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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림 견문록-27화 (27/150)

27화.

산자락을 덮은 붉은 피 안개.

특유의 쇠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 다행이네. 전음(傳音) 못 받으면 싹 다 죽일 뻔했거든.

진백현이 산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 미친 새끼. 넌, 내가 이빨 다 뽑아서 우리 회사에서 키우는 개새끼로 만들어 줄게.

- 나랑 해 보게? 대화 먼저 하지?

- 대화? 남의 애들 씹창 내놓고 대화?

- 사람 찾는 거 협조하는 게 이렇게 힘드나.

- 협조? 사진이나, 이름, 최소한의 정보라도 알려 주고 협조 운운해야지, 너 혼자 영업장 찢고 다니는 거 허락해 달라는 게 협조야?

- 걔 사진 보면 너 죽어야 돼.

- 그럼, 영문도 모르고 우리 집 안방에서 개지랄나는 거 병신마냥 지켜보라고?

- 어.

- 야.

- 너, 형이랑 다르게 이해가 빠르구나?

- 씨발, 기대해라.

쐐-액!

일순 피 안개를 뚫고 날아오는 SUV.

하지만 진백현이 가볍게 칼을 휘두르자, 깔끔하게 두 동강 나 피웅덩이로 떨어진다.

- 좋은 냄새 나네? 독 새로 담아 왔어?

- 제발 곱게 죽여 달라고 빌게 해 줄게, 나한테.

- 너네.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진백현.

저 멀리, 팔방에서 느껴진다.

- 설마, 지금 진법 믿고 이러는 거야? 나랑 대가리 싸움 하자고?

산을 둘러싸기 시작하는 기물(奇物)들.

죽죽 붓는 콘크리트와, 커다란 철 공을 포함한, 각종 건설자재들이 설치되고 있다. 사자후를 터뜨려도 영향이 없는 걸로 보아, 차량 주변에도 방음벽을 세워놓은 것 같은데.

- 뭐, 좋아.

혈교 제사장인 그는, 우스울 뿐이었다.

멀리 언덕 위로 올라가는 방진과, 흔들리는 수풀과, 쿵쿵 부서지는 바위의 위치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지귀멸충진(地鬼滅蟲陣).

지옥어망진(地獄漁網陣).

백사출수진(百蛇出水陳).

미몽천리진(美夢千理陳).

팔독환영진(八毒幻影陳).

환영을 피우는 진, 독 태풍을 일으키는 진, 환각에 빠져 감각을 혼동시키는 진, 독으로 지기(地氣)를 바꿔 궁지로 모는 진 등, 대부분이 사술진을 익히는 동안 숙지했던 진법들.

몇몇 진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뭐 상관없었다.

- 꽤 자신 있는 모양인데.

혈교(血敎)의 술은 피가 넘칠수록 강해진다.

일대일 비무보다 전쟁터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혈교 제사장에게 있어서, 피냄새가 진득하게 느껴지는 이 산은 자신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어디 한번···.

슈우우-!

산을 빙 둘러 피어나는 반연문의 환영들.

이를 본 진백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놀아 보자고.

딱-!

손을 튕기자 일어나는 혈강시(血僵尸)들.

2, 3급 무림인들을 재료로 만든 80여구의 생체병기들이, 피를 뚝뚝 흘리며 진백현의 명령을 기다린다. 반연문의 귀찮은 진법들을 싸그리 부숴 줄 놈들을 바라보며, 그가 입에 미소를 띤다.

‘차라리 잘 됐어.’

싸움터가 도심이 아닌 산이라 다행이다.

여기서 깔끔하게 저놈들만 쳐 죽이면, 태백시 안에서 백창규를 찾는 작업은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 아닌가.

‘·········백창규.’

놈을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온다.

녀석이 ‘진짜’ 그릇이었다면, 천마를 취한 뒤 이렇게까지 조용할 리는 없다. 내공도 없는 하류 인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도시에 이 정도로 아무런 족적도 내지 못하는 시시한 놈일 줄은 몰랐다.

놈은 절대 모를 것이다.

철벅, 철벅, 철벅.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명을 기다리는 혈강시들. 그러니까, 이제 완전히 자신의 지배하에 놓인 혈교의 꼭두각시들. 이것만 해도 반연문 놈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할진데.

‘천마는.’

놈 주위로 돌아다니는 천마의 힘만 있으면.

천하(天下)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네깟 버러지가 가질 게 아니다.’

자격도 안 되는 벌레 같은 게 이를 가지고 튀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인상을 구긴 진백현.

“뭐 해, 새끼들아.”

주위를 둘러본 그가, 혈무(血霧)에 덮인 혈강시들에게 짜증을 내는 순간.

“전부 죽여.”

