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혈교(血敎).
세계의 뒤편에서 피를 매개로 사람을 찢고 불태우며, 노예처럼 부리기까지 한다는 정체불명의 암약 단체. 최근 일어난 영국의 스타디움 1만 관중 대량학살 사건의 주범이 바로 이자들이지만.
“······그러니까 처음 듣는다니까요?”
창규에겐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오무답문(五無答們) 중 하나.
세계 무림 맹주가, 존재 여부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은’ 5개의 단체. 세상의 혼란을 염려한다며 공식 발표를 미룬 수수께끼의 단체 중 하나가, 바로 저 혈교였으니까.
“와, 그게 실제로 있다는 얘기네요. 그냥 자기네 존재 어필하려고 세계 무림맹이 지어 낸 개소린 줄 알았는데.”
- 일단 차 세우라니까!
“아니, 그럼 더 못 세우죠.”
부아아아아-!
창규는 픽업트럭의 방향을 튼 지 오래다.
지금, 차량 네비게이션은 동해(東海)를 향한 상태.
- 스탑!
“도망가야죠. 어차피 영약은 챙길 만큼 챙겼고, 애초에 딱 아슬아슬한 경계까지만 찍고 오는 게 원래 목표였잖아요.”
산봉우리 위로 피어오른 붉은 기운.
직감했다.
저건 위험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위험 감수한 겁니다.”
- 야! 쫄 필요 없다고! 저기 대가리도 나한테 안 되던 놈이었어!
“지금 선배님 왕년 얘기는 의미 없죠.”
- 들어봐 봐!
부아아아-!
엑셀을 밟는 창규의 발길을 되돌리기 위한 천마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그건 도무지 설득인지 협박인지 진의가 헷갈리는 이야기들뿐이었다.
- 쟤네는, 제사장 하나 키우는데 일류 고수가 무지하게 많이 필요하거든? 비유가 아니라, 일정 수준까지는 진짜 인신 공양하는 만큼 세진다고.
혈교는 문신의 힘을 써야 진가가 발휘.
혈교 무공은 사람을 재료로 성취.
혈교는 사람 가죽을 장비로 씀.
혈교는 피를 먹고 살을 태움.
혈교는 사술(邪術)의 전문가.
-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아냐?
“·········충고 감사합니다.”
- 야!
창규가 엑셀을 세게 밟는다.
부아아아아-!
어느새 들어선 태백시의 도심.
산길을 구불구불 도는 것보다, 아예 태백시를 가로질러 곧장 동해로 빠져나가는 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 단순한 무림맹 간부보다 더 위험하네.”
- 그게 포인트가 아니야!
“사술이나 저런 이상한 힘을 쓰지 않고도 무림맹 간부가 된 놈인데, 그럼 여태 진짜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 그게 아니라! 힘이 모자란 놈들이라고!
“예?”
- 저딴 사술이나 술법을 무공에 적용하는 이유! 따라 하고는 싶은데, 깜냥이 안 돼서 우회하는 거라니까?
“···누굴 따라 해요.”
천마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진.
- 마! 당연히 나지!
끼익!
순간 창규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 맨 처음에 혈교 시스템을 만든 애가 있어. 1대 혈마(血魔)라고, 딱 들으면 느낌 오지? 별호도 나 따라 만들었다.
“아니, 뭔.”
- 옛날에 내 팬클럽이 있었거든? 그거 따라 만든 게 혈교야.
“잠깐만요.”
- 근데 본인은 나 같은 슈퍼스타가 아니란 말이지? 그럼 어떻게 했겠어, 힘이 안 되니 이것저것 비열하고 야비한 수법 다 가져와서 힘을 키운 거지.
“혹시, 그 제자예요?”
문득, 떠올랐다.
자기 얘기를 꺼리던 천마가 일전에 지나가듯이 툭 내뱉었던 말이.
- 뭔 제자.
“선배님 배신했다는?”
- 아, 걔 아냐.
“근데 왜 이러세요?”
- 뭐가?
“이러시는 이유가 뭐냐고요.”
문득, 궁금해졌다.
아까 피바람 냄새를 맡은 순간, 여태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으며 히죽거렸던 이유가.
또, 궁금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창규를 저 위험한 상황에 보내려는 이유가.
