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청량리 기차역.
새벽 5시.
좌판 까는 노점상, 출장가는 회사원, 이른 여행객 등 아침을 여는 이들이 운무(雲霧)처럼 모이기 시작할 무렵.
“···벌써 나왔네.”
골목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미니 보인다.
무림 연맹의 살수들.
24시간 편의점 안에서, 은행 ATM 앞에서, 손수레 옆에서 행인으로 위장한 채 시종일관 누군가를 찾고 있는 저들이.
“저러면 티가 안 날 줄 아나.”
- 일반인은 눈치 못 채. 네가 이상한 거야.
“뒤쪽에 미행 없죠?”
- 없다니까. 그나저나, 너 진짜 서울 뜰 거야? 남아서 한따까리 안하고?
“네.”
창규는 서울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천마의 무공 목록 열람을 봤음에도 저 살수들과 맞서지 않기로 결심한 건, 그가 가진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서울은 무림연맹 본거지예요. 2시간 내로 빠져야 된다니까요.”
2시간 남았다.
무림맹이 버스터미널과 기차역 같은 장거리 운행 수단을 제일 먼저 막은 후, 경찰 쪽 커넥션을 통해 CCTV로 서울시 경계부터 포위망을 좁혀나가기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그 안에 못 나가면 끝입니다. 쟤들, CCTV 확인하는 단계까지 가면 택시기사나 동네 조폭들한테 현상금부터 걸고 수배 때리기 시작하니까 그 후로 잡히는 건 시간문제예요.”
- 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1시간 내에 경공 마스터 힘들겠죠?”
- 무공이 뭔 컵라면이냐?
확실히,
천마의 무공을 배워서 써먹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 수련기간을 단축시킬 순 있는데, 1시간은 오바지.
“후, 천마 별거 없고···.”
- 아나, 새끼가! 한 걸음만 떼도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천마군림보에, 만독불침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무량불침까지 친히 알려 주겠다는데···!
“어쨌든 지금 못 쓴다는 거잖아요.”
침묵하는 천마.
그가 홀로그램 침까지 튀겨가며 설명한 그 무공들은, 말만 들어서는 한국 무림 연맹이 모두 덤벼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공을 익혔을 때의 얘기다.
- 얌마!
내공도, 시간도 부족한 지금 쓰긴 힘들다.
- 그 나이 먹도록 내공 하나 없는 게 내 잘못이야? 어디 강낭콩만큼이라도 있으면 A부터 Z까지 가이드 해준다니까!
지금 천마는 환영(幻影)화된 상태.
본인의 말에 따르면 ‘고금제일의 치졸한 진법’에 의해 정보화된 형태로 나돌고 있는 지금, 당장은 그에게서 물리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아까의 ‘Zone 모드’도 마찬가지.
이 역시 비트화된 천마가 창규의 뇌를 오버클락(Overclock)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럼 지금 바로 쓸 수 있는 건···.”
-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그 심적권청밖에 없어. 그것도 내공 없는 상태론 하루 2번이 한계니까 오늘 남은 건 1번뿐이네.
“아까 쓴 건 내 의지도 아니었잖아요?”
- 네 목숨 위험해서 내가 발동시킨 것도 카운터되는 거라니까.
“하 참.”
창규가 한숨을 쉬었다.
Zone 모드 1회권과 주머니의 현금 3만원.
무림연맹의 감시를 따돌리고 서울을 탈출하기에는 가용할 수 있는 무기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심지어 지형지물을 사용하기엔 탁 트인 공간들이 펼쳐진 지금.
‘7명.’
제껴야 할 살수가 너무 많다.
역사 중앙 계단, 광장 노점상, 근처 편의점에서, 이젠 아예 사진을 패용하고 다니며 행인들의 얼굴과 비교 대조하는 무림연맹의 하수인들. 저 인원을 다 뚫고 매표소 앞까지 도달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 기차역 말고 터미널로 가지 그러냐?
“무림연맹 하청업체 중에 운수 회사도 있어요. 쟤들 벌써 사진까지 뿌린 것 같은데, 그리로 가면 아예 버스 기사들이 신고해서 잡힐 겁니다.”
- 발 몇 번 구르면 작살날 애들인데, 답답하네.
“답답하면 직접 뛰시던가.”
- 아냐, 재밌어. 평생 X밥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막 서바이벌 게임하는 느낌 나고 그래.
“·········.”
- 근데 어디로 갈 거냐?
“강원도 태백시요.”
- 산 좋고 물 좋은 깡패 많은 거기?
강원도 태백시.
