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무림 견문록-46화 (46/150)

46화.

부우우-!

박웅태가 ㄷ자 구간의 첫 번째 건물 옥상에 탄지공(彈指功)을 먹인 뒤, 리무진이 다음 코너로 들어설 때쯤.

“·········추가 감속하겠습니다.”

한주빈의 눈이 살짝 커진다.

운전 단원의 입에서 추가감속이라는 말이 나온 것, 지금이 처음이다.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인 그녀의 눈에.

쿠릉-!

보인다.

코너의 폐차장을 둘러싼 합판이 종이쪼가리처럼 우그러지는 것이. 보를 막던 둑이 터진 것처럼, 폐차장에 쌓인 육중한 차체들이 우레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게.

꽈르르릉-!

도로라는 협곡에 쏟아진 작은 산사태.

몇 톤이 넘는 차체들이 리무진과 경호 대열을 덮치려던 그 순간!

철컥. 선두에 있는 경호 차량의 열린 문 앞뒤로, 두 개의 인영(人影)이 허공에 솟구친다. 각각 검과 맨주먹을 든 이들이 쏟아지는 폐차 더미를 향해 경공을 밟은 뒤.

검을 든 이가 허공에서 칼춤을 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난 요란한 검기(劍氣).

하나, 둘, 열, 스물, 서른···

쏟아지는 차 사이로 수많은 실선이 그어지더니.

서걱-!

홍수처럼 쏟아지던 차체들이, 잘린다.

둘, 넷, 스물, 마흔, 예순···

수박처럼 덩어리진 채 조각난 폐차더미들.

그 위로, 다른 이가 권(拳)과 퇴(腿)를 퍼붓는다.

퍼버벅-!

춤을 추듯 쏟아지는 주먹과 다리들.

마치 천수관음(千手觀音)이 망치질을 하는 듯한 그의 공격에, 잘린 고철 덩어리들이 모조리 폐차장 안으로 방향을 바꿨을 때.

탁, 탁.

두 경호단원들이, 허공에 마지막으로 남은 두 덩어리를 박찬 힘으로 차량의 문 안으로 다시 탑승한다.

역시, 백검단 내부에서 특임 단원보다 평균 무력이 높다는 경호 단원들의 실력이었다.

쏟아지는 폐차 테러를 막아 내는 그들의 실력은 거의 묘기에 가까웠지만, 단장과 부단장의 입이 살짝 벌어진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오.”

“흐음.”

순간적으로, 리무진의 속도가 느려졌다.

살짝 브레이크를 밟았다는 얘기.

리무진의 진로에 지장을 줄만큼의 테러를 가한 주제에, 저 폐차장 너머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놈, 치고 빠질 줄 알잖아?’

피식 웃음을 짓는 박웅태.

경호 단원을 밖으로 나서게 할 정도의 테러를 가한 점도 칭찬해 줄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을 바로 파악한 뒤 다음을 기약하러 퇴각한 게 더 대견하다.

“그나저나···.”

“좋구나.”

“예?”

뿐만 아니라, 곽용범의 얼굴에도 초승달처럼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소요유(逍遙遊).”

“소, 뭐요?”

“아직 미약하긴 해도, 자유롭게 노니는 걸음이 꽤 재미있다는 얘기다.”

“영감 거, 쉽게 좀 말하쇼.”

“그래, 내 언젠가 손주랑 노는 시간이 자는 시간보다 많아진다면 노력해 보마.”

“염병, 내가 말을 말아야지.”

껄껄 웃는 곽용범을 보며 신경질을 내는 박웅태.

매일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이런 옛 문자들의 뜻은 아직도 가늠이 안 되지만.

“그보다 주빈아.”

“예, 맹주님.”

“내 암살 의뢰 문서 말이다. 녀석들에게 주었느냐?”

“예. 미션 시작 전에 문서 전달했고, 아까 후발 단원들이 숙소를 체크했을 때 문서에 대한 추가 작성 역시 완료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흠.”

