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0화 (240/251)

뜻밖의 선물

백악도에 도착한 하신은 짙은 안개가 낀 섬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그는 적안을 고문하여 백악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적안과 살수단에 뿌린 독이 체내에 빠르게 퍼져 결국 그들에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하신이 그들이 농아인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탓도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유심히 살피는 이가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백귀비라면 필시 내가 섬에 오리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섬에서 내보낸 것도 백귀비가 노린 것일 테지.’

하신은 그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친 백귀비가 무인도에 숨어들었다는 것을 듣고 직감했다.

‘끝내 내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냐?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어?’

하신의 마음속 깊은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찌하여 아무것도 아닌 여인 하나가 이렇게도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제는 나도 방법이 없구나. 백귀비를 내 곁에 데리고 있으려면 손발을 잘라내 강제로 묶어놓는 수밖에.’

하신은 정말로 그리할 작정이었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 몸뚱이만 남겨 아무 데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하신이 섬뜩한 눈빛을 쏘는 그때였다.

안개 너머 보이는 돌산에서 흩날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본 하신은 그것이 백귀비임을 알아채고 돌산으로 날아올랐다.

같은 시각, 경정은 돌산에 올라 몇 번이고 연습 삼아 걸었던 좁은 비탈길을 걷고 있었다.

그 길은 사람이 다니라고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절벽이 바닷바람에 깎이고 부서져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좁은 길을 위태롭게 걷던 경정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놀라 뒤돌아보니 하신이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구나.”

하신이 오만하게 웃으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의 말대로 경정은 절벽의 비탈길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경정은 하신의 몸이 전과를 달라진 것을 즉각 알아챘다.

‘뭐야? 성공한 거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건 좀 아니지요. 왜 저놈만 편애하십니까? 정말 너무 하시네요.’

경정은 화가 났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치미를 떼고 답했다.

“잘 오셨소. 섬의 기운이 영험하여 이곳에서 신마도를 세우기 위해 내가 먼저 돌아보고 있었네.”

“뭐라? 무슨 뜻이냐?”

“나보고 교주의 좌사자를 하라고 제의하지 않았느냐? 신마도를 세울 곳을 찾아 이곳에 먼저 정착한 것이다.”

경정이 허튼소리를 늘어놓자 하신은 미간을 좁혔다.

“너는 끝까지 나를 속이고 멸시하는구나.”

경정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지금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가까이서 느껴보니 하신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나오고 있었다.

경정이 침을 꿀꺽 삼키자 하신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두려움이 뭔지 아는구나. 네가 너를 죽일까 봐 두려운가?”

“나를 정말로 죽일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

“한번은 봐줘도 되지 않는가? 내가 이렇게 힘들게 신마도를 위한 섬도 찾아냈고 말이야.”

“나는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아니야. 나를 두 번이나 배신한 사람을 놔둘 것 같은가?”

“나는 신마교의 좌사자이지 않은가? 봐줄 수도 있지.”

경정은 말을 하며 은근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하신은 여인이 도망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백귀비. 그동안 너를 너무 많이 봐줬다. 무인도에서, 그것도 외나무다리나 다름없는 이 좁은 길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흥. 도망치든 말든 내 마음이다.”

그녀는 얄밉게 내뱉고는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신도 그녀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달렸다.

그의 몸은 내공은 충분하지만 경공을 제대로 배운 몸이 아니라서 절벽을 뛰어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경정은 비탈길을 달리며 바닥에 있는 표식을 발견했다.

그녀는 뛰어 올라 표식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하신은 표식을 보지 못한 상태.

하신은 바닥을 밟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푹!’

갑자기 바닥이 푹 꺼지며 비탈길의 흙이 쏟아져 내렸다.

순간 하신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이것을 노리고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인가?’

경정은 흙더미와 함께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하신을 바라봤다.

흙먼지 속에서 경정은 하신과 찰나의 순간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 그녀를 향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증오가 넘실거렸다.

경정은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즉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

돌산의 아래에 도착한 경정은 엄청나게 큰 구덩이 앞에 섰다.

이것은 그녀가 묵인회 살수들을 시켜 파놓은 구덩이였다.

구덩이는 무려 일장(一丈, 약 삼 미터) 높이나 되었고 안에는 해안가에서 가져온 돌을 깨트려 놓았다.

‘가귀인의 원래 몸이라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하신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있지.’

경정은 천으로 얼굴을 꽁꽁 감쌌다.

눈만 빼꼼히 나온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 경정은 조심스럽게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대낮이었으나 그 안은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다.

경정은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하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챈 하신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흐르는 피로 시뻘겠다.

입과 코. 눈과 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경정은 처참하게 변한 하신의 얼굴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백귀비···.”

하신은 참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곳에 독을 풀었구나. 나를 잡으려고 자고독을 풀었어.”

경정은 피를 토하는 하신을 보며 안도했다.

“그래. 내가 자고독을 풀었다. 마교가 만든 독으로 죽으니 순리에 맞는 것이 아니겠느냐?”

경정은 죽은 칠혈이 만든 자고독을 이 구덩이의 곳곳에 풀어 놨다.

그녀가 하신을 잡기 위해 준비한 한 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신은 어렵게 떨쳐버린 자고독의 저주에 다시 걸리게 될 줄 몰랐는지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내가 너를 그토록 아껴주었는데. 모두 헛일이었구나.”

“닥쳐라. 내가 언제 너에게 나를 아껴달라고 사정했느냐? 너 혼자 황제 놀이에 빠져서 후궁들을 제 마음대로 했으면서!”

“정녕 모르는 것이냐? 나는 너를 다른 후궁과 다르게 대했다.”

