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2)
소풍영과 서굉은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소가야.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가져온 구슬이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서굉이 다그치자 소풍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휴. 그래야겠지?”
소풍영이 힘없는 걸음으로 고정엽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고정엽은 한 손에는 골란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구슬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소풍영은 애타게 경정을 찾는 황제에게 차마 구슬의 사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 폐하······.”
소풍영이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연 그때였다.
투명한 탐인마구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고정엽도 빛을 감지했는지 황급히 눈을 떴다.
상서로운 빛이 구슬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소풍영과 서굉 그리고 엄세록이 놀라 구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내 빛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투명한 구슬 안에 뭔가 맺히기 시작했다.
구슬에 맺힌 상(想)을 보던 서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섬이 아니냐? 소가야. 탐인마구가 왜 섬을 보여주는 것이냐? 아니, 그것은 둘째치고 어찌하여 구슬이 작동하는 것이냐? 찾으려는 사람이 한 달 안에 접촉한 물건이어야 한다면서?”
서굉이 말에 고정엽이 몸이 움찔했다.
구슬 속에 맺힌 상은 그에게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비양도. 이곳은 비양도가 분명하다.’
고정엽은 고개를 돌려 다른 손에 들고 있는 비녀를 바라봤다.
‘한 달이라고?’
경정이 사라진 섬에서 발견된 부서진 비녀.
고정엽은 그 비녀를 골란으로 바꾼 후에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비양도에 갔을 때 딱 한 번, 비녀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순간 고정엽은 안색이 굳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신지요?”
소풍영은 하얗게 질린 고정엽의 얼굴을 보고 뭔가 있음을 깨달았다.
“찾은 것 같습니다. 홍아를 찾은 것 같아요.”
“예?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최근 한 달 안에 접촉이 있어야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럼, 폐하께서 최근에 경정이와 만나 적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소풍영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쩍 벌렸다.
고정엽은 즉시 구슬을 버리고 건청궁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뛰자 소풍영과 서굉도 함께 뛰었다.
“폐하. 같이 가십시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고정엽은 손에 비녀를 꼭 쥔 채 읊조렸다.
‘홍아. 내가 너를 알아보지 못하였구나. 미안하다. 홍아.’
어느새 고정엽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너를 찾아가마.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
도성의 입구.
커다란 성문(城門) 앞에 비루한 옷차림의 모자(母子)가 서 있다.
그들은 홍도에서 이곳 도성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경정과 그녀의 아들, 정원이었다.
“고정원. 내가 걸을 때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으라 말하지 않았더냐? 걷는 것도 다 수련의 일종이다. 자, 나처럼 해보아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져 있던 정원이 어머니의 가르침을 듣고 곧장 허리를 쭉 폈다.
경정은 아들의 바른 자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아주 좋구나. 계속 그렇게 걸어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 소자를 방금 고정원이라 부르신 것입니까? 왜 그렇게 부르십니까?”
“원래 혼낼 때는 성(姓)을 붙어야 효과가 큰 법이다.”
“성을 붙여요? 그럼, 소자가 고씨란 말입니까?”
“그렇다.”
“정말요? 소자에게도 성이 생긴 것입니까?”
정원의 똥그란 눈이 두 배가 됐다.
경정은 지금껏 이름으로만 불린 아들이 안쓰러웠다.
그런데 정원은 슬픈 경정과 달리 좋아하며 웃음을 그칠지 몰랐다.
“정원아. 왜 그렇게 웃는 것이냐?”
“소자도 이제 성이 생겼으니 좋아서 그럽니다. 유성이에게도 제가 고씨인 것을 알려주고 싶은데 우리는 언제 홍도에 돌아갑니까?”
“나중에 시간이 나면 놀러 가자꾸나. 유성이도 만나고 탁씨 할머니도 찾아봬야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집으로 가는 것이 먼저다.”
“우리 집은 홍도가 아닙니까?”
“그것은 잠시 머물렀던 집이다. 진짜 우리 집으로 갈 것이니 기다려라.”
정원은 진짜 집이 어딜까? 기대하며 경정과 함께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섬에서만 살아왔던 정원에게 도성은 별천지였다.
저잣거리를 구경하던 정원의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당과였다.
경정은 당과를 보고 침을 흘리는 정원을 보며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전낭을 꺼내 안을 확인해 보았다.