“안 그래도 방금 사진 도착했는데, 혹시 보시겠습니까?”

“그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디, 그것 한번 보자꾸나.”

이 노친네가, 이번 인턴들의 작전에 대해 궁금증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을.

* * *

궁금증을 해결했다.

5성에 다다른 천마군림보의 외기발현 한계.

‘·········4m.’

창규는, 아까 동대문의 첫 번째 암살 구간에서 최종작전에 사용될 재료를 확인한 참이다. 구불거리는 콘크리트 틈을 따라 튕겨간 그의 내공은, 분명 동산처럼 쌓인 폐차들 한가운데의 균형을 터뜨리며 발현되었다.

‘길만 잘 잡으면, 4M까지도 아슬하게 가능하다.’

마치 물수제비를 보는 듯했다.

진각을 밟으며 튕겨 넣은 내공이 지면을 매개로 아슬하게 전달되는 기이한 현상은.

- 아직 부족해. 걷는 것만으로 대지를 쪼개고 산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에잉!

이 정도면 충분하다.

‘위 대신 아래로. 방향만 조절하면 돼.’

아쉬워하던 천마와는 달리, 창규는 곧 있을 네 번째 암살 구간에서 이 천마군림보가 자신의 작전에 쐐기를 박을 것이라 확신했다.

‘후우.’

그렇다, 4번째 암살 구간.

부아아아-!

벌써 동작구를 지나고 있는 창규가, 이전의 암살 포인트들에서 확보했던 데이터를 떠올렸다. 종로구에서 동대문구, 동대문구에서 광진구, 광진구에서 강남구 사이의 암살 구간마다 단 1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던 소중한 기회들.

‘확실히, 괴물들이야.’

2번째 포인트였던 광진구 굴다리.

출구 방향의 폐가를 점거한 창규가 운복환으로 굴다리 터널 밖에 깐 자욱한 안개는, 정확히 2초 만에 흩어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오토바이를 탄 경호단원의 칼질 두 번에 의해서.

‘운복환 안개가 그렇게 빨리 사라질 줄이야.’

3번째 포인트였던 강남구 한강철교 아래.

지역 향우회 컨테이너를 점거한 창규가 철교를 타고 오른 뒤 내공을 담아 슬쩍 내비친 귀영도는, 철교 위에서 날아오는 탄지(彈指) 때문에 놓쳐 버릴 뻔했다.

‘예민함의 차원이 달라. 살기(殺氣)와 검흔(劍痕)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다.’

실패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가 시도한 암살은, 그 하나하나가 경험이 되고,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된다.

‘100만큼의 내공을 넣어 만든 운복환 안개가 전부 사라지는 데 2초. 귀영도에는 10만큼의 내공을 넣었어도 1초도 안 되어 알아차렸다.’

동시에, 여태 창규가 보여 주었던 3번의 암살시도는 그 자체가 저들의 심중을 흩트릴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 아니, 기회로 만들어야만 한다. 분명히, 만들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해.’

산악 오토바이를 타고 태백산을 누리던 때가 있었다. 1㎝를 움직일 때마다 뇌가 타 들어갈 정도로 시야의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하는 건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 살기 위해 발악했던 경험이 있는 창규에게, 지금 널린 정보들은 뷔페 만찬이나 다름없다.

끼익-!

하지만 서정우는 달랐다.

“야.”

“매번 기다리는 거 안 지겹냐? 먼저 도착했으면 알아서 포인트 골라서 먼저 들어가···.”

“닥치고.”

네 번째 암살 구간인 노량진 수산시장.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아침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씩씩대며 입을 연다.

“너, 뭐냐?”

“뭐가.”

“왜! 너만 멀쩡하냐고!”

씩씩대는 녀석의 얼굴이 엉망진창이다.

터진 입술에는 피가 맺혀 있고, 눈에는 푸른 멍이 들어 있다. 전신에 생긴 크고 작은 상처 곳곳에서 피가 흐른다. 옷은 쥐어뜯긴 듯 곳곳이 터져 있고, 트레이드 마크 같았던 장발 아래가 터진 짚단처럼 잘려 있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모양새.

