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무림 견문록-29화 (29/150)

29화.

콰콰콰-!

전장을 휩쓰는 강풍 한 자락.

피비린내와 역한 시체 냄새가 코를 쑤시는 가운데.

‘하루? 이틀?’

문득, 창규는 생각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투욱!

슬로우비디오처럼 뒤집히는 혈강시 시체.

Zone 모드는 아직도 작동 중이다.

- 아직 1시간도 안 지났다, 임마.

그런가.

천천히 전장 한복판으로 향하는 창규.

감각이 포착하는 압도적인 정보들 때문에 발걸음 한번 옮길 때마다, 손 한번 휘두를 때마다 몇 시간은 흐르는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아직, 아직이다.’

쩍 갈라진 땅 위로 솟는 마취독 안개를 피하며. 따라오던 혈강시들이 쥐포처럼 짜부라지는 중력진을 피하며. 난데없이 허공의 신기루에서 튀어나와 우수수 떨어지는 1급 무림인들을 피하며.

이제, 느껴지니까.

- 슬슬 Zone 모드 해제하는 게 좋지 않겠냐?

전장 정중앙.

이를 감싼 거대한 혈막(血膜).

저기서, ‘진짜’들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 계속 굼뜨게 행동하니까 나도 답답해 죽겠다고!

빠직! 빠직! 빠지직!

창규의 피부세포 하나하나를 찔러댄다.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살기와 살의를 품은 정보들이, 소나기처럼 그를 두드린다.

‘반연문의 진짜 거물들이 나섰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5명의 고수들.

그들은, 창규가 여기서 진백현을 끝장내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환영진을 피운 전당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 그때, 분명히 저들이 가진 압도적인 내공 수치들을 보았으니까.

- 요새 내 눈 썩고 있는 거 알지? 근래에 ‘그나마’ 싸움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데가 저 안인데, 네가 느려 터지게 가니까 나까지 못 보고 있잖아!

사방에 들끓는 진법의 기운들을 여태처럼 잘 다스리면, 충분히 저들을 이용하여 진백현을 죽일 수 있다.

- 아직, 반연문 애들이 불리하긴 해.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저기 봐봐. 혈교 애들이 나한테나 따까리 취급받는 거지, 아무나 동네 똥강아지처럼 다룰 수 있는 애들이 아니거든.

콰콰콰콰-!

중앙에서 회오리치는 혈막(血膜).

검붉은 피와 불로 활활 타오르는 저 봉인진은, 당연히 진백현이 피운 진이다.

‘방해받지 않고 반연문 고수들과 싸우기 위한 공간.’

전장의 모든 진이 반연문에 유리하게 강화되고 변형되자, 아예 그 모든 걸 차단하기 위한 수를 쓴 것. 주변 혈강시들과 무림인들은 접근은커녕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지도 못할 혈교의 봉인진.

물론, 창규는 예외다.

저 진의 생문과 사문뿐 아니라, 천통경 조각을 통해 저 안에서 일어나는 생사결의 양상을 모조리 볼 수 있으니까.

- 알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진짜 무대를 통제해야 할 시점이 온 지금.

천마가 재촉하기 시작한다.

- 슬슬 잡졸들 다 치울 때 됐잖아?

맞는 말이다.

혈막 근처에서 흙먼지와 핏방울을 튀기며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혈강시와 1급 무인들. 활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사용해 혈막 내부의 본게임을 통제해야 할 지금, 저들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 빨리 다 쓸고 시작하자. 어차피 여기 있는 놈들 중에 사람 한 놈 안 죽여 본 새끼 없고, 이 정도 규모로 칼 들고 왔다는 건 다들 지 목숨 입장료로 내고 왔다는 얘기야.

알고 있다.

당장 방금도 1급 무림인 몇이, ‘대열에서 이탈해 수상쩍은 행동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창규에게 칼을 찔러 왔다. 뭐, 결국 진법과 파천검법을 이용해 잡긴 했지만.

- 아직 파천검법이라고 하긴 좀 민망하지. 이런 식으로 쟤들 언제 하나하나 조질 거야?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선 천마와 의견이 달랐다.

- 뭐든 5성, 그러니까 최소 5레벨은 넘어야 무공 앞에 이름 붙일 맛 나는 건데.

아니, 솔직히 창규는 본격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천마가 점점 수상해졌다.

- 그러니까 빨리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너 지금 수준으론 안 돼.

천마의 입에 걸린 음흉한 미소.

아까 그가 보여 준 ‘계약서’를 읽은 창규는, 이미 저 미소에 담긴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다.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

완벽한 독소조항들.

말도 안 되는 조약들.