파파파팟!

반연문 본대와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츠츳-!

환영진을 해체 중인 창규를 향해, 천마가 짜증을 내고 있다.

- 거, 말 겁나게 안 듣네! 서명하라니까!

“독소조항 있는 계약은 안 합니다.”

- 여기, 새끼야! 독소조항이 어딨니? 어?

바닥에 깔려 있던 독무(毒霧).

팔괘에 놓아둔 고철덩이들의 순서를 바꾸자 위로 솟구치는 독 안개. 맹렬한 기운으로 독이 용솟음치는 가운데, 환영진 바닥에 약간의 내공을 흘리면.

‘···파진(破陣).’

환영진이 해체되기 시작한다.

- 아오! 개짜증 나네!

푸슈-!

사방으로 터지는 독 안개.

회오리치는 밝은 햇빛.

그 사이에서.

- 강호를 걷겠다는 놈이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꽂혔냐?

“사소한 게 아니라.”

속셈이 드러났는지 씩씩거리는 천마를 바라보며, 창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놓고 속이려고 하는데, 못 알아채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 다들 좋다고 했다니까?

“에이, 뻥치지 마요.”

- 진짜라고!

방금 천마가 보여 준 계약서.

여기 담긴 건, 죄 사기조항뿐이었다.

- 워낙에 내가 주는 게 개쩔잖아!

“그만큼 가져가는 것도 많고요.”

막말로, 창규의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고 천마의 말처럼 이 ‘선물’이 실제로 대단하게 작동이 돼도, 솔직히 이 조항은 선을 넘은 게 아닌가.

[5-1. 동의할 시, 이에 대한 비용으로는 1갑자의 최대 내공치를 청구하며-]

‘영구히’ 소멸하는 1갑자의 내공.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어떻게 모은 내공인데, 이걸 홀랑 가져가겠다고?

‘마음대로 여기 데려와 놓고서 갑자기 겁줄 때부터 이상했지.’

환영으로 남은 천마.

여태 왜 자꾸 1갑자, 1갑자거렸는지 대충 이해가 갔다. 저 ‘계약’을 통해서,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다른 자의 내공을 취하는 모양인데.

“사람 잘못 봤습니다. 나 그런 호구 아니에요.”

- 아 글쎄 이 선배, 아니, 형 한번 믿어 보라니까?

이제는 안다.

아무리 이렇게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한 모습을 보여도, 이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죽음을 방관하려고 했던 자.

‘1갑자의 선물 같은 소리.’

창규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믿을 건 오직 나 자신뿐.

이 진리를 되새긴 그가, 전당포의 창문을 열어 상황을 체크한다.

‘좋아. 해체되면, 봉인진을 그리는 콘크리트 앞에 떨어지고.’

체크.

‘지기(地氣)가 맴도는 속도는, 딱 이 전당포 위치에서 세배로 뛰고.’

체크.

‘1급 무림인들은 대충 1분 정도 후에 산 정상으로 넘어가고.’

체크.

‘슬슬, 운전기사랑 2급 이하 무림인들만 이 후방에 남는···.’

지금!

타이밍을 포착한 창규.

그가 전당포 바닥 중앙에서 흘리던 내공에 부하를 준 순간!

“후-읍!”

품고 있던 독무(毒霧)가 바깥을 향해 해일처럼 일어남과 동시에.

퍼퍼퍼펑!

숨어 있던 전당포가 세상에 드러났다.

* * *

“뭐, 뭐야, 이거!”

“이게 갑자기 왜 튀어나와!”

“자, 잠깐 스탑!”

끼-익!

반연문의 기사가 트럭을 세웠다.

산 너머를 중심 삼아 다른 팀들과 함께 원 모양의 봉인진을 그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지만.

“뭐, 뭐야.”

지금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 실장님 동생 아냐?”

갑작스레 눈앞에 튀어나온 전당포와 함께, 방독면을 쓴 장 실장의 여동생이 문밖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후방 지원진 임무를 맡은 이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인다.

“아니, 전당포, 어? 뭐야, 지금 이게?”

“자, 잠깐만!”

“진짜 장 실장 동생이야?”

1차 격돌에서 죽은 자가 혈강시가 되는 걸 본 진 실장이, 일선 전투에선 아군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후방 지원을 명한 3급 무림인들.

그들 중 성큼성큼 나선 누군가가 장연재를 안아 든다.

“야, 너 뭐···.”

“보너스 내 거다.”

“뭐?”

그제야 그들의 표정에 불이 켜진다.

YG 전당포 사장, 장연재.

이번 전투 동안 발견해서 본부에 옮긴다면, 개인적인 포상금과 더불어 연봉 인상을 건의해 보겠다고 한 장 실장의 하나뿐인 여동생.