“이거 봐! 그 새끼들! 왜 나한테만 탄지공(彈指功) 쓰는데!”

이건, 일종의 성적표였다.

미션을 평가하는 백검단장이, 실망스러운 행동을 볼 때마다 탄지를 날려 경고를 줬다는 증거.

“대체 왜 나만···.”

“넌 너무 튀잖아.”

“뭐가!”

“그렇게 요란하게 움직이고, 현장에서 바로 빠져나오지 않아도 걔들이 가만둘 거라 생각했어?”

맞는 말이다.

2번째 암살 구간에선, 굴다리 입구로 인근 폐쇄된 건설현장의 크레인을 사용하고. 3번째 암살 구간에선, 철교가 끝나고 샛길로 돌입한 리무진 위에 욕조째 끓는 물을 퍼부으며 고래고래 욕설을 날렸던 서정우.

전체적인 암살시도에 일관성도 없고 뭘 노리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럼! 넌 뭐 달라? 솔직히, 너나 나나 걔들한테 흠집 하나 내지 못한 건 똑같잖아!”

“난···.”

“왜! 왜! 너랑 별 다를 것도 없는데,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대답하려던 창규가 문득 말을 멈췄다.

분명, 녀석은 아까 자신의 천마군림보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듯 했다. 첫 탄지에 그가 애지중지 기른 장발이 단발이 된 이후, 그는 창규가 다가갈 때까지 3층 옥상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해댈 뿐이었으니까.

- 얘 자존심 많이 상했네.

잠깐만.

- 어쨌든 너는 깨끗하고 얜 엉망이잖아. 백검단장이 너만 인정하고 자긴 무시한다고 느낄 수밖에.

문득 창규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 아닌 척해도, 첫 비무 이후로 너한테 쭉 열등감 갖고 있잖아.

어쩌면, 이 관심에 목마르고 열등감에 휩싸인 녀석과 함께 자신의 계획을 더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 개 같네.”

“나도, 솔직히 백검단장 거지 같아.”

창규의 말에 욕설을 내뱉던 서정우가 고개를 돌린다.

“탄지도 안 맞은 새끼가 뭔···.”

“우리 처음 비무 했을 때 기억나? 그 새끼, 말투부터 표정까지 건방진 게 딱 봐도 우릴 자기 밑으로 보는 것 같더라고. 걔, 자기 이름도 우리한테 직접 말 안 한 거 알지?”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

하지만 창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까놓고, 우리 둘이 경쟁할 필요가 뭐 있는데? 굳이 같은 지원자끼리 비무 시킨 다음에 경쟁시키는 단체가 또 어디에 있냐고.”

창규는, 자신에게 다시 열등감과 경쟁심을 느끼려는 정우와 동질감을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뱉었다.

“그거 아냐? 그날, 그 새끼가 너 기절시킨 다음에, 나도 기절했던 거.”

“너도···.”

“너 깨어나기 전에 한번. 너 기절한 다음에 한번. 질문 두 번 하게 만들었다고 두 번 기절시키더라. 미친놈이.”

서정우의 표정이 살짝 흔들린다.

피딱지 묻은 입술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자리가 깡패야, 씨발.”

“까놓고, 네가 창염문주면 그렇게 행동했겠어? 맹주 측근이니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거지.”

“하여간 권력 등에 업고 멋대로 행동하는 새끼가 제일 역겨워.”

“기득권의 힘 아니겠냐. 무림맹, 잘나가잖아?”

“······개 같은 메인스트림.”

어느새 창규와 함께 백검단장을 욕하기 시작한 서정우. 그런 정우를 본 창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백검단장이, 이 미션 최대 기록 달성자인 거 그 거지한테 들었지? 무림맹주 옷깃 벤 거.”

“그게 뭐.”

“입단 날짜 찾아봤는데, 지금 네 나이가 그때 백검단장 나이보다 1살이 더 어려.”