홍도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노잣돈을 다 쓰고 남은 것이라곤 당과 한 개를 살 정도밖에 없었다.
경정은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당과를 샀다.
“어머니. 그것은 소자를 주시려고 사 오신 것입니까?”
“도성에 왔는데 당과의 맛을 한번 보아야겠지.”
“그런데 왜 한 개뿐입니까? 어머니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단것은 어린아이들만 먹는 것이다. 어미 같은 어른은 먹지 않는다. 자, 받아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당과를 받아든 정원은 기뻐하며 웃었다.
아이가 당과를 한입 베어 물려고 하는 그때였다.
갑자기 저잣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저 멀리 앞쪽에서부터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경정은 선방(先鋒, 황제나 황실 사람들의 행차 앞에 나서서 행인을 정리하는 사람)이 나타나 인파를 정리하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선방의 뒤로는 황색(黃色)으로 치장된 마차가 보였다.
경정은 그 안에 황실 사람들이 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옆으로 비켜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께서 또 청량사(清涼寺)에 가시는군.”
“청량사에 뭐가 있길래 때가 되면 매번 그곳에 가시는 것일까?”
“아이고. 그것도 모르는가? 녹가에서 요양하고 계신 황귀비 마마님이 쾌차하시길 바라며 기도를 올리신다고 하지 않는가?”
“아. 황귀비 마마님. 그 선녀 마마님을 말하는 거였군.”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은 경정은 깜짝 놀랐다.
‘녹가에서 요양 중인 마마님이라고? 저들이 말한 황귀비가 설마 나인 것이야? 이럴 수가,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이 아직도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잊지 않으셨어.’
그때 선방이 비키지 않고 서 있는 경정과 정원 모자를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의 행차시다. 어서 길을 비켜라!”
경정이 정원을 데리고 피하려는 그때였다.
선방이 휘두른 손이 정원을 쳤고 아이는 당과를 떨어뜨렸다.
정원은 어머니가 주신 당과가 흙바닥에 떨어지자 놀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선방은 놀란 아이를 달래질 못할망정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 당장 길을 비켜서라니까!”
경정이 달려와 선방을 밀치고 놀란 아들을 챙겼다.
“정원아. 괜찮은 것이냐?”
“어머니께서 주신 당과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송구합니다.”
정원은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경정은 그런 아들이 기특해서 꼭 안아줬다.
선방은 아까부터 거리 한복판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남루한 차림의 모자를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저것들을 당장 이곳에서 치워라.”
“예. 선방 나리.”
행렬에 따라온 시위들이 달려와 경정과 정원 모자를 내치려는 그때였다.
제일 앞에 선 마차 안에서 기품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놀란 것 같구나. 잠깐 마차를 세우거라.”
정원을 달래던 경정이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서 들린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저 목소리는 황후 마마이신가?’
선방은 황후의 명에 놀라 행렬을 멈추었고 이내 황후와 태후가 마차에서 내렸다.
뒤따라오는 마차에 타고 있던 희태후와 강비도 함께 내려 황후와 태후의 옆으로 다가왔다.
경정은 보고 싶은 사람을 다시 만나자 가슴이 뛰었다.
황후는 선방 옆에서 서 있는 사내아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쪼끄만 꼬마가 무서운 선방 앞에서도 하나도 기죽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기특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발아래에 당과가 떨어져 있었는데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꼬마의 뒤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는데 머릿수건을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태후 마마. 행차 때문에 아이가 당과를 떨어뜨렸나 봅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보상해줘야겠지.”
태후는 웃으며 정상궁에게 말했다.
“아이와 아이의 어미를 내 앞으로 대령토록 하라.”
“예. 태후 마마.”
경정은 태후가 부른다는 말에 놀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원래는 신의님의 장원으로 가서 내가 왔다는 소식을 황궁에 전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렇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경정은 정원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태후와 황후의 앞에 선 경정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경정은 지난 팔 년간 궁 밖에서 기억을 잃은 채 지냈으나 황궁의 예법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윗전 마마님들 앞에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태후 마마님을 뵙습니다.”
“희태후 마마님을 뵙습니다.”
“황후 마마님을 뵙습니다.”
