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화 (239/251)

질긴 악연

하신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지금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 위에서 눈을 뜬 것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코끝을 스치는 짠 바닷냄새가 느껴졌다.

하신은 머리가 아파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일어나 주위를 돌아봤다.

그런데 갑판 위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뱃사람들이 끔찍하게 당해 오체분시 된 채로 죽어 있었다.

시체를 본 하신의 머릿속이 밝아졌다.

‘환골해신초(換骨解筋草). 그렇구나. 이제야 기억이 난다.’

약초를 먹고 황궁을 떠난 하신은 백귀비가 남긴 핏자국을 따라 유안문을 지나 찰강에 도착했다.

그는 문해가 준비한 배를 타고 그녀가 포구를 떠난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배를 사서 여인을 뒤쫓았다.

문제는 배가 뜬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졌다.

급하게 먹은 환골해신초의 영향이었을까?

하신은 쓰러졌고 닷새가 넘게 혼절해 있다가 지금에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신은 몸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몸이 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모두 뚫려 있었고 단전에도 양을 가늠하기 힘든 내공이 쌓여 있었다.

‘성공했구나. 나의 도박이 성공했어.’

내공을 되찾자 하신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보아하니 내가 환골탈태를 겪으면서 폭주했구나. 그러니 배가 이리 된 것이겠지.’

하신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미쳐 날뛰는 하신에게 오체분시 당해 죽은 불쌍한 백성들이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하신의 섬뜩한 목소리가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너희들은 신마교의 첫 번째 순교자다. 너희들의 희생은 값진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

이곳은 백악도(白嶽島).

사시사철 희뿌연 안개가 끼어 섬이 온통 흰색으로 보인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돌섬이다.

풀뿌리 한 포기조차 나지 않는 돌섬인 백악도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돌산이 있었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으로 만들어진 산은 섬의 이름과 같은 백악산이었다.

이틀 전에 섬에 도착한 경정은 적안과 묵인회 놈들에게 시켜 배에 실린 보물을 모두 섬으로 옮기라 명했다.

그리고 이틀 동안 그들을 알차게 굴렸다.

이틀 내내 잠도 자지 못하고 경정이 시킨 일을 해야 했던 살수단은 지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경정은 지금 그들이 만든 나무판자 집에 앉아 있었다.

판자 집의 작은 마당에는 묵인회가 조신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너희들은 가도 좋다. 당장 섬을 떠나라.”

경정이 떠나라고 하자 몇몇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알아듣지 못한 이들에게 독순술을 아는 이들이 설명해주자 모두가 눈이 똥그래져서 경정을 바라봤다.

“적안. 배에 있는 식량은 다 내렸겠지?”

경정이 묻자 적안이 급히 바닥에 글자를 썼다.

[예.]

“그럼, 됐구나. 이제 볼일 없으니 그만 가봐라.”

[진짜 가도 됩니까?]

적안과 묵인회 살수들은 반가워하면서도 뭔가 께름칙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 혼자 남겠다니 저 여인이 미친것은 아닌지 심히 궁금했다.

“싫은가? 그럼, 여기서 일이나 더 하고 갈래?”

[아. 아닙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적안이 놀라 일어서니 그의 수하들도 따라서 일어섰다.

경정은 부리나케 도망치는 적안 일당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즉시 배로 달려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섬을 떠났다.

경정은 파도를 가르며 섬에서 멀어지는 배를 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쯧쯧. 지옥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있네. 놈들은 죽어 마땅한 자다. 하지만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지. 아이를 가진 어미로서 어찌 함부로 살생을 하겠어.”

경정은 적안과 묵인회 살수들을 마지막까지 알차게 써먹을 참이었다.

그들이 바로 하신을 유인할 미끼인 것이다.

경정은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틀 만에 뚝딱 만든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집이었다.

“기술이 있으면 일해서 먹고 살 생각을 해야지. 못된 놈들 같으니라고.”

***

이곳은 건청궁.