“···!”

문득 고개 들어 자신을 응시하는 서정우.

창규는, 그 눈에서 되살아난 욕망을 보았다.

“너, 오늘 맹주 옷깃 베면 그 재수 없는 새끼보다 1년이나 더 빨리 가게 되는 거라고.”

“내, 내가···.”

“‘역대 최연소’로 백검단 미션 최고 단계를 달성한 놈이 되는 거지. 백검단 에이스 되는 거야, 뭐 당연한 사실이고.”

꿀꺽!

“내년에 베면 타이 기록이야. 최연소 타이틀 못 단다니까?”

보인다.

주목받고 싶어 하고 관심받고 싶어 하는 놈의 욕심이. 자신을 무시하고 탄지를 날린 백검단장에게 한방 먹여 주고 싶다는 절절한 의지가.

“한방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창염문 3대 제자 출신이나 돼서, 앞으로 입단하면 계속 보게 될 단원들 앞에서 비웃을 거리 만들어 주고 싶냐고.”

창규의 자극은 효과가 있었다.

으득!

경쟁 구도가 아니라 공동의 적을 함께 노리는 구도를 만드는 것. 창규를 향한 정우의 열등감과 질투심이, 백검단장을 향한 분노로 표출됐을 때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랑 같이 하자. 몇 없는 기회, 흥분해서 날리지 말고 제대로 뭔가 보여 주자고.”

창규가 입을 열었다.

“내가 봤을 때. 넌, 네 가장 큰 무기를 몰라.”

방금 이건 진심이었다.

창규가 봤을 때, 서정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쾌검도 아니고 녀석의 뒤를 휘감는 창염문도 아니다.

‘또라이.’

자존심 강한 또라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튀고 싶은 마음이 유달리 강한 이 녀석은 그 인정욕구를 강한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내 무기? 그게 뭔데.”

“너 아까 그 빨간 바이크 있지.”

“뭐야. 겨우···.”

“그게 아니라, 너 그거 타고 오는 동안 대로에서 백검단원들 마주친 적 없지?”

“백검단원? 누구? 아까 경호하던 애들 말고?”

창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신은 암살 구간 사이사이의 대로마다 종로에서처럼 암기를 투척하는 백검단원들을 보았는데, 이 녀석의 마개조한 바이크는 워낙 빠르게 달려 놈들이 있는 줄도 모른다.

‘광기(狂氣)에 가까운 스피드.’

서정우의 인정욕구와, 저 빨간 바이크의 미친 스피드가 함께라면, 작전의 효과를 배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야.”

노량진 시장 너머로 고개를 드는 창규.

벌써 붉은 노을이 뉘엿하게 지는 곳으로, 저 멀리 길게 내려오는 고가 도로가 하나 보인다. 이 암살구간과, 저곳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던 창규가, 서정우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내 작전, 한번 들어나 봐.”

* * *

부아아아-!

해가 떨어지고 희미한 달이 올라간다.

4번째 본부인 훈련본부에서 회의를 마친 뒤 저녁까지 먹은 맹주 무리를 태우고 5번째 본부로 이동하는 리무진. 그 안에서, 실망감이 묻은 대화가 오가고 있다.

“쟤들, 여태까지 한 게 끝은 아니겠지?”

“모르죠.”

맥 빠진 표정을 짓는 박웅태.

“서정우는 몰라도, 백창규 걔는 좀 실망이네.”

그가, 처음 페차장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덤벼들었던 백창규를 떠올렸다. 아침만 해도 뭔가 보여 줄 줄 알았는데, 여태껏 녀석이 보여 준 행동은 썩 기대에 미치지 않았다.

“그래도, 귀물 자체를 이용하는 방식은 꽤 괜찮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장비빨이란 소리잖아. 처음에 그거 한방 보고 여태껏 내버려 둔 건데, 이번에도 뭐 없으면···.”

박웅태가 문득 한숨을 내쉰다.

“근데, 솔직히 기대가 크게 안 되네.”

