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44/251)

어사 백려

경정은 부도주 서총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간신배 상이었다.

서총이 풍죽오괴를 호위처럼 두르고 거만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왔다.

‘누가 보면 저자가 도주인 줄 알겠군.’

경정은 고개를 돌려 서총의 뒤를 따라오는 진짜 도주를 발견했다.

‘이름이 장승은이라고 했던가? 우리 정원이보다 세 살 형이구나. 그나저나 정원이는 잘 있겠지? 내가 없다고 수련을 게을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나.’

소년 도주를 보며 경정은 홍도에 두고 온 그녀의 어린 아들이 생각났다.

그때 갑자기 몸에 거머리가 달라붙는 것처럼 불쾌한 느낌이 경정을 엄습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서총과 풍죽오괴 일당들이 그녀를 야릇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저놈들이 왜 나를 저렇게 더러운 면상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냐? 재수 옴 붙게 시리.’

경정은 풍죽오괴가 국숫집을 찾아왔을 때부터 저들이 뭔가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저들의 더러운 눈빛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섬사람들을 수탈하는 것도 모자라서 여색까지 탐하는구나. 네놈들을 혼내줄 명분이 한 개 더 늘어났어.’

그때 서총이 소년 도주에게 말했다.

“도주. 각 섬에서 데리고 온 일꾼들이 모였습니다.”

“예. 그렇군요.”

장승은은 총명해 보였으나 서총에게 기가 눌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부도주님. 오늘은 피곤할 테니 저들을 쉬게 하는 편이 어떨까요?”

소년 도주가 일꾼으로 불려온 사람들을 살피려고 들자 서총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주. 쓸데없는 걱정을 하십니다. 저들은 평생 노동을 하던 자들이니 익숙할 것입니다. 제가 이미 저들을 어찌 부릴지 안배해 놓았으니 도주는 신경 쓰지 마시지요.”

“하지만 그래도 도착한 첫날인데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는 것이······.”

“도주께서는 이런 일을 잘 모르시지요.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이 때론 도움이 됩니다. 이곳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서총은 도주 장승은을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있었다.

소년 도주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경정은 소년이 마치 제 아들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서총. 네놈이 언제까지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

비양도로 가는 배 위에 도성에서 온 어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최근 비양도와 그 일대의 섬에 해적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의 명에 의해 파견된 어사 백려였다.

“폐하. 바닷바람이 차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엄세록은 갑판 위에 나와 있는 고정엽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있으니 답답한 속이 뚫리는 것 같군. 신경 쓰지 말고 자네는 일이나 보네.”

“폐하. 그럼, 장포라도 입어 주십시오. 바람이 찹니다.”

“알겠네. 그리하겠네.”

고정엽은 엄세록이 건네는 장포를 걸치고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를 바라봤다.

“어사 백려의 이름을 빌린 것이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폐하.”

엄세록의 말에 고정엽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찰원에서 그동안 말이 많았다지? 백려가 암행어사 일을 하다가 죽은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도찰원을 관리하는 수장이 바뀌면서 백려에 대한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챙기지 못한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아니네. 그동안 내가 양왕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했어.”

고정엽은 말을 내뱉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엄세록은 그런 황제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황귀비 마마님을 더는 찾지 않으실 작정이십니까?”

고정엽은 바다를 바라볼 뿐 답하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신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고정엽이 엄세록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는가. 지금은 잠시 홍아를 찾는 것을 멈추고 소풍영 어르신과 서굉 어르신을 기다릴 것이네.”

“소신도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천축국(千縮國, 인도)에 가셨다지요?”

“그곳에 대진(大秦, 고대 페르시아를 일컫는 말)국에서 내려온 기이한 구슬이 있다는데 그것으로 잃어버린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하더군.”

“세상에 그런 신기한 물건이 있었군요.”

“두 분께서 구슬을 구해 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하고 떠나셨으니 믿고 기다려야겠지.”

“하지만 그런 기이한 물건이라면 구하기 쉬울까요?”

“걱정하지 말게. 소풍영 어르신과 서굉 어르신이 어디 보통 분들인가? 알아서 하실 테니 걱정하지 말게.”

곰곰이 생각하던 엄세록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소풍영과 서굉이라면 황제가 저렇게 믿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때 그들의 목적지인 비양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폐하. 저기 비양도가 보입니다.”

비양도 곳곳에 매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렇구나. 아름답구나.”

고정엽은 비양도에 가득 핀 매화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이겨내고 수줍게 핀 매화가 그에게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

이곳은 도주성의 부엌.

도성에서 온 손님을 맞이할 음식을 준비하는 경정의 앞에 누군가 찾아왔다.

“이보게. 정원 엄마.”

그녀를 부른 것은 도주성의 부엌일을 담당하는 참모, 최씨 여인이었다.

경정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령전(司令殿)에 일손이 필요하다는군. 정원 어멈. 자네가 좀 가보게.”

“사령전이라면 도주님의 집무실이 있겠군요.”

“잘못 알고 있네. 도주께서는 부도주님과 집무실을 바꾸셨네. 사령전에 부도주께서 계시네.”

예부터 사령전은 도주가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부도주 서총은 이미 전각까지 마음대로 쓰고 있었다.

경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웃으며 답했다.

“예. 그리하지요.”

“사령전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네. 그러니 자네가 입고 있는 그 옷은 안 되겠어.”

“어차피 일을 하러 가는 것인데 옷까지 갈아입어야 합니까?”

“당연하지. 잔말 말고 나를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참모 나리.”

최씨는 경정을 데리고 도주성의 변방에 있는 조용한 전각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곳은 시비들이 옷을 갈아입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안에 옷이 있으니 갈아입고 나오게.”