“혹시, 아까 그놈이랑 싸우면 제가 이깁···.”
- 미쳤냐? 절대 못 이기지.
“아니.”
- 클라스 차이라는 게 왜 있겠냐? 지금 네 상태론 죽었다 깨도 안 돼. 일대일로는 절대, 절대, 절대, 못 이겨.
“그럼 왜 가라고 한 건데요.”
분명 목적이 있다.
또한 그 목적은, 천마가 여태 답하지 않은 ‘창규를 수련시키는 이유’와도 맞닿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 야, 혈교잖아. 너 쫓아오는 게 쟨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어.
배신감?
아니다.
지금 천마가 지은 표정엔, 상처를 떠올리는 씁쓸함이 없다.
- 걔 무흔(武痕) 보니까, 내 따까리급도 안 되더라. 굳이 따지자면 따까리의, 따까리의, 따까리? 에이, 그것도 과하지.
분노?
아니다.
지금 천마가 지은 썩은 웃음엔, 상대에 대한 적의가 없다.
- 나 땐, 혈교 새끼들은 백 리 안에 선배님들 계신지 먼저 확인부터 하고 큰소리 냈다고. 참나, 뭣도 안 되는 새끼가 어디 하늘에 대고 단전통을 울려대?
같잖음.
지금 천마는, 그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그래서 어쩔 건데요? 어차피 제가 못 이기는 건 마찬가지 아니에요?”
- 일대일로는 절대 못 이기지.
“에이.”
- 근데 너 지금 일대일 아니잖아? 반연문 새끼들 죄 파리떼처럼 모여들지 않았냐고. 거기 슬 섞여서···.
“참나, 걔들은 뭐 장님입니까? 말 들어 보니 걔들도 100% 장담 못 하는 상황이라면서요.”
철컥!
헛웃음 치며 엑셀을 밟는 창규.
그런 그를 향해, 천마가 황급하게 입을 연다.
- 혀, 혈교는 술법진이 반이야! 저 새끼들, 사술로 급격하게 힘 키운 놈들이라 술법진만 터뜨리면 바로 호랑나비 춤추는 거야.
“술법진?”
- 그래, 진법! 진법 말이야, 진법! 봐! 당장 여기 애들도 독으로 된 진법 설치하고 있잖아.
부아아아-!
도심을 달리는 트럭 창밖으로, 내공을 지닌 무인 몇이 평상복 차림으로 대형 클럽 주위에서 수상쩍은 작업을 하는 광경이 보인다.
‘반연문 무인들···?’
현장이 바쁠 텐데 왜 여기?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창규를 향해, 천마가 재빨리 이유를 설명한다.
- 딱 보니까 산에서의 싸움은 시간 끌기용이고, 진짜는 이 진법인가 보네. 야, 저기 또 깔고 있네? 얘들 대체 몇 개를 준비하는 거야?
왁자지껄한 도심 한가운데.
아직 진백현의 출현을 모르는 일반인은 피신시키지도 않은 채, 자기들끼리 뭔가를 설치하는 게 영 껄끄러워 보이긴 했지만.
- 어쨌든, 진법 몰라?
“들어 보긴 했는데.”
- 그래, 진법! 원래 일 대 다수나, 기량 차이 심한 고수 상대하는데 이 진법만 한 게 없다고.
이건, 창규 역시 들어 본 개념이긴 하다.
- 너.
진법(陣法).
특정 좌표에 묘한 성질을 가진 물체를 순리에 맞는 이치로 배치하여, 자연지기를 순간적으로 조정하는 특수한 기술.
- 혹시 기억나냐?
하지만 그런 창규는 몰랐다.
- 감히, 이 천마님을 봉인했던 진법이 있었다고.
“기억은 나죠. 근데, 그거 관련해서 물어봐도 선배님은 여태 입 꾹 닫거나 딴소리만 했잖아요?”
- 당연히 그냥은 못 말하지.
구 무림이 끝나고 신 무림이 오기까지.
그 오랜 공백기 동안 천마를 붙잡아놓았던 고금제일의 진법.
- 내가, 그 봉인 때문에 얼마나 개 같은 짓을 했는지 아냐?
그 진법을 깨기 위해.
천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다.
- ············공부했다.
