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행정본부 지하별관.
연무대의 단상 위에 걸터앉은 백검단장 박웅태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번에도 멀쩡한 놈은 없군.”
“항상 그렇죠.”
“하나는···.”
쫙-! 쫙-!
호랑나비처럼 비틀거리는 서정우.
연달아 터진 따귀에 정신 못 차리고 뒷걸음질 치는 그를 향해, 박웅태의 손가락이 겨눠진다.
“···온실 속 화초.”
실전에서 포권지례 후 사문 밝히다 쳐맞는 놈.
의외로 꽤 있는 스타일이다.
평생 멋과 예법을 중요시하는 무림맹 주관 비무만 해 오던 자는, 그 습관을 버리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리고.”
박웅태의 손가락이 옮겨간다.
“또 하나는, 흙탕물 속 잡초.”
포권지례하는 틈에 따귀를 갈기는 놈.
그야말로 뒷골목 스타일이다.
실전처럼 하라곤 했지만, 다른 본부에서 저딴 식으로 비무를 했다간 무도(武道) 따윈 없는 시정잡배라고 소문이 퍼질 것이다.
“쟤가 백창규?”
“예.”
“격식 갖춘 비무를 해본 적이 없네.”
“그래도, 영점은 잘 맞춰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아.”
부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박웅태.
그가 백창규를 바라본다.
선빵으로 칼 대신 따귀를 택한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살기(殺氣)를 피웠다면 분명 서정우 쪽에서 반응했겠지.’
그뿐인가.
첫 따귀는, 분명 포권지례를 취하는 척 날렸다.
시정잡배가 강자를 상대할 때나 쓰는 꼼수가 몸에 본능적으로 배어 있다는 얘기다.
‘더럽지만, 효율적이야.’
덕분에 기세를 잡지 않았나.
쫙-! 쫙-!
첫 방 이후로 연거푸 공력 실린 따귀를 서정우에게 적중시키는 백창규. 칼은 쓰지도 않았건만, 동공에 지진이 난 채 콩벌레처럼 상체를 만 서정우.
“당황했네.”
“당황했죠.”
박웅태와 부단장이 마주 보며 씩 웃는다.
“도련님 비무가 원래 저런 데 약해.”
“패닉은 사문 소개 끊겼을 때부터 왔을 겁니다.”
“싸대기, 아직도 갈기네.”
“서정우 지원자는 모욕에 약한 스타일입니다. 아직까진 때리면 때릴수록 백창규 지원자에게 이익이죠.”
“백창규 쟤가 그런 거 계산하는 스타일 같냐?”
“그건 단언할 수 없습니다만···.”
부단장이 안경을 살짝 올리며 중얼거린다.
“···본능만으로 택한 결정은 아닌 것 같군요. 아까부터 따귀 때리는 손 반대 손으로, 칼자루 쥔 서정우 지원자의 팔꿈치를 계속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흥분한 듯 하면서도 머리는 팽팽 돌아간다라.”
“초근접 박투술에 익숙합니다.”
“한번 박은 이빨은 뽕 뽑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고.”
“생사결 경험도 있는 것 같고요.”
“완전 잡초네.”
“잡초죠.”
백창규의 스타일을 분석하던 둘.
쫙-! 쫙-! 쫙-!
빠르게 퇴보(退步)를 밟는 서정우를 묘한 보법으로 따라가며 집요하게 따귀를 날리는 창규를 바라보며, 그들이 슬슬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잡초 대 화초라.”
아직 발검(拔劍)조차 하지 못한 서정우. 뒤늦게 내기를 둘렀지만 이미 호빵처럼 부어터진 볼때기. 상황은 누가 봐도 초반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백창규에게 유리해 보였지만.
“보통 온실 속 화초가 약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럴 리가 없죠.”
“그래.”
고개를 끄덕인 박웅태.
그가, 시종일관 백창규에게 처맞고 있는 지원자를 향해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영양분 듬뿍 받고, 광합성 충분히 해가면서 컨디션 케어 받고 오랜 세월 동안 반복 숙달한 자세. 이거, 무시 못하는 거거든.”
“네. 무엇보다.”
서정우.
아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온몸으로 암시를 준 저 얼간이는, 보이는 것과 다르게.
“···창염문 출신 아닙니까.”
한칼 있는 놈이었으니까.
* * *
‘이놈·········?’
아까부터 느낌이 오긴 했다.
‘············병신이다!’
손맛이 찰지다.
쩍-! 쩍-! 쩍-!
