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제자리로
다행히 여린 꽃잎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고고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경정은 선연화의 뿌리가 다칠까 봐 두려워 화분을 통째로 손에 들었다.
“가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두면 꽃이 시들어 죽을 것이다. 내가 가져가서 폐하를 치료하는데 쓰는 것이 옳다.”
경정은 화분을 챙기고 익곤궁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소이자가 환하게 웃으며 경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받아라. 소이자.”
경정이 화분을 건네자 소이자는 광대를 씰룩거리며 그것을 받아 챙겼다.
“너는 아침 일찍 황궁을 빠져나가라. 궁 밖에서 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이것을 넘기면 된다. 그럼, 경이 알아서 신의님께 전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이자가 계속 웃자 경정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는 것이냐?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사람처럼?”
“소인이 그랬습니까?”
“그렇다. 지금도 보아라. 입꼬리가 하늘을 찌르고 광대는 터질 것 같구나.”
“마마님이 무사히 돌아오셔서 그런가 봅니다.”
“그간 네가 나 때문에 당하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고생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경이와 주언 형님을 보내서 소인을 지켜주시지 않았습니까? 어느 주인님이 환관 나부랭이를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겠습니까? 소인은 마마님 밖에 없습니다.”
소이자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는 선연화 화분을 나무 상자에 고이 넣고 그것을 수레에 실었다.
“그런데 소이자야.”
“말씀하십시오. 마마님.”
“가귀인의 상황은 어떠하더냐? 죽었는가?”
“죽다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귀인께서는 지금 내의원에서 치료 중이십니다.”
“내의원? 감옥이 아니라?”
“감옥이라니요?”
냉궁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소이자는 경정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경정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가귀인의 마지막 모습은 하신에게 참수형을 받아 처참한 모습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그런 가귀인이 아직도 살아있다니 놀라웠다.
“가귀인이 어째서 살아있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황궁에 자객이 들었던 날, 냉궁 앞에서 가귀인께서 발견되셨다고 합니다.”
“냉궁 앞에서?”
“그때 냉궁에서 엄청나게 큰 폭발음이 들려서 달려가 보니 그 앞에 쓰러져 계셨다고 합니다.”
경정은 가귀인이 냉궁 앞에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에 미간을 찌푸렸다.
‘감옥에 있어야 할 가귀인이 어째서 냉궁 앞에서 발견된 것일까?’
그때 소이자가 뭔가를 기억해내고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 밤, 황궁 감옥 앞에서 동창 시위 한 명이 뭔가에 찔려 사망했다고 합니다. 황궁에 들었던 자객에게 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고 하는데. 이 일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요?”
“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경정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가귀인이 동창을 찌르고 냉궁으로 도망쳤다가 환혼주의 폭발에 휘말렸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래서 가귀인이 지금 내의원에 있다는 것이냐?”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다가 어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람이 아닌 식물처럼 자리에만 가만히 앉아 계신다는군요. 참으로 무섭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가귀인이 살아있다면 곧 익곤궁으로 돌아오겠구나. 내가 미리 오길 잘했어.”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 늦었으니 어서 청초각으로 돌아가자꾸나.”
경정이 가자고 하자 소이자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밤에 들리실 것이니 미리 가서 준비해야겠지요.”
“시끄럽다. 이놈아!”
경정은 소이자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고는 청초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초각으로 돌아가며 그녀는 생각했다.
‘기억을 잃고 말도 못하다니. 뭔가 수상하다. 가귀인이 벌을 받지 않으려고 술수를 부리는 것일까?’
경정은 갑자기 기억을 잃은 가귀인이 수상했다.
그녀의 촉이 말해주고 있었다.
‘뭔가 있다. 가귀인이 돌아오면 확인해 봐야겠어.’
***
이곳은 종수궁.
오랜만에 종수궁에 후궁들이 다 모였다.
황후와 함께 황릉에 다녀온 강하연이 들어오자 후궁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강귀인 마마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군요. 강귀인 마마님.”
강하연은 갑자기 친한척하며 달려드는 후궁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때 가귀인과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육소의와 진소의가 강하연을 그들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곳은 평소에 가귀인이 앉던 자리였다.
“왜들 이러십니까? 이곳은 제 자리가 아닙니다.”
“이곳이 볕도 잘 들고 좋은 자리이니 여기에 앉으시지요.”
“원래 이 자리에 앉으시던 가귀인 마마님은 어디로 가시고요?”
강하연이 가귀인을 거론하자 육소의와 진소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귀인 마마께서는 몸이 아프셔서 당분간 문안 인사에 참석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강귀인께서 마음 편히 이곳에 앉으시지요.”
육소의와 진소의는 가귀인이 실어증에 걸려 내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강하연에 들러붙기로 했다.
제아무리 가문이 막강한 가귀인이라 할지라도 병을 얻었으니 앞으로 폐하의 총애를 얻기란 어려울 것이었다.
그에 반해 강귀인은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을 따라 황릉에 따라 갈 정도이니 그들이 기대기 좋은 상대였다.
강하연은 날파리 같은 육소의와 진소의를 떼어 놓고 싶었다.
그녀가 거절의 말을 생각하는데 궁 안으로 백귀비가 들어왔다.
“백귀비 마마님. 납시오.”
경정이 들어오자 후궁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경정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똑같이 단정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강하연이 경정을 보고 반가워서 일어서려고 하자 육소의와 진소의가 강하연의 손을 붙잡았다.
“강귀인 마마님. 가지 마시고 여기에 그냥 계시지요.”
그들은 강하연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강귀인 마마께서 황릉에 가셨을 때 큰일이 있었습니다.”
“큰일이라고요?”