(구)강원랜드가 망한 뒤 사설도박장과 중소 방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그곳만 간다면, 무림맹의 추적을 1차적으로는 피할 수 있다.
- 잘됐네. 거기 요새 완전 영약 밭인 거 알지?
영약 유무는 몰라도, 지방으로 갈수록 서울처럼 무림연맹의 힘이 강하게 적용되지는 않으니까. 원래 지방에는 맹보다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명 기업이 있고, 그중에서도 태백시는 유령 신분증과 대포폰을 만들기 좋은 곳이다.
- 거기 가서 내공업 좀 하고 본격적으로 수련하면 되겠네.
다만, 지금이 문제다.
“일단 쟤들만 뚫고···.”
기차만 타면 되는데.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든, 창문을 통해 들어가든, 어떻게든 청량리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틈을 보던 창규가,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미친.”
- 왜 그래?
상황은 악화일로(惡化一路).
광장을 거닐며 역사 주변을 감시하는 무림인들만 해도 벅찬 지금···.
“지, 지부장님을 뵙습니다!”
“지부장님을 뵙습니다!”
“지부장님을 뵙습니다!”
파견본부의 서울지부장이 와 버렸다.
* * *
후두두둑!
솟구치던 비둘기 떼가 역 앞 광장에 떨어져 내린다.
“미친놈들아, 빨리 안 찾아!”
뛰어다니는 인력들을 향해, 무림맹 파견본부의 서울지부장이 사자후를 내지른 것이다.
“본부장님 지시다!”
“백창규, 이 새끼 잡는 놈은 팀장 특진에 연봉 보너스 두 배다!”
“비슷하다 싶으면 일단 발목부터 베고 봐!”
“개구멍, 하수구, 창문 할 것 없이 다 뒤져!”
공력이 실린 호통.
바닥에 떨어진 비둘기들이 움찔거리고, 가로수들이 쏴아 흔들리며, 지나다니던 행인들이 고막을 막은 채 주저앉았지만, 지부장은 그딴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창규.”
이 새끼 때문에 귀가 잘렸다.
뿌드득!
서울지부장이 수건 덮인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 개같은 쥐새끼 때문에!”
㈜오성클린의 나머지 직원들은 모조리 죽여 버린 지금, 빠져나간 타깃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현장 소집 때 다 죽이라고 하지 않았냐, 왜 일을 2번 하게 만드느냐, 그 새끼가 천마를 가져갔으면 어쩔 거냐 같은 말들을, 진백현 본부장은 하지 않았다.
‘끄아악!’
‘다음은 오른팔이다. 꼭 찾아오도록.’
서걱!
무심하게 귀를 잘라 버렸던 진백현.
기억을 떠올린 서울지부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1급 무림인의 윗물이라 불리는 서울 지부 입회인들을 총괄하는 자신도, 그 괴물만큼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매표소는 물론! 화장실, 환풍구, 지하대피소 및 플랫폼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도 모조리 검사한다!”
“예!”
최선을 다해 수색을 지시한 서울지부장.
파파팟!
잠시 후 경공을 펼쳐 역사 옥상으로 올라가던 그의 품속에서 문자가 울린다.
「강남고속터미널 - 미확인」
「동서울터미널 - 미확인」
「김포공항 - 미확인」
점점 얼굴이 창백해진다.
오늘 안에 그 백창규란 놈을 찾지 못하면, 그는 진백현에게 팔이 잘리고 말 것이다.
“십새끼, 어디로 튄 거야.”
옥상 위에서 안력(眼力)을 펼쳐 조급하게 역사 주위를 훑던 그가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후우우.”
어차피 갈 곳은 뻔하다.
시외로 빠지는 장거리 운행수단은 모조리 막아 놨다.
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 김포공항, 그리고 외곽으로 통하는 지하철역 쪽엔 이쪽의 모든 입회인과 살수 및 비전투인원들을 투입했다.
“게다가 여긴 내가 있잖아.”
청량리역엔 서울 지부장이.
서울역엔 진백현 본부장이 직접 가 있다.
“서울역엔 그 미친놈이 있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기는커녕, 근방에 얼굴만 비춰도 그대로 잡혀 가는 상황. 서울시를 빠져나갈 장거리 운행수단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럼 결국은···.”
30분 후엔 택시기사들에게 사진을 뿌린다.
1시간 후엔 동네 조직들에 사진을 뿌린다.
1시간 30분 후엔 각 구의 통합관제센터 쪽과 협조해서 CCTV를 확인한다.
“···독 안에 있는 건 확실한데.”
시간문제다.
이동수단을 막아 놓고 외곽에서부터 조여 오면 그깟 놈 하나 잡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속을 불편하게 만든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아마 천마 때문일 것이다.
