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2화 (242/251)

이름없는 여인

방금 소년을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경정이었다.

경정이 부르자 정원이라 불리는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정원아. 고개를 들어 보아라.”

“...”

소년이 말이 없자 경정이 다시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마침 방에서 나온 탁씨 할머니가 모자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 달려왔다.

“아이고.그만하렴. 정원이가 놀란 것 같구나. 우리 정원이는 이리 오렴. 할미 품으로 와라.”

탁씨 할머니가 정원이를 품 안으로 당기자 경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혼낼 때마다 할머니께서 정원이를 감싸시니 아이가 자꾸만 아이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친구들과 싸운 것이 아닙니다.”

정원이 할머니의 품에서 고개를 쑥 내민 채 어머니를 바라봤다.

경정은 좁혔던 미간을 풀고 물었다.

“싸운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친구들을 돕다가 이리된 것입니다.”

경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히 말하는 꼬마를 보며 말했다.

“친구들을 어찌 도왔길래 그 꼴이 되었어?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조금 전까지 탁씨 할머니의 품에 안겨있던 정원이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들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주도에서 온 사람들이 짐을 들어주면 사탕을 사준다고 하고 유성이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주도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에 탁씨 할머니의 안색이 굳었다.

이곳 홍도는 비양도(飛陽島)를 주도로 모시고 있는 작은 섬이었다.

주도에서 사람이 왔다면 그들은 필시 도주(島主)가 보낸 섬의 관리자일 것이었다.

“혹시 그들이 약속을 어기고 사탕을 사주지 않더냐?”

“맞습니다. 일만 부려 먹고 사탕을 주지 않았습니다. 유성이는 제 키보다 무거운 짐을 드느라 다리까지 삐끗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가 얼굴이 그리된 것이냐?”

“예. 어머니.”

정원이의 말에 탁씨 할머니의 안색이 굳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주도에서 온 관리에게 우리 정원이가 대들었단다.”

탁씨 할머니는 안색이 굳었다.

주도에 내는 세금을 매기러 온 사람들에게 대들었으니 걱정이 된 것이다.

하지만 경정은 탁씨 할머니와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원을 불렀다.

“정원아. 그들이 총 몇 명이더냐?”

“다섯 명입니다. 어머니.”

“다섯 모두 어른일 텐데 너는 어찌하여 덤빈 것이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텐데?”

“그래도 한번 해보는 것이지요.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네 행동이 잘한 것이냐?”

“어머니. 유성이가 다쳤습니다. 사탕값은 받지 못해도 약값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잘못 물었구나. 다시 묻겠다. 너처럼 작은 꼬맹이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장정 다섯 명을 찾아간 것이 잘한 일일까?”

“흠.”

어린 꼬마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소자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수련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생겼을 때 그들을 너른 공터로 불러내 한 명씩 혼내줄 것입니다.”

어린 소년의 맹랑한 말에 탁씨 할머니는 식겁했지만, 경정은 웃었다.

“네가 그들을 혼내주려면 겨울이 다섯 번은 지나야 할 것인데 다친 유성이는 어찌하라고?”

“다섯 번이요?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단시간에 힘을 얻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힘을 얻어봤자 모래 위에 쌓은 성이라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어머니께서 어찌 그런 것을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어른이니까 알지.”

“그럼, 저도 겨울을 다섯 번 지내면 어른이 되는 겁니까?”

“눈 속에서 피는 매화 열 번은 더 보아야겠지.”

“열 번이요? 그렇게나 많이요?”

소년이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경정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어머니. 저와 유성이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아직 힘이 없으니이대로 나쁜 놈들에게 당해야 합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가 그래서 계획의 중요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좋은 계획이 있으십니까?”

“너는 아직 어린아이고 힘이 없다. 그럴 때는 말이다.”

경정이 뜸을 들이자 정원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그럴 때는 어쩌지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른을 찾아가야지.”

해답을 들은 정원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요. 소자가 이제야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그럼, 어머니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까?”

경정은 그제야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해결해 줄 테니 너는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라. 얼굴에 멍이 들고 피를 흘렸어도 깨끗하게 차려입어야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정원이가 방으로 들어가자 탁씨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경정에게 물었다.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주도에서 온 사람들의 패악질이 도를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그것은 알고 있으나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냐?”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홍도로 흘러 들어온 지 팔 년째인데 작년까지는섬이 평화로웠습니다. 모두 선대 도주께서 돌아가시고 그분의 어린 아들이 물려받은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지요. 도주께서 어리다고 부도주가 전횡을 일삼아서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백성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요. 우리는 힘이 없지요. 그러니 악인에게 벌을 줄 힘이 있는 사람에게 사실을 알리면 되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도성에서 어사가 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어사라고?”

“예. 비양도를 시찰하러 어사가 온다고 합니다.”

순간 탁씨 할머니의 눈빛이 바뀌었다.

“설마, 어사께 부도주의 비리를 고할 셈이냐?”

“그래야죠. 어사께서 오시면 홍도에서도 일손을 보내야 할 것이니 제가 지원해 보겠습니다.”

“어이쿠 아서라. 그러다 큰일 난다.”

“걱정하지 마셔요. 제 한 몸을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경정은 탁씨 할머니를 안심시키며 생각했다.

‘열심히 생각하지 않아도 어찌 저들을 혼내 줄 수 있는지 방법이 수십 가지가 떠오른다.’

여인은 웃었으나 그녀의 미소 속에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내가 이리 총명한데 어찌하여 과거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대체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

이곳은 홍도에 있는 유일한 객잔.