혹해서 계약했다가 여차하면 영원히 몸을 빼앗길 수도 있는 저 계약서는, 천마가 말한 ‘선물’ 따위가 아닌 ‘주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 대가리 너무 굴리지 마. 원래 확 빠지지 않으면 모르는 게 있다니까?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이미, 창규는 전신을 팽팽하게 만드는 이 목숨 건 고양감에 반해 버린 지 오래였고.

‘이 즐거움을 뺏길 수 없지.’

무엇보다,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 너 대가리에서 타는 소리 들린다. 이제 슬슬 한계일 거 아냐? 그냥 서명···.

떠벌거리던 천마의 입이 천천히 다물어진다.

천천히 혈막을 향해 발을 내딛는 창규.

- 뭐야.

그 주변으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저거 다 언제 계산했냐?

‘3.’

정중앙의 혈막을 둘러싼.

‘2.’

아니, 여태 창규가 지나온 전장의 모든 진법들이.

‘1.’

콰콰콰콰콰-!

새끼줄처럼 모조리 엮여 뒤틀리는 모습이.

‘·········0.’

* * *

성질이 다른 진들이 모조리 연결된다.

중력을 거스르는, 늪지대가 펼쳐지는 진, 감각을 착각하게 만드는 진, 독 소나기가 내리는 진, 환영이 펼쳐지는 진, 내공이 빠져나가는 진, 강풍이 쏟아지는 진···.

“흐아아아아아아!”

“내 눈! 내누우운!”

아귀도(餓鬼道).

각기 다른 성질들이 모이자, 공간이 에러 난 것처럼 뒤틀린다.

칼 밭에 전신을 꼬라박는 혈강시들과, 감각과 환각에 오염된 무인들이 엉겨 붙어 미친 칼춤을 춘다. 끈적이며 질척이는 독과 피, 소름 돋는 비명과 고함이 전장에 울려 퍼진다.

모두가 자멸한다.

중앙을 제외한 곳곳에, 말 그대로 생지옥이 강림한 이때.

“·········.”

“·········.”

오직 이곳만이 고요한 정적으로 가득하다.

규칙적인 숨소리.

살짝씩 스치는 옷깃.

피웅덩이에 이는 파문.

시끄러운 밖의 아귀도와 달리, 새벽 도서관만큼이나 고요한 이 혈막 안에서.

촥!

진백현이 칼에 묻은 피를 털 때쯤.

털썩!

쓰러지는 친위대 고수 하나.

“그래도 꽤 버텼네.”

비릿한 미소를 짓는 진백현.

“그나저나, 네가 대장이지? 감상 좀 말해 봐.”

“······.”

그 앞에 대치한 반동식과 세 명의 친위대.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왜, 진법 버프 받으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어? 대가리 싸움하면 해 볼 만할 줄 알았냐고.”

몰랐다.

전장 모든 진이 반연문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상황. 모든 술법진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하지만, ‘주변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진법을 진백현이 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너희 패착이야.”

이렇게 셀 줄도 몰랐다.

탐색전에서 벌써 친위대 하나가 죽었다.

“난 니들 전력을 다 파악했는데, 너흰 내가 누군지 아직도 전혀 파악하지 못했잖아.”

“그, 새끼. 말 존나 많네.”

“오, 아직 포기 안했나 봐?”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여기부턴 고수의 영역.

약간의 변수가 발생할 때마다 싸움의 흐름이 폭발적으로 바뀌는 영역이란 말이다.

“포기는 씨발, 너야말로 손가락은 괜찮냐?”

“아, 이거?”

“우리 반연문이야. 허세도 상대 봐 가며 부려.”

“야.”

첫 충돌에서 손을 다친 진백현.

화악-!

문득, 그의 등 뒤에서 검붉은 핏기가 회오리친 순간.

“그럼, 난 누굴 거 같냐?”

“몰라 씨발아.”

슥-!

칼자루 쥔 손에 힘을 주며 슬쩍 눈짓하는 반동식.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합공(合攻) 준비.

친위대들이, 그 신호를 포착한다.

“음······.”

반동식의 이마에서 내린 땀이.

볼을 지나 턱에 맺혀.

방울져 떨어지고.

옥!

피 웅덩이에 떨어진 핏방울이.

왕관 모양의 흔적으로 튈 무렵.

“아마, 알아야 할···.”

“흐읍-!”

진초록빛 독뢰(毒雷)가 터짐과 동시에.

까━━━━앙!

2차 격돌이 시작됐다.

* * *

‘···탐(貪)하는 검이다.’

털썩! 털썩! 털썩!

