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건청궁 안에 이런 밀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몰랐는지 태후는 대경실색했다.
“백귀비.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태후 마마. 이곳은 폐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밀실이옵니다.”
“밀실이라고?”
“황자의 난을 기억하십니까? 태후 마마?”
경정이 황자의 난을 언급하자 태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당시 8황자 일당이 궁 안에 기술자를 들여 만들어놓은 것을 폐하께서 해체하지 않고 밀실로 쓰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민한 경정의 귀가 움직였다.
바깥에서 무공을 익힌 자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경정은 마음이 급해졌다.
“태후 마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데려온 신의가 함께 밀실로 들어가 황후 마마님을 치료할 것입니다.”
경정은 누워있는 황후를 업고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경정의 눈빛을 읽은 당소소와 강하연이 함께 태후를 부축하여 밀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다행히 밀실 안에는 침상도 있었고 당분간 숨어 지낼만한 물건들이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경정은 침상 위에 황후를 눕히고 태후를 돌아봤다.
“태후 마마. 역적의 무리가 황궁 안에 들어왔으니 이곳에 몸을 숨기십시오.”
경정은 건청궁에 들어오자마자 챙겨 놓았던 것을 꺼내 태후에게 바쳤다.
그것은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옥새였다.
옥새를 본 태후는 긴장했다.
황궁을 피로 물들었던 황자의 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경정은 바깥의 상황이 걱정되어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경정이 밀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누워있던 황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백··· 백귀비.”
“황후 마마.”
“어딜··· 가려고 그러는가?”
“황후 마마. 여기 계신 신의께서 황후 마마님을 치료해 주실 것이옵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입술을 달싹거릴 힘도 없는 황후였지만 그녀는 경정의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백귀비. 위험하네. 가지 말게.”
“제가 저들의 시선을 돌릴 것입니다. 이곳은 안전하니 저를 믿어 주십시오.”
황후는 안 된다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태후도 와서 말렸다.
경정은 그들이 걱정하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었으나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태후 마마. 황후 마마. 사실 저는 강호인입니다. 밖에 있는 누구도 저를 해칠 수 없습니다.”
“백귀비. 지금 뭐라고 했는가?”
태후는 물론이고 정신을 온전히 차리지 못한 황후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는 한번 보여드리는 편이 낫겠지.’
결심한 경정은 밀실 안에 준비되어 있던 검을 꺼내 들어 내공을 분출했다.
그러자 차가운 쇠로 된 검신(劍身)이 부르르 떨리며 주위에 빛이 쏟아졌다.
태후와 황후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
황후는 경정과 함께 무림맹에 놀러 가서 무인들의 대결을 지켜봤으니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뿜어내던 기운이 지금 백귀비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정은 당소소와 강하연에게 다가가 몰래 쪽지를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마님?”
“이 밀실의 바닥을 뜯으면 황궁 남문으로 가는 비밀 통로가 나오네.”
“비밀 통로라고요?”
“당장은 황후 마마님을 치료해야 하니 건청궁에 숨어 있게.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 이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때는 비밀 통로를 통해 궁 밖으로 나가야 하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신의께서 알고 계실걸세.”
당소소와 강하연은 두려움이 앞섰다.
경정은 그들의 손을 꼭 잡고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만 믿네.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을 잘 모시게.”
당소소와 강하연은 무서웠지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고맙네.”
경정은 이 말을 끝으로 곧장 밀실을 빠져나갔다.
***
금의위 송범한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철이 데리고 온 일천의 병사와 가성규가 데리고 온 이천의 병사가 건청궁 앞의 넓은 공터에 도열했다.
부재중인 황제 폐하 대신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황후가 궁 문을 열라고 명을 내렸고 그들이 병사를 데리고 황궁 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송범한은 조금 전까지 앓아 누워있던 황후가 언제 몸이 나아 이런 명을 내린 것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후는 지금 병사들의 뒤에 제단처럼 높은 가마를 대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병사들을 호령하는 장군처럼 보였기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송범한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그때였다.