진백현이 말한 바에 따르면, 현대 강호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구 무림 그 자체! 단 한 구결을 듣는 것만이라도 3급 무림인을 1급 무림인 이상의 경지로 레벨업 시켜줄 고금제일무공의 소유자!
이걸 듣고 멀쩡하다면 비정상이겠지.
“천마 캡슐이라.”
애초에 내공도 없는 쓰레기 따위가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이 아니다. 보유한 내공이 늘어날수록 더 큰 태풍을 몰고 온다는 저건, 세계 무림 맹주마저도 비공식적으로 수배를 때린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했다.
“솔직히···.”
확실히, 지금 그는 무리를 하고 있다.
국가 무림감찰부, 무림연맹 자체, 언론 등이 오늘 이후 어떤 페널티를 먹일지 모르는 과한 수배. 하지만 진백현 본부장이 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모험이다.
50m.
100m.
200m.
반경을 넓혀 가며 수색하는 부하들.
지하 하수도, 불법주차된 차 안, 가게 화장실까지 수색하며 백창규를 찾아는 이들을 보며, 그가 기대에 찬 웃음을 지었다.
“···궁금하긴 하네.”
* * *
200m.
300m.
400m.
- 도망치게? 이건 좀 실망인데.
탁탁탁!
이미 청량리역에서 멀어진 백창규.
골목과 골목,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를 뛰어다니는 그를 향해 천마가 못마땅하단 듯 투덜댔다.
- 야, 매일 200% 전력으로 부딪히는 게 무림인이야!
환영으로 된 침을 튀기며 무림인의 자격을 울부짖는 천마.
- 에이. 이번 놈은 좀 재밌어 보였는데··· 취소다, 취소!
탁탁탁!
하지만 백창규는 여전히 살수들이 모인 청량리역에서 더욱더 멀어지고 있다. 골목길을 지나, 상가들이 모인 도로변을 지나, 차들이 모이는 교각까지.
“재미도 산 놈한테 찾으셔야지. 죽으면 뭔 소용입니까?”
- 어차피 시간 더 끌면 죽잖아? 이제 1시간도 안 남았다? 너, 그 안에 서울 못 빠져나가면 뒤지는 거야! 어차피 죽을 거 어떻게든 발악을 하는 게 무림인 패긴데!
“청량리역에 가면 바로 죽는데요.”
- 하, 이 새끼 맥가이버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고전영화를 다 아시네.”
빵빵-!
차들이 오가는 2차선 다리.
문득 어딘가로 시선을 던진 창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 뭐, 택시라도 타게? 틀렸어, 새끼야. 슬슬 택시 기사들한테도 사진 쫙 돌렸을 거라고!
우뚝!
창규가 멈춘 다리의 난간 위.
높이 솟은 철조망에 붙은 『전기 위험』이란 팻말.
- 아니, 다리 한복판에 멈춰서 뭘···.
그 너머의 풍경을 보던 천마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저씨는 보이죠? 저 멀리 있는 거.”
천마에겐, 보인다.
난간 너머 저 멀리 희미해진 청량리역이.
- 어?
시선을 떨구니, 또 보인다.
다리 밑으로 깔린 철로(鐵路)가.
- 야, 너 설마···.
···철컹.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기차의 울음소리가.
“어차피 이 방향 철길은 중앙·태백 상행선. 뭘 타도 강원도로는 가요.”
그렇다는 건.
“그럼 답 나왔지.”
지금 이 다리는 기차가 다니는 철길 위라는 소리.
“기차, 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턱. 턱. 턱.
철조망을 붙잡고 위로 올라가는 창규.
그리고 그의 시선을 좇아가는 천마.
- 그러니까, 내공도 없는 주제에···.
그제야 알았다.
빠-앙!
철컹, 철컹, 철컹!
청량리역에서 경적을 울리며 속도를 높이는 기차를 보고서야 창규의 계획을 알아차린 천마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달리는 기차 지붕 위로 올라타겠다고?
철컹, 철컹, 철컹!
점점 빠르게 다리 밑으로 다가오는 기차를 노려보며.
- 푸핫.
착지 장소를 가늠하는 창규.
그를 보며, 천마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 이거 진짜 골 때리는 새끼네.
“말했잖아요.”
그리고.
그런 천마를 뒤로 한 채.
빠-아앙!
철컹철컹철컹철컹!
“···대차게 사는 거 보여드리겠다고.”
파-앗!
창규는, 열차 지붕 위로 뛰어 내렸다.
[ Zone 모드 돌입 ]
슈
우
우
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