“아까 암살 의뢰서 때문에 그러십니까.”

“다시 봐봐.”

“네.”

한주빈이 건넨 폰 화면에, 아까 맹주에게도 보여 줬던 [맹주 암살 의뢰서]의 사진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공란이었던 특이사항을 스스로 채우게끔 만들어 각자 어떤 식으로 타깃에 접근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건네주었던 의뢰서의 사진.

“백창규, 이거 뭐 하는 새끼야?”

그중 백창규가 작성한 의뢰서의 사진을 본 웅태가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름: 곽용범.

나이: 68세.

별호: 도성

신장: 175㎝.

체중: 89㎏

기본사항 밑으로, 공란이었던 특이사항에는 단 한 단어만이 적혀 있었으니까.

특이사항: 깔끔함

“············깔끔함은 뭔 소개팅하나, 미친놈이.”

“크흠!”

욕설을 듣고 헛기침을 하는 곽용범을 바라본 박웅태가, 한주빈에게 조심스럽게 전음을 날렸다.

- 우리 노친네 유난 떠는 걸, 지금 뭐 조사랍시고 써놓은 거야?

- 사실이긴 하죠.

- 그럼, 무림맹주가 깔끔해야지 어디 거지 같은 놈 앉힐까.

- 그래도, 맹주님이 유독 신사다운 면이 있잖아요.

- 좀 재수 없긴 하지.

조용히 위스키를 마시는 맹주를 힐끗 쳐다보는 박웅태. 확실히, 저 나이에 3피스 올백 수트를 입는 건 일반적인 일은 아니긴 하다. 행색만큼이나 품위와 격식, 그리고 기품이 어우러지는 언행을 구사하는 평이 자자한 한국 무림 맹주.

- 근데 그게 뭐?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특이사항이랍시고 떡하니 적으면 뭐 어쩌라는 거야.

- 이상하긴 하네요.

창밖을 바라본 박웅태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 이번 애들, 몇 단계까지 갈 것 같냐?

- 글쎄요.

모든 시험이 그렇듯, 이 미션에도 단계가 있다.

질주하는 차량을 멈춰 세우는 것, 경호 차량의 단원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 오토바이에 탄 단원들과 이합 이상을 겨루는 것 등. 그 성취에 따라 연봉과 복지 및 기타 혜택, 그리고 근무지에 대한 선택권 등이 주어진다.

- 일단 단장님이 했던 정도까진 못 오겠죠.

- 당연한 소리하지 말고.

최고 단계는 맹주에게 상처를 내는 것.

하지만, 역대 미션을 치뤘던 모든 인턴 중 이를 달성했던 건 현 백검단장 박웅태 뿐이다. 옷깃을 베며 살결에 새긴 조그마한 찰과상. 하지만 이건 한 명밖에 없으니 예외라고 치고.

- 난 처음에, 왠지 얘들이라면 오랜만에 우리 노친네 밖으로 꺼내줄 줄 알았거든?

현실적인 최고 단계는, 맹주를 본부 이외의 공간에서 리무진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다. 무릇 타깃을 노릴 각도가 증가할수록 암살의 가능성도 높아지니까. 천운이 따른다면 옷자락을 벨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수 있고.

- 근데 지금 보니까, 좀.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 게냐?”

문득 끼어드는 곽용범.

“아, 영감님.”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라 했다. 모름지기 뒤에서 일을 도모함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더냐.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작당모의라도 했던 것이냐.”

“별거 아니요. 그냥···.”

“모발은 떳떳하게 내보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할 말만큼은 밖으로 떳떳하게 내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염병! 신사는 개뿔!”

울컥한 박웅태가 입을 열었다.

그가 봤을 땐, 이 양반 기품 있다는 것도 다 개소리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이런 얄미운 구석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한번 정도는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은데.

“아오., 한방 콱 먹였으면 좋겠는데···.”

“오늘 하루, 내 호신강기(護身剛氣)를 쓰지 않으마.”

“뭐요?”