좌우에서 쓰러지는 1급 무인과 혈강시들 가운데, 혈막 너머의 싸움을 관찰하는 백창규.

‘진백현.’

이 도피 생활의 원흉이 된 놈.

놈의 검은 탐욕적이다.

갈망, 열망, 집착.

휘두르고, 베고, 찌르는 모든 동작에 검붉은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반연문.’

그에 반해, 저들의 초식은 차라리 솔직하다.

살기, 살의, 살심.

전후좌우 사방을 번쩍이는 저 독공(毒功)은, 언뜻 사이해 보이긴 해도 상대를 죽인다는 단순한 의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쯧쯧.

모래 태풍 같은 황량한 살기.

오른 어깨, 팔꿈치, 갈비뼈 아래.

반연문의 진초록빛 삭풍이 번쩍이는 곳마다, 진백현의 피부 곳곳이 터져나가고 깎여나가지만.

- 저 새끼들, 치명상은 하나도 못 내고 있잖아.

결국 유리한 건 진백현이다.

콰콰콰콰-!

빙글빙글 돌며 신법을 펼친 그는, 이미 반연문의 모래바람 정도는 가볍게 삼킬 정도의 해일을 완성했으니까.

번쩍!

번쩍!

번쩍!

혈막 곳곳에서 충돌하는 쇳소리.

여기까지 날아오는 탄내.

상처 따윈 신경도 안 쓴다.

메마른 논밭이 물을 탐하는 것처럼, 죽어가는 육신이 피를 탐하는 것처럼, 진백현은 이 공간 모두의 ‘목숨’만을 탐한다.

- 어유, 벌써 한 놈 뒤졌네.

쿨-럭!

심장에 꽂힌 검에 절명한 고수 하나.

3 대 1의 싸움을 만든 대신 진백현의 몸 곳곳의 크고 작은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사실 그에겐 이런 상처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꿀럭꿀럭꿀럭!

일순, 꽂아 넣은 검을 타고 피의 홍수. 죽은 고수의 몸이 바싹 마름과 동시에, 진백현은 취한 피를 통해 문신에 새겼던 검붉은 야차 형상을 머리 위로 띄운다.

- 너, 여태 저런 거 본 적 있냐? 뒤져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스타일이야.

콰콰콰-!

피를 뒤집어쓸수록 강해지는 진백현.

갈비뼈가 부러지고, 등 곳곳이 터졌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다.

- 강호에는 저런 새끼처럼 맨정신으로는 이해 안 되는 새끼가 수두룩하다고. 그런데도 진짜 계약 안 할 거야?

아니, 창규는 이해할 수 있다.

얼핏 보면 괴이한 사술 같지만, 저건 진백현이 몸 자체에 그려놓은 술법진 때문. 주변의 봉인진에 더해, 저자는 이미 주변의 자연지기를 이용할 수 있는 소형 술법진을 문신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그게 놈이 피가 많을수록 강해지는 이유. 하지만, 그만큼 부상 회복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에 싸움이 끝날 때는 지금보다 훨씬 약해져 있을 것이다.’

파악은 끝냈다.

- 하, 너는,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 머리가 문제다. 이 무림을, 자꾸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서 어떻게 하냐.

아니, 오히려 이제야 알 것 같다.

‘···혈막.’

저건 자연지기와 내공을 섞어 만든 소형진.

차라리 내공 담은 목검이 총알보다 빨리 지나갈 수 있는 저 공간은, 단전이 담은 기운을 자연지기의 원리를 이용해 확장한 것뿐이다.

‘···무공.’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는 저 검격들.

이 느린 세상에서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밟는 보법과 신법들. 저건 결국, 사람이 사람을 베기 위해 만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Zone 모드.’

이 모든 정보가 홍수처럼 들어오는 지금의 상태.

이 역시, 이해 못 할 게 아니다.

시속 200㎞으로 달리던 레이서가 서킷 위에 떨어진 돌조각을 인체 한계 이상의 속도로 피하거나, 극한까지 단련한 격투기선수가 시합에서 상대의 주먹이 일순 느려지는 경험을 하는 것, 이미 무림의 실종기 때에도 일어났던 일들이다.

뇌의 오버클락.

이 모든 건, 극한까지 예민해진 신체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포착 가능한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 좀 오만하네.

물론, 그들이 접한 경지의 수준이 창규의 그것과 얼마나 겹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 근데,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다야.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후우, 후우, 후우,’

빠직, 빠직!

뇌의 신경회로가 과열될 정도로.

빠지직!

정보를 전달하는 시냅스가 지칠 정도로.

- 여태 내가 들어갔던 놈들 중에.