“그래서 무공을 쓰지 못하게 무영독을 써서 뇌옥에 가둔 것이냐? 마두라 그런지 아껴준다는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사뭇 다르구나.”

그때 하신이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경정은 하신과 더는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경정은 허리춤에 매어놓은 연검을 펼쳤다.

하신은 경정의 연검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경정이 손에 들고 있는 연검은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검병(劍柄)에 홍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고정엽이 홍아의 홍(紅)과 정엽의 엽(燁)을 합쳐서 검의 이름을 홍엽이라 지어준 것이었다.

하신은 여인의 연검을 황제가 만들어 준 것임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경정은 단칼에 하신의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하신은 눈을 감았다.

‘죽음을 직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인가? 그래. 잘 생각했다.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네게는 지옥이 더 어울리는구나.’

경정의 연검이 허공을 갈랐다.

“하신.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연검의 검날이 하신의 목에 닿은 그 순간, 갑자기 하신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폭발하며 검이 부러졌다.

‘우르르. 쾅!’

굉음과 함께 경정의 몸이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차라리 더 멀리 날아갔다면 좋았을 텐데 구덩이가 넓지 않아 폭발의 여파가 그대로 경정에게 덮쳐 왔다.

‘안돼. 내 아이!’

경정은 즉시 호신강기(護身罡氣)를 둘러 그녀의 배와 상체를 보호했다.

호신강기를 배에 집중하느라 노출된 하체가 폭발에 휘말려 다리에 상흔이 생겼다.

‘말도 안 돼. 이렇게나 강해졌다고?’

경정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엄청난 내공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초절정에 진입한 고수였으나 무영독을 체내에서 몰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내공의 순환이 자유롭지 못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기의 폭발이 드디어 잦아들었고 구덩이 안이 고요해졌다.

경정은 여전히 호신강기를 두른 채 생각했다.

‘도망쳐야 한다. 이곳은 위험해.’

그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신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과도 같았다.

경정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감싼 호신강기를 하체로 모두 돌리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녀가 익힌 구운보는 도망치라고 만든 신법이다.

경정이 미친 속도로 내빼자 어둠 속에서 하신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흙먼지를 해치고 밖으로 걸어 나오는 하신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등이 굽고 목도 삐딱했으며 서 있는 자세도 어정쩡했다.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으나 지금 하신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경정이 도망친 곳을 노려보더니 이내 공중으로 솟구쳐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

경정은 절벽을 오르며 배를 움켜쥐었다.

“아프구나. 배가 너무 아프다.”

경정은 배를 잡은 손으로 쉴 새 없이 내공을 쏟아냈다.

내공을 쏟아붓자 그녀를 괴롭히던 고통이 서서히 사라졌다.

백악도의 정상에 올라간 경정은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안개로 덮여 있었으며 끝이 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경정은 허리가 아파서 계속 서 있기 힘들었다.

그녀는 정상에 핀 나무의 잎사귀를 모아 그 위에 앉았다.

“큰일이다. 내가 안배한 모든 것들이 다 수포가 되었어. 놈은 영약을 먹고 강력한 내공을 얻었는데 나는 원래의 힘을 다 찾지 못했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섬에는 그녀가 하신을 잡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 많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경정은 방금 구덩이 안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기의 폭발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수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놈을 죽일 수 있을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토록 절망감을 느낀 것은 회귀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동안 겪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절대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기도 없구나. 진짜 사면초가네.”

경정은 이번에도 부서져 버린 연검을 떠올리며 어이가 없었다.

“폐하. 주신 연검이 부러졌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연검을 쓸 팔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정은 씁쓸하게 웃으며 품 안에서 비녀와 팔찌를 꺼냈다.

소혜자가 연검과 함께 가져온 물건들이었다.

경정은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고 비녀를 꼽았다.

그리고 팔찌를 매만졌다.

“귀한 곤철로 비녀와 팔찌를 만들라 명을 내리시다니. 폐하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그런데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경정이 갑자기 멈칫했다.

그녀는 팔찌 안쪽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뭘까?”

경정은 팔찌를 빼서 안을 자세히 살폈다.

철로 만들어진 단순한 모양의 팔찌는 이상하게도 안쪽에 조그만 구멍이 있었다.

“연검을 만든 장인이 만든 팔찌가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어.”

순간 경정의 눈이 번뜩였다.

그녀는 머리에 꽂은 비녀를 뽑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제아무리 비녀라지만 끝이 너무 날카롭잖아.’

경정은 혹시나 하면서 팔찌 안쪽에 난 구멍에 비녀를 찔러 넣었다.

그러자 ‘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비녀의 꽃장식이 열리고 팔찌가 두 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경정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것이었나? 이것도 병기였던 거야?”

경정은 우선 열린 비녀의 장식을 살폈다.

꽃장식 안에는 작은 구슬이 다섯 개 들어 있었는데 경정은 그것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것은 폭뢰(爆雷)가 아닌가?”

폭뢰는 군대에서 쓰는 물건으로 작은 통에 화약을 채워놓고 던져 폭발을 일으킬 때 쓰는 물건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원래 쓰던 폭뢰를 구슬 모양으로 작게 계량한 것이었다.

“군기창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 비녀 안에 들어 있다니.”

이번에는 두 개로 갈라진 팔찌를 확인했다.

팔찌의 끝에 갈고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팔찌를 차고 사람을 치면 갈고리에 얼굴이 뜯겨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걸 이렇게 쓸 수도 있을까?”

경정은 팔찌를 양팔에 채우고 두 손을 겹쳐 보았다.

그러자 갈고리가 서로 꽉 물려 힘을 줘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렇게 쓰면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겠구나.”

경정이 장신구의 비밀을 알아낸 그때였다.

절벽 아래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