경정은 두 분 태후 마마와 황후에게 단정하게 예를 올린 뒤에 강하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비(妃)가 된 것 같았다.
경정은 웃으며 강하연에게도 예를 올렸다.
“강비 마마님을 뵙습니다.”
경정이 예를 올리자 그 일대가 일순 고요해졌다.
황후는 놀란 눈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자네는 대체 누구길래 우리가 누군지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이냐?”
태후와 황후는 일반 백성이 알 수도 있다.
희태후까지도 넓게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강비까지 알아보다니.
이는 내명부의 일을 소상히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에 경정이 정원이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정원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앞으로 걸어와 예를 올렸다.
“할마마마. 소손(小孫)이 인사를 올립니다.”
할마마마? 소손?
태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런데 당돌하게 태후를 할마마마라 부른 아이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했다.
태후는 그제야 소년의 얼굴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엽이······?”
태후는 고정엽이 아주 어릴 적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랐던 때를 떠올리고 놀랐다.
눈앞의 꼬마가 고정엽의 어린 시절과 판박이가 아닌가?
예를 올리고 있던 경정은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벗고 고개를 들었다.
해사하게 웃는 경정을 본 태후와 황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후는 놀라서 눈만 껌벅였지만, 황후는 즉시 경정을 알아보고 그녀를 일으켜 껴안았다.
“황귀비···? 정녕 황귀비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보고 싶었네. 자네가 보고 싶었어.”
“황후 마마.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태후와 희태후도 그제야 경정이 돌아왔음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반겼다.
“황귀비. 어찌 된 것이야? 어찌하여 그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았느냐?”
“태후 마마. 송구합니다. 그간 사정이 있었습니다. 궁에 돌아가면 모든 것을 소상히 말해 드리겠사옵니다.”
“그래. 궁으로 가야지. 자네가 머물던 청초각도 여전하네. 얼굴을 보여주게. 그동안 너무 그리웠어.”
“보십시오. 똑같지요? 태후 마마?”
“그래. 내가 알던 황귀비의 얼굴 그대로구나.”
황후와 태후는 한참 동안 경정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그제야 아이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정원은 강하연이 챙기고 있었다.
총명한 강하연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경정과 정원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원에게 내명부의 윗전 마마님들이 누군지 자세히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태후가 손을 내밀자 정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름이 뭐라 했느냐?”
“정원이라 합니다. 할마마마.”
“할마마마라고? 방금 나를 할마마마라 불렀느냐?”
“예. 그렇습니다. 할마마마.”
“어이쿠. 내 새끼. 어쩜 이리 엽이의 어린 시절과 똑 닮았을꼬.”
태후와 희태후는 정원의 고사리 같은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 흘렸다.
반면에 황후는 경정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황후 마마. 이제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니야. 자네에게도 필시 사정이 있었겠지. 정말 반갑네. 정말로 반가워.”
경정은 눈물을 훔치는 황후의 손을 꼭 잡아줬다.
그때 정상궁과 안상궁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 마마. 황후 마마. 다시 마차에 오르시지요. 소인들이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태후와 황후는 그제야 그들이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떠들고 있음을 깨닫고 웃었다.
마차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백성들은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낡은 옷을 입은 여인과 어린 꼬마가 태후와 황후의 마차에 함께 올랐다.
아이를 밀친 선방은 이 모습을 보고 식겁했다.
“마차를 돌려라. 황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차가 움직이자 선방이 놀란 눈으로 눈썹이 휘날리게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이내 마차가 떠났고 저잣거리는 다시 평소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
녹가에서 요양하고 있던 황귀비가 회궁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선녀라 불린 황귀비가 돌아온 것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이곳은 청초각.
아름답게 치장한 어머니를 보며 정원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정말입니다. 황궁에 사시는 마마님들은 모두 아름다우시나 그중에서도 어머니께서 제일 아름다우십니다.”
경정은 기분이 좋은지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웃었다.
사실 경정은 오늘 유독 신경을 써서 치장했다.
이유는 단 하나.
오후에 황제가 돌아올 거라는 전서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천축국에서 신물을 얻어와 나를 찾으실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나와 길이 어긋났으니 얼마나 상심하셨을꼬.’
경정은 팔 년 만에 고정엽과 재회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려왔다.
그때 소이자가 헐떡거리며 청초각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마마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