고정엽이 돌아온 지 하루도 안 되어 모든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사라졌던 태후와 황후가 돌아왔고 종수궁에서는 가짜 황후의 인피면구가 발견되었다.

또한 가짜 황후의 밀서를 받아 황궁에 사병을 밀고 들어왔던 도철과 가성규의 잔당도 사로잡혔다.

도철을 잡는 데 크게 일조한 것은 다름 아닌 백귀비의 친우인 북해빙궁의 위라서와 빙각의 나설희였다.

사람들은 강호인이 고관대작인 도철을 사로잡은 사실을 듣고 매우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백귀비의 강호 친구이며 고위성을 구한 은인 임이 밝혀졌고 아무도 그들을 추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아직 남은 문제가 있었다.

사라진 두 여인 때문이었다.

가짜 황후와 뇌옥에 갇혀 있던 백귀비가 그들이었다.

고정엽은 용포를 벗고 대신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황제가 강호인의 복장을 하자 고위성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폐하.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양왕.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요? 소신이 들어드릴 수 없는 허무맹랑한 말씀은 하지도 마십시오.”

고위성은 고정엽이 무엇을 하려는지 예상하고 있었다.

“폐하. 혹시 백귀비 마마님을 찾으러 가실 작정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역당의 무리가 잡혔고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이 돌아오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궁이 어수선하니 이곳을 지키셔야지요.”

“그러니 양왕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나 대신에 황궁을 살펴 주세요.”

고위성은 굳은 고정엽의 눈빛을 보고 그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그때 건청궁 안으로 풍죽오우 네 사람이 들어왔다.

황릉에 오지 못한 무림 맹주 벽서온까지 합류하여 풍죽오우 다섯 사람이 오랜만에 다시 모였다.

그들을 안내한 사람은 금의위 엄세록.

그리고 뒤따라오는 이들은 이름은 모르지만 새하얀 머리를 휘날리는 노회한 고수 두 명.

마지막으로 고위성을 위험에서 구해준 위라서와 나설희까지.

고정엽은 고위성의 답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하루빨리 사라진 경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럼, 황궁을 부탁합니다.”

고정엽은 말을 마치고 그의 강호인 친구들과 함께 건청궁을 빠져나갔다.

고위성은 사라진 고정엽과 강호인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고정엽. 이 자식이. 역모에 엮여서 죽을뻔했던 형님을 이렇게 부려 먹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고위성이 욕을 하자 소혜자가 다가와 간언했다.

“전하. 이곳은 황릉이 아니니 말씀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소혜자의 말에 고위성이 놀라 주위를 돌아봤다.

다행히 들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고맙다. 소혜자야.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그나저나 내가 어찌해야 할지 통 모르겠구나.”

고위성이 한탄하자 소혜자가 나섰다.

“전하. 우선 금의위에게 일러 황궁의 수비를 강화하라고 하시지요. 또한 궁을 출입하는 자들을 제한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고위성은 놀란 눈으로 소혜자를 돌아봤다.

오늘따라 소혜자의 눈이 이렇게 총명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무얼 하면 될까?”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께 가셔야지요. 놀란 두 분 마마님을 안심시켜주셔야 할 것입니다.”

“오. 소혜자야.”

고위성은 그제야 깨달았다.

‘부처님의 말씀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소혜자의 말만 들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진짜였잖아.’

***

적안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두려워서 몸이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체내에 들어간 독 때문에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몸은 냉증에 걸린 것처럼 떨려왔다.

하신은 선실을 모두 돌아보고 다시 갑판 위로 올라왔다.

배의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문해를 시켜 빼돌린 막대한 황궁의 보물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백귀비는 이미 도망갔군. 하긴 총명한 여인이니 배 안에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적안은 웃는 하신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이 배에 탔던 여인은 어디에 있지?”

하신이 물었으나 적안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하신은 무표정한 얼굴을 검을 꺼내 들어 적안의 오른손 엄지를 잘라냈다.

이미 독에 중독된 상태지만 손가락이 잘린 괴로움이 더해져 적안은 미칠 것 같이 괴로웠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적안이 입을 열지 않자 하신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사람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합치면 열 개다. 왜 그런지 아느냐?”