그 바람을 읽었는지, 투덜대던 웅태를 향해 곽용범이 픽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 그대로다. 네가 보낸 이번 아이들의 습격에 한해서, 호신강기를 쓰지 않는다고 하면 네 마음이 좀 편해지겠느냐?”

“갑자기 뭔···.”

“허허. 네놈 화가 자꾸 많아지니 머리털이 밖으로 나오길 무서워하는 것 아니더냐. 머리털 하나라도 더 날 수 있게 정신 건강을 챙겨주는 게 좋은 상사의 도리지.”

“하, 짜증 나네.”

“흔들리지 말거라. 내 언제나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역시, 놀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웅태는 맹주가 뱉은 약속을 깊게 기억했다.

“참나, 당연히 쓰지 말아야지 뭘 선심 쓰듯 말하나. 애초에 병아리들 상대로 호신강기 쓰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아쇼?”

호신강기를 쓰지 않겠다니.

살짝 희망이 생긴다.

마음의 평점심을 유지하니 어쩌니 하는 핑계로 자신의 탈모를 놀리던 저 얄미운 맹주에게, 이번 녀석들이 어떻게든 한방 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는 박웅태.

“하하. 개구리 올챙이 생각 못 한다더니, 웅태 네가 병아리를 운운하는···.”

“됐고. 기다려 보쇼.”

하지만, 그는 곧 펼쳐지는 광경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작년에 비하면, 올해 녀석들은······아.”

노량진 수산시장 뒤편.

부아아-!

암살 구간에 막 진입하는 리무진 앞으로, 항아리 입구처럼 좁아지는 길이 보인다. 좌우 창문으로 갖가지 해산물 가게들을 지나치는 와중, 저 길의 끝을 좌에서 우로 빠르게 지나가는 오토바이가 있었다.

퍼퍼퍼펑!

동시에 모락모락 퍼지는 짙푸른 안개.

아까도 보았던 백창규의 수법이다.

“저 새끼 학습효과 존나게 없네.”

“어허.”

“아니, 영감님! 어떤 미친 살수가 한번 실패한 암살 방법을 두 번이나 씁니까. 봐요, 저건 2초면···.”

하지만 박웅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칼을 뽑고 앞으로 나선 오토바이 단원의 속도가, 잠깐 주춤했는데.

핑━━━!

짙푸른 안개 사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짙은 살기(殺氣)를 띈 은빛 실선이 그어졌기 때문이다.

“뭐야, 저거.”

박웅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안개 속에 담긴 하얀 선.

귀영도가 허공에 남긴 검흔(劍痕)이 담은 내기와 살기를 느낀 경호단원들이 살짝 주춤한 순간.

“·········아무것도 아니잖아?”

마찬가지 판단을 내린 선두의 경호단원들이 뒤늦게 앞에 깔린 안개를 해체하는데 걸린 시간, 총 4초.

“푸핫! 이놈들, 재밌구나.”

“이 노친네, 왜 이래?”

4초면 충분했다.

흩어지는 안개 너머로부터.

부아아아아아-!

노량진 하늘 저편에서 떨어지는 새빨간 슈퍼 바이크의 엔진 소리가 들리는 데에는.

* * *

빠직빠직.

전신에 짜릿한 느낌이 든다.

쏟아지는 바람이 바늘처럼 전신을 찌르지만, 상관없었다.

‘·········이거라고!’

바이크와 함께 떨어지는 서정우.

그의 시야에, 찍힌다.

대각선 아래, 걷힌 안개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던 백검단원들의 당황한 눈빛이.

‘새끼들, 꼴 좋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인다.

아까 탄지를 맞을 때만 해도 비웃음 어린 표정을 짓던 저 새끼들을 내려다보는 이 기분이 얼마나 짜릿한지, 평범한 이들은 아무리 말해 줘도 모를 것이다.

콰콰콰콰콰콰-!

이건, 찰나(刹那) 동안의 감상.

‘백창규, 그 새끼 말이 맞았어.’