“알겠습니다.”

경정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였지만 경정은 피식 웃을 뿐 표정 변화가 없었다.

최씨 여인의 말대로 안에는 옷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시비들이 입는 옷과 판이했다.

그것은 하늘거리는 천으로 만들어진 무희나 입을 법한 옷이었다.

경정은 얇은 천 조각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혀를 찼다.

‘이런 얕은 수를 쓰다니. 못된 놈들 같으니라고.’

그때 안쪽의 침전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는 풍죽오괴 찬일이었다.

이미 방 안에 다른 누군가 있는 것을 눈치챈 경정은 그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찬일은 여인을 단장시켜 서총에게 데려가려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는 야릇한 눈빛으로 여인을 보더니, 입술을 핥았다.

“옷을 갈아입어라.”

“도주성에서는 시비에게 이런 옷을 입히는가?”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구나. 역시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어. 그때 품삯을 요구했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찬일은 여인을 겁주기 위해 허리에 찬 검을 꺼냈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옷을 갈아입도록 하라. 뒤돌아서지도 말고 내 앞에서 말이야. 하하하. 오늘 내가 좋은 구경을······. 어? 흡!”

순간 재갈을 물린 듯, 찬일의 입이 막혔다.

입이 꽁꽁 얼어붙은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놈의 더러운 말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구나.”

빙하장을 쏴서 찬일의 입을 막은 경정은 대뜸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크헉!’

쓰러진 찬일의 위에 올라선 경정이 그의 다리를 힘껏 밟았다.

경정이 밟자마자 ‘또각’ 소리와 함께 다리 뼈가 부러졌다.

찬일은 고통에 몸부림쳤으나 그의 입이 막혀서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찬일은 다리뼈가 부러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구나.”

경정은 축 늘어진 찬일을 끌고 침전으로 데리고 갔다.

그를 침상 아래에 대충 구겨 넣은 경정은 준비되어 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이 너무 튀었으나 잠깐만 빌려 입을 생각이었으니 개의치 않았다.

“흠.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군.”

경정은 침전 안을 살폈다.

그때 침상에 드리워진 면사가 보였다.

경정은 면사를 찢어 그것을 얼굴에 둘렀다.

얼굴까지 완벽하게 가리자 그제야 그녀의 마음이 편해졌다.

“이런 일이 왜 이렇게 익숙한걸까? 혹시 내가 강호에서 활약하던 협객이었나?”

경정은 매번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할 때마다 놀라웠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경정이 열린 창문으로 밖을 보니 누군가 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성으로 들어오는 사내를 보며 생각했다.

“저자가 도성에서 왔다는 어사로구나. 요즘은 얼굴로 어사를 뽑나? 인물이 훤칠하구나. 저 잘생긴 얼굴처럼 부디 대쪽 같은 성품의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래야 내 계획이 성공할 것이다.”

순간 경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채비를 마치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삼층 높이는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린 그때, 성안으로 들어오던 고정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저 멀리 있는 전각에서 희뿌연 물체가 공중에서 떨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허허. 엄도통. 나는 지금 어사 백려다.”

“어이쿠야. 소신이 말실수했습니다. 폐하.”

“백려! 백려! 백려라고!”

***

서총은 여인을 데리고 오겠다고 나간 찬일이 오지 않자 화가 났다.

이내 찬일을 찾겠다고 나간 검택과 풍죽오괴가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여인은 어디에 두고 혼자 왔느냐? 찬일은 또 어디 갔어?”

“부도주 나리.”

검택은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어서 말하라!”

“아무래도 찬일이 여인을 데리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뭐라? 그것이 참말이냐?”

“방으로 가보니 창문이 열려 있었고 찬일과 여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여인이 원래 입고 있던 낡은 옷뿐이었습니다.”

검택과 풍죽오괴는 방을 뒤졌으나 침상 아래에 혼절해 있는 찬일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긴 어느 누가 찬일이 침상 아래에 누워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서총은 자신이 탐내던 여인을 수하가 데리고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다.

“당장 찬일과 여인을 잡아 오너라!”

“하지만 어사께서 이미 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분을 맞이하러 가셔야지요.”

“너희들은 어차피 내가 부리는 수하이니 상관없는 일이 아니냐? 이곳은 섬이라 찬일과 여인이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네놈들이 당장 사람을 풀어 그들을 찾아내 앞에 대령해라. 알겠느냐!”

검택과 풍죽오괴는 어사를 위해 열리는 연회에 참석해서 즐길 생각을 하며 좋아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틀어지니 화가 났다.

“예. 알겠습니다. 부도주 나리.”

풍죽오괴가 떠나자 서총은 탁자 위에 놓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감히 부도주인 나를 능멸하다니.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그때 방 안으로 시비가 들어왔다.

“부도주 나리.”

서총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시비를 바라봤고 어린 소녀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이냐?”

“도주께서 부도주를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도주가 나를?”

“예. 그렇습니다.”

서총은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어린놈이 자신을 만나자고 하자 더 화가 났다.

“도주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라.”

“하지만 부도주 나리.”

“시끄럽다. 당장 내 말을 전하라니까. 어린놈이 어른을 함부로 이리 와라, 저리 가라 하다니. 아비 없이 자라서 그런지 배운 것이 없어.”

서총이 소년 도주를 향해 질이 나쁜 욕을 해대자 시비의 안색이 굳었다.

시비는 그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얼마 후, 아무도 없는 사령전의 복도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하늘하늘하는 옷을 입은 경정이었다.

‘여기가 명당이로구나. 부도주의 악행이 밝혀질 명당.’

면사로 가려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이제 어사를 만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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