건청궁의 문의 열리며 누군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어젯밤 황후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썼던 백귀비였다.
백귀비는 건청궁에 내리는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맞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멈춰선 경정은 도철과 가성규를 보며 일갈했다.
“감히 사병을 데리고 건청궁까지 밀고 들어오다니. 네놈들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이것이 역적이나 할 행동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졸지에 역적이 돼버린 도철과 가성규가 백귀비를 노려봤다.
흥분한 가성규가 나서려는데 도철이 그를 막고 앞으로 나섰다.
“백귀비 마마님이 아니십니까?”
도철이 이죽거리며 다가오자 경정은 미간을 좁혔다.
“서하공주님의 죽음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더니 이제 보니 공주님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역모를 꾀하고 있었구나.”
도철은 분노하여 눈이 시뻘게졌다.
“공주님의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요녀야! 네가 모든 일의 원흉이로다.”
“무엄하구나. 나는 폐하께서 책봉하신 귀비다.”
“너는 요녀가 분명하다. 네가 내명부에 들어온 이후부터 계략과 암투가 난무하더니 후궁 마마님들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공주께서는 내명부의 싸움을 중재하시려고 입궁하셨다가 횡액을 당하신 것이로다. 알겠느냐?”
“억울한 죽음이라고? 죄인 희빈이 죽은 것이 그리 억울하더냐? 희빈은 다른 후궁을 음해하였기에 즉결 처분을 받은 것이다.”
경정이 그날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자 도철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입 닥치거라! 요녀야!”
가마 위에 앉아 있던 황후는 백귀비와 도철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가 손을 들었다.
경정은 황후의 모습을 한 여인을 노려봤다.
‘하신. 네놈이냐? 가짜 어의를 만들어내더니. 이번에는 가짜 황후 노릇을 하려고?’
경정은 소매 안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매만지며 황후의 앞으로 걸어갔다.
‘기회를 노려 단숨에 하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 무공을 못 하는 가귀인의 몸에 들어왔으니 절대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병사들을 보고 있자니 경정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무공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궁에서 쫓겨나게 되겠지?’
경정은 황릉에서 치료 중인 황제를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하신은 죽여 없애야 한다. 반드시.’
그때 가짜 황후가 입을 열었다.
“백귀비는 황후인 나를 독살하려다 실패했다. 악독한 귀비를 이대로 둘 수 없으니 당장 사로잡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황후가 명을 내리자 도철과 가성규가 데리고 온 병사들이 검을 들고 외쳤다.
“존명!”
“존명!”
지켜보고 있던 송범한과 금의위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함께 발검하여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병사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자 경정은 도약하여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일장(一丈, 약 삼 미터) 높이까지 뛰어오르자 병사들이 경악했다.
경정은 그들이 손에 든 창을 사뿐히 즈려밟고 허공을 건너 황후에게 날아갔다.
“황후 마마님을 보호하라!”
“황후 마마님을 보호하라!”
송범한이 명을 내렸고 금의위가 황후의 가마를 둘러싸고 검을 내밀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던 경정은 빙하장을 분출하여 가마를 에워싼 금의위의 발과 검을 동시에 얼려 버렸다.
갑자기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송범한이 놀라 눈을 치켜떴다.
‘이것은 빙공(氷功)이다. 백귀비 마마께서 어찌하여 무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송범한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정말로 귀비 마마께서 황궁에 숨어든 요녀란 말인가?’
송범한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백귀비의 엄청난 내공을 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경정은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 가짜 황후에게 달려들었다.
“네 정체를 드러내라. 마두야!”
경정의 비수가 황후의 바로 코앞까지 당도한 일촉즉발의 상황.
