았지.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창규의 머리에 들어찬 잡념을 지우기에 딱 좋은 계기가 되었다.
- 어때?
“뭐, 도움은 되긴 한 것 같은데···.”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창규.
잡생각을 지우고 초식을 몸에 체화하는 힌트를 얻긴 했지만, 방법이 영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의리.”
- 입 밖으로 내뱉지는 말고, 좀.
“천마···음 속으로만요?”
- 아, 이 새끼가.
점점 정신이 멍해지던 광란의 기도 순간.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정신이 살짝 아득해진다.
“그나저나, 잘못했으면 저도 그 꼴 났을까 아찔하네요, 진짜.”
3일 만에 빠져나온 것도, 조금만 더 머무르면 세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철컹-!
다만, 열차가 출발할 때쯤.
전신의 기운이 빠진 듯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창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 뭐, 그래도 기대되긴 하지?
“네.”
천마의 말대로, 점점 기대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毒)조차 성장을 위한 영양분으로 취했었던 창규. 그런 그에게, 완벽한 초식을 펼치는데 있어 이 정도 광기(狂氣)는, 기꺼이 삼킬 수 있는 영양분이 될 테니까.
“이번 경험으로 초식 연습하면, 확실히 성취는 있겠네요.”
철컹철컹-!
당장에라도 수련을 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점점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하는 기차 위에서.
“·········의리.”
- 아, 좀.
백창규, 서울 복귀.
* * *
경복궁 근처의 한 카페.
무림맹주의 사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복귀하면서 별일 없었어?”
“네, 단장님.”
“혈교도(血敎徒)로 보이는 놈들도 없었고?”
“교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상하네.”
벌컥, 벌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입에 들이킨 박웅태가, 얼음을 우득우득 씹으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분명 차이나타운 근처에서 그 새끼들을 봤다는 애들이 있었는데···.”
“다만.”
스윽.
탁자 위로 몇 장의 사진들이 놓인다.
한주빈이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혈교(血敎) 조사를 하며 찍어온 현장 기록들.
“흔적을 찾기는 했습니다.”
“이거···.”
“맞습니다.”
박웅태의 눈이 살짝 올라간다.
마치 흡혈이라도 당하듯 전신에 피가 빠진 채 쓰러진 시체들. 그리고 그 위에 희미하게 새겨진 혈교 제사장의 낙인.
“혈강시(血僵尸)···입니다.”
“하!”
혈교 제사장이 다룰 수 있다는 혈강시들이었다.
“이 새끼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한데,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아시다시피, 혈강시는 제사장과의 거리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제사장과 감각을 공유하는 혈강시.
보통 이것들은, 조종하는 제사장이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지닌다. 그러니, 대부분의 혈강시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의 혈교 제사장 주위에서 발견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혈강시들이 발견된 위치는 전부 제각각입니다. 여길 보십시오.”
다만 이번의 혈강시들은 다르다.
“이건 차이나타운 입구의 화장실에서 발견된 혈강시고, 이건 안쪽 깊숙이 있던 중식당의 환풍기에서 발견된 혈강시입니다. 또한 이건 은행 사거리 밑의 하수구에서 발견되었고요.”
제각각 멀리 떨어진 채 발견된 혈강시들.
하수구, 환풍기, 공공 화장실, 굴다리 등 적게는 수십 미터, 많게는 수 키로미터나 떨어진 장소에서 발견된 이것들은, 실력 좋은 제사장이라고 해도 그 본래 위력을 써먹을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심지어 유지된 시간도 짧고,
싸움을 겪은 흔적도 없다.
그럼, 결론은 하나.
“······뭔가 찾고 있는 게 있나 보네.”
“맞습니다.”
이거, 수색용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발견된 저 혈강시들, 제사장이 ‘뭔가’를 찾기 위해 퍼뜨린 것이다.
“어차피 감각만큼은 혈강시가 쓰러지기 전까지 공유 가능하니까.”
“하지만, 뭘 찾고 있던 것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박웅태.
“이번 미친 새끼가 어떤 취향일지는, 아직 모르니까.”
혈교의 제사장들은,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게 힘들 정도로 제각각 성향이 다르다. 혼자 은밀히 움직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저번 영국의 스타디움 사건처럼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세력을 만드는 걸 즐기는 놈도 있다.
“어찌 됐든 간에···.”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딱 하나.
“······벌레 새끼가 발견되었다는 거잖아.”
“······맞습니다.”
혈교 제사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
혈교 놈들이 뭘 찾는지,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따위는 박웅태에게 별 상관이 없었다.