홍도에서온 부도주의 수하들이 객잔의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강호인이었는데 그들의 목에 현상금이 걸리는 바람에 이름을 바꾸고 비양도에 숨어들어 부도주 서총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강호인일 때 쓰던 별호는 다름 아닌 풍죽오괴.

강호에 이름난 풍죽오우와 일부러 비슷하게 지은 것이었다.

대장 격인 찬일이 동백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홍도라 그런지 술이 동백주밖에 없네. 어이. 점소이. 다른 술은 없느냐?”

“송구하옵니다. 나리. 홍도에서 빚은 술은 이것뿐입니다.”

“쳇. 그렇군. 점소이는 들어라.”

“예. 나리. 말씀하시지요.”

“다음번에 우리가 홍도에 왔을 때는 다른 술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혼내 주겠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나리.”

점소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찬일. 오늘 우리에게 달려들었던 그 꼬맹이 말이야.”

“음?”

“우리에게 약값을 내놓으라고 달려들었던 꼬맹이 말이네. 기억하는가?”

“아! 그 하룻강아지? 그런데 그놈은 왜? 또 약값을 달라고 찾아왔어? 데리고 와 봐. 이번에는 팔을 못 쓰게 해주마. 우리 같은 고수가 사정을 봐준 것도 모르는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들어 보니 그 아이의 어미가 대단한 미인이라고 하네.”

“쳇. 이 작은 섬에서 미인은 무슨. 그냥 반반한 정도겠지.”

“그렇지 않아. 그리고 섬 출신이 아니라고 하네.”

“그래?”

찬일은 관심이 있는지 마시던 동백주를 내려놓고 검택을 바라봤다.

검택은 낮에 섬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해줬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그 여인이 탁씨 할망구의 진짜 딸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다니까. 탁씨 할망구한테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먼 곳으로 장사를 떠나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네. 그래서 탁씨 할망구가 아들이 죽은 바다라도 보겠다며 같은 항로의 배를 탔다지.”

“어이구. 눈물 없인 듣지 못할 이야기구먼. 암튼 그래서 그다음은?”

“몇 달 후에 탁씨 할망구가 돌아왔는데 글쎄 만삭인 여인을 데리고 왔다는 거야.”

“만삭의 여인이라고? 설마 죽은 아들의 부인인가?”

“나도 그런 줄 알고 물었는데 탁씨 할망구는 잃어버린 딸이라고 했다더군. 평생 이 홍도에서 나고 자란 양반인데 섬사람들이 할망구에게 딸이 있는지 어찌 모르겠어? 그런데도 다들 알았다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는구먼. 자식을 잃은 할망구가 불쌍해서 그런 것이겠지.”

“근데 정말 미인이야? 내가 보지 못했으니 믿을 수가 없는데?”

“아까 그 꼬맹이 얼굴을 못 봤는가? 어린놈인데도 얼굴에 귀티가 줄줄 흐르지 않았던가?”

“흠.”

찬일은 그가 싸대기를 날린 소년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지금 생각해보니 검택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그때 옆 탁자를 닦고 있던 점소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봐. 점소이.”

“예. 나리. 부르셨습니까?”

찬일은 검택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검택이 점소이에게 물었다.

“홍도에 홀로 사내를 키우는 과부가 있다고 하지? 자네도 아는가?”

홍도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여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점소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왜 물어보시는지요?”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가? 남편이 없는 것은 맞아? 확실해?”

“그분은 이름이 없습니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찬일이 흥분하여 되묻자 점소이가 두려움에 떨며 답했다.

“정원이. 그분의 아들이 정원이입니다. 그래서 마을 아주머니들이 정원 엄마나 정원이라고 부르시더군요.”

“여인에게 남편이 없는 것은 맞나?”

점소이가 함부로 답하지 못하자 찬일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냐? 남편이 있어? 없어?”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줄곧 홀로 지내셨습니다.”

“어쭈. 요놈 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네놈도 그 여인에게 관심이 있는가. 그렇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섬사람들은 아무도 그분께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점소이는 방금 진실을 말했다.

여인은 기억을 잃고 만삭인 채 홍도로 흘러 들어왔으나 이상하게 그녀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섬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여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알았다. 너는 그만 가봐라.”

“예. 나리.”

점소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어찌할 것인가? 어디 사는지 한번 알아볼까?”

“그럴 필요 없다.”

“아니 왜?”

찬일은 동백주를 한입에 털어 넣더니 말했다.

“곧 어사 양반이 올 거라서 홍도에서도 일손을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잡일을 시킬 사람으로 그 여인을 데리고 가면 되겠지.”

“아! 그런 수가 있었군. 역시 찬일 형이시오. 하하하.”

풍죽오괴라 불리는 나쁜 놈들이 일을 꾸미고 있는 그때, 탁씨 할머니의 작은 초가집에는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그들이 말한 이름 없는 여인이 아들의 찢어진 옷을 꿰매고 있었다.

경정은 귀신같은 솜씨로 흉하게 찢어져 있던 옷을 새 옷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왜 이렇게 바느질을 잘하지? 원래 자수를 놓던 사람이었나?”

그때 모기 한 마리가 날아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놈의 모기. 우리 귀한 정원이의 피를 또 빨아먹으려고!”

경정의 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바늘을 잽싸게 낚아채고 그것을 허공에 날렸다.

바람처럼 날아간 얇은 바늘이 모기의 몸체를 꿰뚫더니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