공력을 실어 연거푸 때리는 따귀에 해파리처럼 출렁이는 장발. 문어처럼 허우적거리는 양팔, 거기에 시시각각으로 불안하게 바뀌는 전신의 기도까지.
- 너무 놀라진 마.
이렇게 야들야들한 세계였다니.
- 실전 흉내만 내던 정파 무인이 길거리 낭인한테 당하는 거, 우리 때도 종종 있던 일이니까.
그토록 동경했던 무림맹 ‘정식 비무’가, 고작 기습 싸대기로 시작한 연타에 어푸어푸 헤엄치다가 끝난다고?
아직까진, 틈만 보이면 등 뒤에서 나이프를 꽂아 넣으려 하던 태백시의 조폭들이 차라리 더 위협적이다.
- 얘는 특히 멘탈이 약하네.
대기실에서부터 대충 파악은 했다.
서정우.
센 척, 특별한 척, 남과 다른 척.
보통 이런 놈들은 쪽팔리는 것보다 죽는 걸 택할 정도로 남의 이목과 소문을 신경 쓰기에, 모욕적인 따귀 연타만으로도 생각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도 말이 안 되는데.’
쩍-! 쩍-!
찰진 따귀 아래서 새어 나오는 서정우의 신음이 추임새처럼 들릴 무렵.
‘이놈, 1급 무인증은 어떻게 땄지?’
-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반연문 애들은 독공(毒功) 특화라 내성 생긴 다음엔 상대하기 쉬워졌다 해도, 얘는 다르잖아.
창규는 보았다.
연무대 바닥에 흩날리는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
또한, 느꼈다.
문득 서정우의 기세가 바뀐 것을.
뒷걸음치던 발이 멈춘 동시에, 전신에 흩어졌던 기도가 일순 한 자리로 모인다. 파도처럼 요란하게 출렁이던 파동이 스위치를 누른 듯 툭 꺼져 버린 그때.
“으.”
집요하게 팔꿈치를 막던 창규의 손 때문에 여태 칼집에서 칼도 못 뺀 녀석. 따라오는 손을 내공 담은 팔꿈치로 툭 밀자 생긴 약간의 틈.
2㎝? 1㎝?
그 틈을 다시 메우려던 창규는 문득 직감했다.
‘············따라가면 안 돼.’
위험하다,
는 걸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으아!”
서정우가 발검한 순간.
눈앞에서 하얀 벼락이 깜빡하며.
[Zone 모드를 실행합니다.]
창규의 시계바늘이 느려졌다.
* * *
“나왔네.”
쾌검격(快劍格).
창염문의 장기를 본 박웅태가 씩 웃음을 지었다.
“3대 문파 비전절기를 오늘 보나?”
“좀 늦게 나오네요, 근데.”
“그거야 어쩔 수 없지.”
하얀 아지랑이 같은 흔적을 허공에 남긴 서정우의 검. 저건, 근접전에서는 총알보다 빠르다는 창염문의 쾌검이다. 전신에 끌어모은 진기를 순간적으로 폭발시키며 적을 베는.
“서정우 지원자, 아직 1급밖에 안 되지 않았습니까. 저 수준에서 쾌검을 난무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요.”
괜히 포권지례하고 자기소개한 게 아니다.
땅에 발을 박고, 꿈틀대는 진기를 정렬시킨 뒤, 근육을 쥐어짜며 내공이 폭발하는 길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예법도 예법이지만, 애초에 서정우가 포권지례하며 사문을 밝힌 건 그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는 얘기다.
“얍삽한 짓 하는 것도 딱 3대 문파스럽구만.”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부단장이 담담하게 읊조리고.
“그래. 근육 발달 정도도 그렇고, 전신 기운도 잘 정련되어 있어.”
“본인 말과는 달리 노력파네요.”
“강호에서 말만큼 못 믿을 건 없지.”
피식 웃는 박웅태.
이미 그는, 대기실 밖에서 백창규와 서정우 사이에 일어났던 대화를 모두 들었다. 일부러 둘을 가까이 붙여 그 사이의 화학작용을 본 건, 그가 언젠가부터 서류를 믿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서정우 저 친구는 대충 느낌이 와.”
지원자를 비무로 판단한 건 꽤 오랜 일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신분 검사를 하고, 면접을 보고, 출신 문파의 계보를 추적한다 해도, 작정하고 숨어들어오는 놈은 거르기 힘들다. 감쪽같은 신분증, 무림맹 전산 해킹, 심지어 인피면구까지 준비해 오는 놈들을, 그깟 종이쪼가리로 어떻게 찾아 낸단 말인가.