무공을 전혀 못 하는 가귀인의 몸에 들어간 하신이었으나 그는 비수가 코앞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런 동요 없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가마 위에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무언가 불안한 예감이 경정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활은 시위를 떠났다.
경정이 조금만 손을 더 뻗으면 비수가 가짜 황후의 심장을 찌를 수 있을 터였다.
경정이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은 그때였다.
황후가 앉아 있던 제단같은 커다란 가마가 폭발하며 그 안에서 흑의인이 튀어나왔다.
흑의인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문해였다.
그들은 가마에서 뛰쳐나오자마자 천망(千網, 쇠로 만든 그물)을 펼쳐 경정을 휘감았다.
경정은 그녀를 덮치는 천망을 보고 즉각 비수에 내공을 휘감아 휘둘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물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요녀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천망을 더 던져라.”
“존명!”
문해는 수하들을 시켜서 천망을 연달아 던졌고 경정은 그물 속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큰일이다. 연속천추(連續千鈞)로 만든 천망이었구나. 이 검으로는 벨 수 없다. 어쩌면 좋지?’
순간 경정의 눈이 번뜩였다.
그물을 꽁꽁 얼려 깨트려버리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경정은 즉시 비수를 버리고 빙하장을 끌어 올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해도 단전에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경정은 그제야 이 모든 것이 하신의 계략임을 깨달았다.
‘천망에 내공을 무력화시키는 무영독(無影毒)을 발랐구나. 내가 공격할 거라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야.’
경정은 하신이 무공을 못하기 때문에 쉽게 제압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하신은 그렇기에 이중 삼중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도철과 가성규를 이용해 병사를 황궁에 들인 것도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한 도구였다.
문해가 달려가 황후를 부축했다.
황후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천천히 백귀비 앞으로 걸어왔다.
쇠로 만든 그물은 겹겹이 쌓아 올려 여인의 허리까지 닿았다.
아마 그 안에 갇힌 백귀비는 지금 빛도 보지 못하리라.
경정은 천망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고 그물로 만든 산이 조금씩 움직거렸다.
황후는 비웃음을 흘린 채 문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문해는 황후의 손에 호리병을 건넸고 황후는 뚜껑을 열어 액체를 그물 안에 흘려보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수상한 액체를 그물 안으로 흘려보내자 이내 발악하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하신은 호리병을 내던지고 섬뜩한 미소를 흘렸다.
그때 건청궁을 살피고 돌아온 도철과 가성규가 황후의 앞에 당도했다.
“황후 마마. 건청궁을 뒤져 보았으나 태후 마마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신은 태후와 진짜 황후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뒷방 늙은이와 독에 중독된 여인이 그에게 위협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황후의 모습을 한 지금,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백귀비를 문초해 보면 알 것이다.”
“황후 마마. 당장 이 요녀를 끌고 가서 죄상을 모두 토해내게 할 것입니다. 맡겨주십시오.”
복수심에 불타는 도철과 가성규가 백귀비를 끌고 가려고 하자 황후가 손을 들었다.
“너희는 옥새를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옥새라고요?”
“폐하께서는 황릉에 가 계시는데 백귀비만 혼자 왜 이곳에 와 있었을까? 아무런 의심도 들지 않더냐?”
순간 도철과 가성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릉에 계신 폐하께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너희들은 당장 황릉에 병사들을 보내고 사라진 옥새도 찾아내라.”
“그렇다면 더욱 백귀비의 입을 열어야겠군요. 소신이 귀비를 감옥에 가두고 호되게 고문 할 것입니다.”
도철의 말에 황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자신이 말실수했나?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귀비는 내명부의 후궁이다. 내명부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희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황후 마마.”
도철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황후의 눈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도철은 그녀의 살벌한 눈빛에 기가 질려 입을 다물었다.
황후는 그들을 뒤로하고 문해에게 명을 내렸다.
“죄인 백귀비를 뇌옥에 하옥해라.”
“예. 황후 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