“...”

“너처럼 입이 무거운 자를 고문할 때 쓰기 좋거든. 하나씩 잘라내다 보면 언젠가는 실토할 것이다. 그러니 힘빼지 말고 지금 말하라.”

적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눈앞의 사내는 정말로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조리 잘라내고도 남을 미친놈이었다.

하신이 검을 들자 적안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이겨내며 잘린 손가락을 들었다.

적안이 움직이자 하신의 검도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는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바닥에 뭔가를 썼다.

하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읽기 위해 그림자를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적안의 피로 쓴 글자가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백악도]

***

경정은 다시 한번 섬을 돌아보며 예행 연습을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섬을 돌며 하신과 싸우는 연습을 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하신이 내게 환골해신초를 구할 수 있다고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경정은 지난날 하신이 뇌옥에 와서 그녀를 회유하며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그런데 하신. 궁금한 것이 있다. 신마교를 대체 어찌 세울 작정이냐? 평생 무공을 모르고 산 사람의 몸으로 어떻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마교 교주가 되겠느냐?]

[나를 떠보는 것이냐? 내게 정보를 알아내고 도망치려고?]

[무영독에 중독이 되었는데 내가 어디를 갈 수 있겠어? 말하기 싫으면 말든지.]

[무영독은 만능이 아니다. 독을 바른 구속구를 풀고 시간이 지나면 내공이 차츰차츰 돌아올 것이다.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구속구를 풀어주지 않을 거잖아.]

[그래. 맞다.]

[쳇. 그럴 줄 알았다.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대체 어찌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경정이 끈질기게 묻자 하신은 결국 손을 들었다.

경정이 그의 제안에 거의 넘어왔다고 여긴 탓이었다.

[환골해신초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환골해신초?]

경정은 눈을 크게 떴다.

무림맹 사서로 보낸 시간이 자그마치 칠 년이다.

어찌 환골해신초를 모르겠는가?

하신은 경정의 표정을 읽고 그녀가 그 약초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역시 백귀비는 대단하구나. 환골해신초까지 알고 있다니.]

[네가 무공을 익히지 않는 몸인 것은 맞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 환골해신초는 근골이 완성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복용하는 것이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것이냐?]

[네놈이 환골해신초를 먹고 죽으면 이 구속구는 누가 풀어주느냐? 나는 지금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하신은 화를 내는 경정을 보며 웃었다.

경정은 웃는 하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오늘은 그만 가봐야겠구나.]

[벌써 가려고? 설마 환골해신초를 벌써 구한 것이냐? 그런 것이야?]

경정이 물었지만, 하신은 대답하지 않고 뇌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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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경정의 표정이 굳었다.

“하신이 환골해신초를 먹고 부작용으로 죽으면 좋을텐데.”

하신이 죽으면 모든 일은 끝이 난다.

그렇기에 경정이 가장 원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 최악은 하신이 환골해신초를 먹고 내공을 얻는 것이다. 그럼, 문제가 복잡해진다.”

경정은 몇 번이나 인생의 위기를 이겨낸 하신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자고독도 그를 죽이지 못했고, 검으로 놈의 머리통을 잘라내도 영혼을 옮겨가며 살아남은 자가 하신이다.

“설마 세 번이나 마두의 목숨을 살려주시지는 않겠지?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분께서 그놈에게만 관대하실 리가 없잖아.”

그때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울 소리를 들은 경정이 놀라 일어섰다.

그녀는 적안과 살수단을 시켜 해안선에 가느다란 실을 설치하게 했다.

근처에 배가 들어오면 이 나무판자 집에 매달린 방울이 울리는 것이다.

“마두가 왔구나.”

경정은 굳은 얼굴로 허리춤에 찬 연검을 쓰다듬었다.

“하신이 성공했을까? 아니면 실패했을까?”

경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되든 상관없다. 너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았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죽이고 이 질긴 악연을 끝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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