“벌레는 박멸해 주는 게 예의지.”
우드득!
다시금 얼음을 깨물어 씹은 뒤 의자를 밀고 일어난 박웅태.
“너, 아직 영감한테 보고 안 했지?”
“아직 회의 중이십니다.”
“뭐야. 반연문주 그 새끼, 아직도 안 갔어?”
“예.”
“걔네도 언제 한번 조져 놔야 되는데···.”
그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 앉았다.
털썩.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의 똥물 사건 때문에 미뤄졌던 몇몇 대형 문주들과의 독대가, 벌써 3일째 맹주의 일정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 말이다.
“영감님도, 참. 원래는 그런 정치질이 어울리는 양반이 아닌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신무림(新武林)의 패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단순한 힘만이 아니었으니까.
못마땅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던 박웅태.
그가 문득, 한주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걔 어떻게 됐지?”
“누구 말씀이신지.”
“걔 있잖아.”
그러고 보니 궁금했던 탓이다.
짧은 기간 내에, 가진 힘에 비해 꽤 많은 파문을 이 백검단에 일으킨 두 녀석 중 하나.
“며칠 전에, 그 싸이코 소굴로 보낸 이번 신입.”
박웅태와 한주빈이 동시에 흥미를 보이고 있는 뒷골목 잡초.
“·········백창규 말이야.”
녀석이, 첫 미션을 어떻게 끝냈는지 말이다.
* * *
“·········음?”
저번보다 더 심했다.
저벅.
저벅.
맹주 사택 근처의 돌담길을 걷던 창규는, 얼마 전 곽용범을 보러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삼엄한 기도가 이곳을 감싸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진득한 살의(殺意).
성성한 기도(氣道).
사방에서 피어나오는 기운과 따가운 시선들을 느끼며 걸음을 내딘던 창규는, 곧 대문 앞에 다다른 후에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뭐냐.”
“맹주님께서 임무를 마친 뒤 바로 이곳으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기해라.”
“아니, 오무답문 관련한 임무라 바로 찾아오시라고···.”
“맹주님은, 지금 중요 업무가 있으시다.”
“분명히···.”
“중-요-업-무가 있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대문 앞에서 자신을 막은 경호 단원.
삼엄해진 주위 경비와, ‘오무답문’이라는 업무를 언급했음에도 부리부리한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을 막은 이자의 태도로 보아, 지금 저 안에서는 꽤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대기하는 백창규의 귀로,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타다다닥!
“야이, 미친놈이! 너 꿀 빨았다며!”
“오.”
“근데, 근데 왜 문자를 씹어! 나만큼 빡세지도 않았으면서 왜 문자 씹냐고!”
대문 옆에서 달려오는 서정우.
해가 졌음에도 착용하고 있는 선글라스 위로 시퍼런 멍이 보이는 게, 경호실에 적응하는 요 며칠 사이 꽤 과격한 신고식을 치른 듯한 모양인데.
“대기 자리 이탈.”
“마!”
“근무 후 어제 것까지 20대 추가다. 당장 자리로 복귀···.”
“너 대전 갔다 왔다며!”
“이 새끼가.”
정말 눈치가 없는 건지, 옆에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선배 경호단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창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서정우.
“사 왔어?”
그 싱글벙글한 얼굴에는, 선배의 으름장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벅찬 감정이 서려 있었다.
기쁨, 기다림, 설렘, 반가움 등.
선배 경호단원이 우드득 몸을 푸는 옆에서, 서정우의 얼굴에 떠오른 이 수많은 감정들이.
“뭘.”
“문자! 문자 안 읽었어!?”
“나도 바빠서 못 봤어.”
“야이!”
실망과 분노로 바뀌어 버린 순간.
“내가! 내가 분명히 사오랬잖아!”
“음?”
“문자! 문자 보냈잖아! 왜 문자를 안 읽어, 이 새끼야!”
“미안, 뭐라고 했냐?”
“대전에 가면!”
짜증 내는 서정우를 본 창규는, 문득 자신의 내면이 요 며칠 동안 대폭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성심당! 성심당 빵 사오랬잖아-!!”
“아.”
지금, 이 눈치 없는 놈이 더 없는 정상인으로 보이고 있으니까.
- 거봐, 대전은 성심당이라니까.
그렇게, 징징대던 서정우의 뒷목에 선배 단원의 우악스러운 손이 자리할 무렵.
끼이익-!
맹주 사택의 대문이 열리며, 위압적인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끄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