“그동안 백귀비 마마께서 냉궁에 유폐되셨습니다.”
“뭐라고요? 냉궁이라고요?”
강하연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백귀비가 어째서 냉궁에 유폐되었다는 것인가?
“죄인이 냉궁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귀비 마마님을 향한 불미스러워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럴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강하연은 그녀를 잡는 육소의와 진소의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놓으십시오.”
날파리를 떼어놓은 강하연이 경정에게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경정의 옆에 앉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주위는 썰렁했다.
경정은 귀를 열고 육소의와 진소의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와 준 강하연이 참으로 예쁘게 보였다.
“강귀인 마마. 오셨습니까?”
“마마님. 괜찮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으시지요?”
“그럼요. 저는 평소와 똑같습니다.”
경정은 강하연을 달래며 뒤에 서 있는 육소의와 진소의를 째려봤다.
경정이 살기를 담아 쳐다보니 그녀들은 대경실색하여 의자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육소의와 진소의가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황제와 황후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후 마마. 납시오.”
고정엽은 황후와 함께 들어오며 경정과 눈빛을 교환했다.
황후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육소의와 진소의를 보며 놀라 물었다.
“육소의와 진소의는 어찌하여 그러고 있는 것인가? 폐하께서 보고 계시니 어서 일어서게.”
황후가 꾸짖자 육소의와 진소의가 놀라 벌떡 일어섰고 서로의 치마를 밟고 몸이 휘청거렸다.
“어머나! 육소의 발을 치우세요!”
“진소의. 뭘 하는 겁니까? 에구머니나!”
육소의와 진소의가 서로를 떠밀다가 다시 볼썽사납게 엎어지자 황후는 물론이고 고정엽도 그녀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육소의와 진소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
이곳은 익곤궁.
궁으로 돌아온 가귀인이 텅 빈 궁을 바라봤다.
황제가 가귀인에게 참수형을 내린 일은 없던 일이 되었다.
고정엽은 냉궁에 갇힌 경정을 괴롭힌 가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미웠으나 그렇다고 후궁에게 참수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가귀인에게 참수형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궁 안에서 아주 일부만 알고 있었다.
고정엽은 참수형 대신에 가귀인에게 익곤궁에서 요양하며 자중하라 명을 내렸다.
결국 그녀는 익곤궁에 유폐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귀인은 아무도 없는 궁에 들어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궁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가귀인이 사라지자 도망쳤던 소녕이었다.
가귀인의 아버지인 가성규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고 궁 안에 숨어있던 소녕은 가귀인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익곤궁으로 달려온 것이다.
“마마님. 정말로 마마님이시군요.”
소녕은 멀쩡히 살아있는 가귀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소녕은 가귀인의 발아래 무릎 꿇고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가귀인은 아무런 표정 없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마님. 괜찮으신 것입니까? 소인이 따뜻한 차를 올릴까요?”
“...”
가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녕은 걱정이 앞섰다.
“정말로 기억도 잃고 말도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마마님.”
소녕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가귀인이 입을 열었다.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소름 끼치도록 냉정한 가귀인의 목소리에 소녕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마님. 소인을 기억하십니까? 아니, 그것보다 이제 말씀을 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시끄럽다. 내가 꾀병이라는 것을 궁 안의 모든 이에게 알릴 참이냐?”
순간 소녕의 눈이 커졌다.
소녕은 그녀의 주인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닫았다.
“다시 묻겠다. 너는 궁을 비우고 어디를 갔다 온 것이냐?”
무섭도록 차분한 가귀인의 목소리에 소녕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운남에 계신 주인 나리께 도와달라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마님.”
“운남이라. 그래. 운남이 고향이었지.”
가귀인의 한쪽 입꼬리가 기묘하게 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궁 밖에 소식을 보내기 힘들었을 것인데 고작 시녀인 네가 어찌 소식을 보낼 수 있었지?”
“송구하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마님이 아끼시는 장신구를 가져가 궁 밖으로 나가는 환관에게 줬습니다. 그자가 저를 숨겨주기도 했고요.”
“그런 재주가 있었구나.”
가귀인이 웃자 소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가보아라. 나는 쉬어야겠다.”
“마마님. 소인은······.”
소녕이 머뭇거리자 가귀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소녕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가라. 나는 같은 말을 두 번을 하는 것은 딱 질색이다.”
소녕은 화들짝 놀라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죄했다.
“예. 알겠습니다. 마마님.”
소녕이 나가자 가귀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침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곳은 도성의 입구.
문을 지키는 병졸이 졸린 눈을 비비고 앞으로 나섰다.
“왜 이리 늦었는가? 교대 시간은 좀 지키게.”
“아이고. 알았으니 그만 좀 떠들게.”
“자네 말이야. 또 백성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겼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일세.”
“알겠으니 그만 좀 떠드시오. 아침부터 그리 말을 많이 하면 배가 고프겠소이다.”
“어이구. 저 성질머리하곤.”
교대를 마친 병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떠났다.
남은 병졸은 속으로 코웃음을 지었다.
“봉급이 쥐꼬리만 한데 뒷돈을 안 받으면 어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답답하단 말이야.”
병졸은 오늘도 사람들이 소지한 통행증을 걸고 넘어질 참이었다.
돈 많고 멍청한 놈들을 잘 골라내면 오늘도 쏠쏠하게 벌 터였다.
그때 어떤 사내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병졸은 그의 초라한 의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사내는 날씨에 맞지 않는 얇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사내가 다가오자 병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통행증과 호패를 보여 주시오.”
“알겠네.”
사내는 품 안에서 호패와 통행증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남자가 건넨 호패를 본 병졸의 눈이 커졌다.
“금··· 금의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