고가도로 멀리서부터 가속한 속도로 리무진이 있는 지상에 뛰어든 것도, 타이밍 맞게 뿌렸던 백창규의 안개가 자신을 가려 줬던 것도, 리무진을 향해 떨어지는 자신의 애마의 궤적에 모든 경호 병기가 집중되는 것도.

‘어디 한번···.’

떨어지는 바이크와 리무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사방팔방의 경호차량에 있던 백검단원들이 달려든 것도, 떨어지는 바이크에서 두발을 뗀 뒤 도약을 준비한 것도, 리무진 뒤편으로 떨어지는 바이크를 걷어찬 뒤 허공을 돌아 리무진 중심부에 착지한 것도.

콰콰콰콰-!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 짜릿함을 즐긴 것도, 모두 찰나의 일이었다.

비록 자신의 애마는 리무진에 닿기 직전 경호 단원들에 의해 순식간에 해체되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들 X돼 봐.’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을 무시하던 시선을 보내던 이들이, 눈이 왕방울만해져 허겁지겁 달려드는 모습을 보는 것도. 놈들의 당황한 눈을 보며, 리무진의 천장에 칼을 박아넣는 것도, 모두의 관심 한 가운데에 있는 이 상황도, 전부 죽을 만큼 짜릿했으니까.

푹-!

이런 짜릿한 기분을 위해서라면, 저깟 오토바이는 몇 대라도 날릴 수 있다.

‘백창규!’

카가가가각-!

‘·········빨리 해!’

* * *

네 번째 암살 구간.

횟집들이 만나는 샛길로 빠지는 대로변.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로, 들린다.

끼익!

서행하던 리무진 및 경호 차량들이 모조리 멈춰서는 소리가. 방탄 및 방검 코팅이 된 리무진의 천장에, 기세 좋게 박아넣은 서정우의 쾌검이 조그마한 틈을 만드는 소리가.

- 됐어!

여기부턴 포인트가 필요 없다.

아니, 음식점과 개인 영업장이 널린 노량진의 이 축축한 길바닥 모든 곳이 포인트다.

‘어차피, 밖으로 나오게만 하면 되는 거잖아?’

흩어진 안개 너머에서, 자신을 발견한 몇몇 경호 단원이 경공을 펼쳐 오지만.

- 지금!

거리는 진작 재놨다.

‘3.5m, 이번에는 위 대신 아래.’

숨을 들이마신 창규가, 웅혼한 내력이 담긴 진각을 밟은 순간!

천 마 군 림 보

퍼펑! 퍼펑! 퍼퍼퍼펑!

바닥에 매설된, 길가의 정화조 뚜껑들이 터지며.

“뭐, 뭐야!”

“어?!”

“씨, 씨발?”

백검단의 경호행렬 위로,

소나기 같은 똥물이 한량없이 쏟아져 내렸다.

* * *

후두둑.

“·········.”

정적.

“아, 아니, 진짜로? 우욱!”

다시, 정적.

“냄새 씹, 아니, 영감님. 다시 생각해 봐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겪은 모든 극독과 위험 물질의 정보가 담긴 리무진의 불침(不侵) 센서에도, 이런 망할 정보는 입력된 적이 없었다. 차라리 폭탄을 던지면 던졌지, 여태 그 어떤 미친놈도 한국 무림 맹주의 리무진 위로 이런 걸 뿌린 전례가 없었으니까.

“영감, 아니, 맹주님!”

“맹주님!”

아까 서정우가 낸 리무진의 천장의 틈으로.

후두둑!

역한 냄새를 뿌리는 오물이 떨어지는 가운데.

“문 열거라.”

“지, 진짜 내리려고? 일단 진정부터 하시고.”

“웅태야.”

“마, 말씀하십쇼.”

주륵.

“나 말이다.”

하얀 수트 위, 한줄기 똥물을 뒤집어쓴 맹주의 입에서.

“············저 새끼들 얼굴 좀 꼭 봐야겠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쌍시옷 소리가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