“야! 내려놔! 내가 먼저 봤다고!”

“꺼져. 먼저 데리고 가는 게 임자지.”

“나랑 같이 가! 어차피 여기 인원 넘치잖아!”

끼이-익!

진법을 그리기 위해 타이어를 끌던 산악용 오토바이 몇 대도 멈춰선다. 헬멧까지 벗은 그들 역시, 이 ‘보너스’ 경쟁에 참전한다.

“내놔. 여기서 내가 제일 세잖아.”

“같은 3급끼리 유세는.”

“됐고, 오토바이 제일 빨리 타는 놈이 데려가는 걸로 하자.”

그들은, 일종의 쭉정이였다.

전투 일선에 참가하기에는 혈강시가 될 위험이 있어 후방의 진법진 팀으로 돌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인원은 필요 없는. 심지어 경공도 떨어져서 대규모 진을 그릴 때 산악용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전투 도중, 여러분 중 제 동생을 발견해서 본부로 데려가는 분에게는 제 사비로 1억을 드리겠습니다.’

데려가기만 하면 1억이다.

또한, 전투에서 도망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반연문의 규칙도 장 실장이 커버쳐 줄 수 있다.

안전하게 꿀 빨 수 있는 기회라 이거다.

“내거라고!”

“내가 먼저 봤다고!”

“아 씨발, 그래서 니들이 나 이겨?”

그렇게 벌어진 짧은 논쟁.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해묵은 채무와 채권, 예전에 정해 놓은 서열, 그리고 친분관계를 바탕으로 한 정치질을 통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하여간 새끼들이.”

턱.

장연재를 데려갈 권리를 얻은 2급(진) 무림인은, 그녀를 어깨에 걸터매고 뒤를 돈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새끼들이··· 어?!”

저 비탈길 옆에 세워 놨던 오토바이를.

“야야야, 너, 너 누구야, 새끼야!”

방금, 누군가가 탈취해 갔다.

부아아아아-!

* * *

부아아아아-!

- 아까처럼 하늘에서 내려보는 효과는 가질 수 없을 거야.

덜컹, 덜컹, 덜컹.

산길을 오르는 창규를 향해, 천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처럼 ‘계약서’를 강요하는 건 포기했는지, 약간은 맥이 빠진 목소리.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천마의 기분이 아니었다.

- 그래도, 환영 뚫고 ‘진짜’ 풍경을 보는 덴 아무 문제 없어.

아까 조각냈던 천통경의 일부.

번-쩍!

이 거울조각이 비춘 풍경들은, 한마디로 ‘살벌’했으니까.

끼익!

어느새 산 정상에 다다른 창규.

가파른 절벽 아래로, 휘몰아치는 피 폭풍과 해일처럼 솟구치는 독 안개가 보인다. 사방에서 나무가 쓰러지고, 바닥이 갈라지고, 바위가 굴러떨어진다.

하지만 그것보다 살벌한 건.

- 뭐, 지금 너한테 저런 진법은 그나마 양반이지.

콰콰콰콰콰-!

수십이 넘는 혈강시와 반연문 고수들 사이에 일어나는 생사결. 치열하게 펼쳐지는 무공과, 현란한 온갖 초식들. 까놓고, 저기엔 1갑자가 넘는 무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 분석하건 뭐하건, 보이긴 하냐?

빠르고, 강력하다.

눈에 채 담지 못할 정도로.

- 그냥 계약서 서명하라니까?

원래라면 절대 끼지 못할 싸움이다.

이들 사이에 피어난 진법을 역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싸움이라는 것이다.

- 넌 임마, 이 선배님이 무조건 있어야 돼.

쾅쾅쾅!

쳐다보는 것만으로 눈이 저릿하고, 쇄도하는 바람의 호곡성에 귀가 멍하다.

- 괜히 허세 부리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창규는 무림인이 되기로 했으니까.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쟁취하는 자가 되기로 했으니까.

- 그냥···.

“가즈아아아아아!”

부아아아아-!

산 아래로 오토바이를 내달리는 창규.

- 너 뭐 믿고, 야! 너 설마 심적권청 쓴 거 아니지?

맞다.

이미 그에겐, 저 아래 보이는 모든 것들이 느리게 보인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심적권청의 세계가 펼쳐진다. 모든 싸움과 진법, 그리고 환경들이, 0.001초 단위로 그의 앞에 펼쳐진다.

- 너, 저 정보 다 통제하려면 대가리 깨질 텐데 괜찮겠냐?

상관없다.

창규는, 절대 이 ‘Zone’모드를 해제하지 않을 생각이다.

[Zone 모드를 실행합니다.]

오늘.

싹 다 끝장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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