창규처럼 오랫동안, 그리고 처절하게 이 경지를 이어나간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 너만큼 이거 써먹은 새끼, 한 명도 없었거든.

빠직! 빠직!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것만 같은 느낌.

치이이익-!

체감상 일주일이 더 지난 듯한 느낌.

‘더, 더, 더, 더, 더···.’

멈춘 듯 다가오는 이 모든 세계(世界)의 정보를 잠시도 쉬지 않고 받아들인 창규. 비천심법의 호흡으로 파악한 혈막의 정보를, 주변 전장의 정보를, 천통경에 비춰진 진백현과 반연문 고수들 사이의 정보를, 모두 파악한 지금.

‘지금.’

이제.

시간이 됐다.

‘············개문(開門)!’

저 혈막 안의 모든 내공을 잡아먹을 시간이.

* * *

스━━━걱!

등이 쩍 벌어진 채 허공에 치솟은 친위대.

그러면서도 땅 아래로 진초록빛 독무(毒霧)를 피우려는 그를 향해.

“오.”

진백현이 검에 묻은 피를 뿌리자.

촥-!

허공에 죽죽 그려진 혈뢰(血雷).

그 위로 빠르게 혈신보(血神步)를 밟은 진백현의 손에, 어느새 친위대의 발목이 잡혔다.

일순 피가 꿈틀거린 진백현의 손아귀.

“그런 추잡한 걸 쓰면 안 되지.”

“···컥!”

심장에 칼을 박아 숨을 끊은 뒤.

그대로 휘두르자 수직 낙하하는 친위대 고수.

쐐-액!

이를 본 반동식이 신호한다.

“11시 쪽.”

“존명.”

고개를 끄덕인 나머지 고수와 함께,

파팟!

파파팟!

하늘로 경공을 펼치는 반동식.

상대는 아직 허공에 뜬 상태.

지금이 기회다.

“엇박으로 치고 간다.”

“존명.”

“대답만 하지 말고 똑바로 해 새끼야. 이번에 못 끝내면 우리 다 뒤지니까.”

“···예.”

분명 놈도 멀쩡하지 않다.

갈비뼈 넉 대가 나가고, 왼 어깨가 박살 났으며, 쩍 갈라진 옆구리에선 희끗한 뼈를 본 것도 같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쪽은 오히려 이쪽이다.

‘씨발, 씨발, 씨발!’

남은 건 겨우 둘.

반동식과 친위대 한 놈만이 살아 있다.

겪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다칠수록 강해진다고?’

상처만 보면 다 죽어가는 새끼의 몸에 점점 검붉은 환영이 입혀지더니, 그야말로 자신들을 ‘유린’하고 있지 않은가.

‘쫄지 마, 마지막 발악이다.’

슈우우-!

허공에서 떨어지는 진백현.

놈을 향해 각각 다른 방향에서 합공을 시작한 반동식과 친위대의 입에, 곧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각이, 나왔다.

이 방향대로 검을 뻗으면 녀석 목에 닿는다.

“거봐, 씨발! 여기선 피할 데가···.”

“어이쿠.”

-고 생각한 순간!

“밑에 잘 보고 다녀야지.”

“···?!”

허공에, 반동식과 친위대의 몸이 멈췄다.

발목에 감긴 단단한 무언가.

‘···············피?’

저 아래, 바닥의 피웅덩이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핏줄기가 그들의 발목을 밧줄처럼 감아버린 것이다. 일순 눈을 크게 뜬 둘을 향해, 진백현이 입을 찢는다.

“왜 궁금한 표정이야? 아까는 이런 걸 못 봐서?”

“어, 어, 어···?!”

“병신들아. 너희 때문에 강해진 걸 계산에 넣었어야지.”

고수들의 싸움은, 작은 변수가 상황을 바꾼다.

벌써 반연문 고수들 셋의 피를 취한 진백현이 통제할 수 있는 건, 이제 ‘작은 변수’ 따위가 아니었다.

“이제 여긴, 내 영역이야.”

그는 이제, 이 혈막 안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

전신은 엉망이 됐지만,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얘기다.

“그럼.”

싱글벙글한 진백현.

어느새 등에 했던 문신과 꼭 같은 검붉은 야차가, 그의 얼굴에 그대로 씌워진 그때.

“너희 피는 뭔 맛일지···.”

“이, 이런 씨발!”

쩌적, 쩌저적!

그의 혈막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어?!”

전장에 그득하던 진들의 기운이,

혈막을 부수고 해일처럼 쏟아진다.

콰콰콰콰콰-!

* * *

진백현과 반연문 두 고수가 얽힌 채 떨어진다.