“저런 건 속일 수가 없거든.”
“절대 못 숨기죠.”
하지만 상승 고수가 내려다보는 기도는 다르다.
실전 비무는, 일종의 보고서다.
그자의 ‘진짜’ 걸음걸이, 습관, 말투, 눈빛, 행동은 어떤 것인지. 불처럼 끓는 자인지, 폭풍처럼 몰아치는 자인지, 차돌처럼 단단한 자인지, 물처럼 변화무쌍한 자인지.
손에 칼만 쥐여 보면 다 알 수 있다.
저기서 쾌검을 뿌리는 ‘서정우’와, 이를 간신히 피하고 있는 ‘백창규’의 정체를 알기 위한 1차 거름막으로, 실전 비무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데 의외군요.”
“뭐가.”
“백창규 지원자 말입니다, 잡초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창염문의 쾌검을 잘 피해내고 있잖습니까.”
“아직 판단하긴 이르지.”
박웅태가 안력을 돋웠다.
일반인이라면 ‘희끄무레한 뭔가’가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빠른 서정우의 쾌검격들. 백창규는, 이걸 전부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있다.
“쟤 저렇게 피하기만 해서는 결국 당할텐데.”
“하긴, 1급이면 아직 공식을 따라갈 때니까요.”
신(新) 무림에서의 상성 공식.
공인 무인증을 ‘측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무림인들 간의 상성은 어느 정도 정해진 지 오래다.
「기세만으로 압도하는 중검(重劍)」
「박자를 한계까지 쪼개는 쾌검(快劍)」
「사이하거나 변화무쌍한 변검(變劍)」
“두 지원자가 같은 수준이라면, 백창규 지원자의 검이 어떤 스타일인지가 중요하겠지만···.”
쾌검은 중검을 잡고.
변검은 쾌검을 잡고.
중검은 변검을 잡는 식.
1급 무림인끼리의 비무는 보통 이 공식을 따른다.
그 위로 갈수록 디테일한 초식 간의 상성이나 내공, 그리고 기세에 더해, 아직 신 무림이 파악하지 못한 구 무림의 무공을 익힌 괴짜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건 아직 저들끼리의 싸움에서 논할 것이 아니니까.
“···상대는 창염문 출신 쾌검수입니다. 백창규 지원자가 변검을 쓰더라도, 빙공(氷功)을 쓰지 않고서야 힘들겠군요. 쾌검이나 중검을 쓴다면 승부는 뻔하고요.”
다만 운이 나빴다.
상대는, 쾌검에 한해서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를 자부하는 창염문의 제자 출신. 처음에 기세를 잡았을 때, 어거지로 어떻게든 끝냈어야 했다.
“아.”
콰직!
뒷걸음치는 창규의 양발 사이 서정우가 진각을 밟았을 때.
“나왔군요.”
부단장이 안경을 고쳐 썼다.
서정우가 밀어 넣은 어깨가 고속으로 돌아가며, 창염문의 비전절기가 허공에 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백염화(白焰花)까지 나왔어.”
“비무, 중지시킬까요?”
“잠깐만.”
3연격, 5연격, 7연격.
조명 비친 검날의 잔상이 쪼개진다.
허공에 하얀 섬광이 죽죽 그어진다.
“저거,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백창규 지원자가 위험합니다.”
“있어 봐.”
콰지직!
서정우가 깊게 박은 앞발이 점점 바닥 밑으로 내려간다. 속도에 불이 붙고, 연이은 하얀 섬광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쐑쐑 허공을 가르던 소리마저 부서지듯 버스럭거린다.
“백창규 지원자, 지금 전혀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 백염화가 전부 피어나면···.”
“공식대로면, 죽겠지.”
“그러니까 지금···.”
“둘이 같은 수준이라면.”
“예?”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 박웅태.
“쟤, 백창규라고 했지?”
이미, 허공에 피어났다.
백염화(白焰花).
초고속으로 그어지는 쾌검이 허공에 새긴 하얀 섬광. 그 섬광이 쌓이고 쌓여 피워낸 일렁이는 백색의 불길.
콰콰콰콰-!
그 공간에서 한번 불이 붙으면, 동급 무인은 절대 피하지 못한다는 거대한 하얀 불꽃을.
쾌검으로 먹고사는 3대 문파의 동급 최강 비전절기를.
“이거.”
백창규 저놈.
“···재밌는 새끼가 둘이나 들어왔네.”
실실 쪼개면서 다 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