구 무림에 존재하던 모든 진법을.
* * *
태백시 외곽.
산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진백현과의 싸움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변두리 전당포에서.
“뭐? 독진(毒陣)? 그게 뭔데?”
전화기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있었다.
“독으로 된 진법? 아니, 씨발! 그딴 걸 왜 우리 가게에서 펼쳐!?”
바깥에는 전당포를 지키는 ㈜반연건설 소속의 무림인 다섯,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반연건설 소속 보안실장의 목소리.
여긴 평범한 전당포가 아니다.
『 YG전당포 』
이 전당포는, 저번 달부터 ‘진백현’ 프로젝트의 총 기획을 맡은 장범재 실장의 동생이 운영하는 곳.
- 지금 당장 나와! 거기도 지금 위험하다니까! 2차 방어선 만들어야 한다고!
“1차건, 2차건 난 모르겠고.”
- 야! 장연재!
답답한 장 실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10번대 영약지대에 배치한 깡패들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몰살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 지금 당장 거기 진법 설치해야 한다고!
산기슭 바로 앞에 있는 이 전당포가, 1차 독진을 펼치기에 딱 알맞은 장소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 너 씨발, 거기 있으면 죽는다고!
독진 없이 급하게 투입한 2, 3급 무림인들.
그들이 진백현을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만큼은 이 싸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오빠로서의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죽을 테니까 신경 꺼!”
- 야! 장연재!
“여기 우리 할머니 때부터 3대째 내려오던 가게야! 생전 신경 안 쓰고 깡패질 하러 다니다가, 이제 와서, 뭐? 진법을 써야 하니까 가게를 내놓으라고?”
-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다운 게 뭔데!”
큽.
그 진부한 대사에, 전당포 문 앞에서 경계를 서던 반연문의 무림인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심각한 분위기인 건 알겠지만,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너무 흔해 빠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분명히 말했다. 너 나오건 말건 거기다 독 뿌릴 거야.
“독을 뿌리건, 똥을 뿌리건 맘대로 해!”
- 장연재! 너 인생 포기한 척 사는 거, 그거 관심받으려고 하는 줄 내가 모를 줄 알지? 너 정신 안 차릴래?
“정신은 씨발, 깡패새끼들이랑 칼질하는 네가 차려야지!”
너무 흔한 상황이다.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자란 오빠, 그를 동경하던 여동생. 그러다 흑도 문파로 빠진 오빠, 동경이 실망과 분노로 바뀐 여동생의 반항. 급사한 부모님의 가업을 대신 이어받은 여동생, 그녀를 향해 미안해하는 오빠.
이젠 아침드라마로 나와도 진부한 설정.
‘···아주 씨발, 드라마를 찍네.’
새어 나오는 대화를 듣다가 피식 웃은 무림인들.
지금쯤 저 산줄기 너머로 파견됐을 동료들에 비해,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몇 시지?’
‘슬슬 가야 돼.’
‘1분만 더 듣고 갈까?’
그들의 임무는 장연재를 본부로 데려가는 것.
자신의 동생을 기절시켜서라도 본부로 데려오라는 장 실장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 동안 전당포 안에서 나타나는 남매간의 대화를 여유롭게 엿들을 수 있었다.
‘장 실장 반말하는 거 처음 듣지 않냐?’
‘욕 존나 잘하네.’
흔한 고함.
흔한 눈물.
흔한 사연.
‘야, 잠깐만! 저 트럭 뭐야?’
부아아아-!
태백시에선 흔하디 흔한 사연이 펼쳐지고 있던 이 전당포 앞으로, 트럭 하나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는데.
“아, 씨발! 저건 또 뭔···.”
“아냐. 저거 우리 쪽 트럭 같은데?”
“뭐?”
“영약 수확할 때 쓰는 트럭이잖아.”
“아, 그러네.”
저것 역시 흔한 트럭이었다.
이 전당포 안에서 새어 나오는 사연처럼, ㈜반연건설의 사람이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흔한 트럭.
“잠깐 정지!”
“아, 수고하십니다.”
문제는.
“혹시···.”
그 트럭에 탄 자와 더불어.
이 전당포의 좌표와, 여기 있는 물건들이, 그리 흔하지 않은 것이라는데 있었다.
“······안에 사장님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