‘낙하지점, 앞으로 4m.’

거리, 오케이.

‘서로의 배에 칼이 박혔다. 세 발짝 앞부터 내공 터뜨리면, 심장 쪽으로 바로 직행.’

각도, 오케이.

‘방금, 중력진이랑 연결된 독진이 태풍을 만들었다.’

흐름, 오케이.

- 뭐, 좋아. 근데 이거 하난 조심해라. 저 새끼 뒤지기 직전에 네 얼굴 보이면 안 돼. 복면 다 열지 말라고.

준비는 끝났다.

- 혈교 애들은, 몸에 새긴 술법진으로 감각도 공유하니까. 저 새끼, 뒤지기 직전에 다른 혈교 제사장한테 네 얼굴 알릴 수도 있단 얘기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이제 다 끝이다.

- 살짝 불안불안하긴 한데, 뒤지지는 마라.

콰드드득!

천천히 근육을 조인다.

팽팽하게 내공을 운용한다.

- 너 같은 또라이 새끼는 진짜 오랜만에 보니까.

동감이다.

솔직히, 천천히 입꼬리가 벌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창규는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시체 청소를 하며 살던 창규의 원래 스타일대로라면, 진작 어딘가로 도망쳤을 것이다. 밀항선을 타고 러시아로 가건, 아프리카 오지로 가건, 저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을 피해서 1년이고 2년이고 실력을 쌓은 뒤 다시 왔을 거라고.

‘애초에, 저 괴물이 지척인데 영약이나 털어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내 스타일은 아냐.’

숨고, 숨고, 숨고, 숨었을 것이다.

그렇게, 평생 살았을 것이다.

언젠가 준비가 다 끝나면 무림인 자격증 시험을 봐야지, 라고 생각했던 시체 청소부 시절처럼.

‘근데···.’

사실, 한 번만 도전해 봤으면 될 일이다.

재능 탓을 하고, 세상 모든 검법을 분석한 후에야 도전하겠다는 개소리 할 시간에, 동네 도장에서 삼재검법이라도 익힌 후, 한 번이라도 시험을 쳐 봤으면 후련했을 일이다.

‘···내 스타일이 뭐지?’

그의 분석력은, 타오르던 열정의 열매다.

그의 인내심은, 끊지 못한 미련의 열매다.

‘하니까 되는데···.’

그는 무림인의 자질이 있다.

머리는 총명했고 배짱은 담대했다. 창규는, 무(武)를 담아내기 충분한 그릇이었다. 자신이 가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도전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이, 문득 억울해졌다.

‘왜 진작 시도를 안 했었지?’

콰아아악!

앞으로 몸을 숙이며 내공을 돌리는 창규.

방금까지 스릴과 짜릿함, 그리고 무(武)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그는, 이제 다른 것을 느낀다.

콰- 콰- 콰- 콰-

멀리서 천천히 떨어지는 진백현과 고수 둘을 바라보며, 여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낀다.

- 왜, 막상 마주하려니까 뒤질까 봐 겁나?

아니다.

애초에 시체청소부에게 죽음은 익숙하다.

가족 없고, 친구 없고, 대학도 못 나오고, 직장도 변변찮고, 모아놓은 돈도 없는 그는, 매일같이 보는 시체들과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다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 아니면 복수하고 싶어 몸이 덜덜 떨려?

아니다.

죽일 놈이긴 해도, 이건 인정한다.

저자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하긴 했지만, 덕분에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지 않았나.

‘천마 없이도, 이제 난 자격이 있다.’

자신도 무림인의 자질이 있다.

이런 생각을 품게 해 줬다.

여태 살아온 게,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 여태 생존한 이유가, 단순히 천마라는 존재 하나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천마 없이도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 오.

그래.

창규는 결심했다.

‘후우우우우.’

저 너머에서 칡덩굴처럼 얽혀 서로를 죽여대는 저 괴물들에게도 아닌, 재밌는 구경거리를 달라고 자신을 재촉해대는 천마에게도 아닌, 백창규 자기 자신에게.

‘간다.’

파파파팟!

창규는, 스스로에게 증명할 것이다.

천마군림보건, 비천심법이건, 파천검법이건, 무량불침이건, ‘슈팅’이건, ‘Zone’ 모드건. 여태 배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를 응용하는 것만큼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걸.

[1,150 / 1,200]

반드시, 증명해낸다.

‘천마 아닌 백창규’의 가치를.

‘슈팅.’

[-100]

일순, 부서지는 혈막 안으로,

섬광이 꽂힌다.

‘···············10배속.’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쾅━━━━━━━━━━━━━━!

태양처럼 눈부신 섬광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