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귀환
황제가 등장하자 소명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폐. 폐하······?”
소공공이 앞으로 달려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놀란 소명을 제치고 송범한 앞으로 나와 황제와 백귀비에게 예를 갖춰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백귀비 마마님을 뵙습니다.”
소명은 놀란 눈으로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피곤해 보는 것을 빼놓고는 그가 알고 있는 황제 고정엽이 분명했다.
주화입마는커녕, 오히려 경지가 상승했는지 황제에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까지 느껴졌다.
“소태감. 뭐 하고 있소? 어서 폐하께 예를 올리시오.”
송범한이 지적하자 소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백귀비 마마님을··· 뵙습···.”
소명은 백귀비를 보며 예를 올리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 놀라 멈추었다.
백귀비가 오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공을 익힌 황제보다 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경정은 밖에서 기다리며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들었다.
‘소명이 담이 작은 사내라 큰일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구나. 감히,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다니.’
경정은 낮에 당소소에게 선연화라는 꽃이 고정엽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제가 궁을 오래 비우면 안 되기에 어차피 돌아올 것이었는데 일정을 당긴 셈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소명이 이런 흉계를 꾸미고 있을 줄이야.
경정은 태후의 앞에 올려져 있는 호리병을 보고 코웃음을 지었다.
‘칠혈이 만든 독이로구나. 고작 저것으로 나를 옭아매려 했는가?’
태후와 황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황제와 백귀비가 귀환하자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황제!”
“폐하. 오셨군요.”
고정엽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자 소명과 송범한이 뒤로 물러섰다.
고정엽은 태후의 앞에 서서 예를 올렸다.
“태후 마마.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황제. 그만 예를 멈추고 이리 오시오.”
“예. 태후 마마.”
태후의 앞으로 다가간 고정엽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의 어머니를 바라봤다.
태후는 그의 아들이 예전과 똑같은 눈빛을 하자 안도했다.
그간 함부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다친 후 성정이 크게 변한 황제를 보며 가슴 졸였기 때문이다.
“황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말도 없이 궁 밖에 나갔던 것입니까?”
“궁에 침입한 자객의 무리를 쫓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고정엽은 태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모후(母后). 더는 강호인인 척 굴지 않겠으니 이번만 용서해 주시지요.”
태후는 고정엽이 예전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검을 들고 나선 것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중하시오. 황제. 대신들이 이 일을 알면 큰 사달이 날것이외다.”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니 믿어주십시오.”
고정엽이 태후에게 애교 섞인 눈빛을 보냈다.
태후는 다정한 아들로 돌아온 황제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소명은 태후의 분위기가 유해진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
‘큰일이로구나. 내가 백귀비 마마님께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는 것이 들통나고 말겠어.’
소명은 잔인한 황제가 그를 처벌할까 두려워 몸을 떨었다.
‘아니야. 내게는 독이 든 호리병이 남아있다. 그것은 내가 조작한 것이 아니고 백귀비가 청초각에 숨겨놓은 진짜 물건이니 이것으로 무마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소명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황후가 고정엽에게 다가와 말했다.
“폐하.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걱정하지 마시오. 황후. 그것보다 황후가 태후 마마님을 모시고 황릉에 갔다 왔었다지. 고생했소.”
고정엽의 말에 황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후와 황후를 황릉에 가도록 허락한 것은 황제인데, 어째서인지 그는 지금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황후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폐하. 백귀비와 함께 계신 것이었습니까?”
“그렇소. 내가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어찌 백귀비가 황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폐하.”
황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소명을 째려봤다.
“폐하. 방금 동창의 소태감이 이런 것을 들고 왔습니다. 청초각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합니다. 폐하께서 살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후는 독이 든 호리병을 고정엽에게 건넸다.
경정은 고정엽에게 즉시 전음을 보냈다.
[폐하. 그것은 제 것이 맞으나 제가 보관만 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
[풍도마가의 혈사자가 후궁으로 위장하여 궁에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만든 마교의 독입니다. 혹시나 하여 제가 청초각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소태감이 그것을 찾았나 보네요.]
[고얀 놈이로군.]
경정과 고정엽이 동시에 소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을 어떻게 무마시킬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던 소명은 두 사람의 눈빛을 받고 기겁했다.
고정엽은 소명에게 걸어오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태감. 이것이 무엇인가?”
“폐하. 조심하시옵소서. 호리병 안에 극독이 담겨 있습니다.”
“방금 독이라 하였는가? 무엄하구나. 어찌하여 이런 위험한 물건을 태후 마마께 올린 것이냐?”
고정엽이 화를 내자 소명이 놀라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신은 그런 뜻으로 가져온 것이 아니옵니다.”
“그럼, 무슨 뜻이 있어 이것을 태후 마마께 올린 것이냐?”
“황후 마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소신은 그것을 청초각에서 발견했사옵니다. 백귀비 마마께서 침전 안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저것을 꼭꼭 숨겨두고 계셨더군요.”
소명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백귀비를 향해 있었다.
‘후궁의 처소에서 독이 발견되었다. 절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터. 폐하께서 주화입마를 어떻게 이겨내셨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몸이 불편하실 테지. 그러니 독을 숨겨두고 있던 백귀비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소명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앞의 황제는 독을 숨긴 백귀비가 아닌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태감이 이것을 찾아냈다고? 백귀비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겼을 것인데 어찌하여 찾았는가? 청초각을 샅샅이 조사한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그. 그것이······.”
당황한 소명이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폐하. 냉궁에 갇힌 죄인이 자취를 감추었기에 청초각을 살펴본 것입니다.”
소명은 백귀비가 아닌 그에게 다그쳐 묻는 황제를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즉시 금의위를 끌어들였다.
“폐하. 동창이 홀로 벌인 일이 아니라 금의위와 함께 청초각을 조사한 것이옵니다.”
소명이 금의위를 거론하자 고정엽이 송범한을 보며 물었다.
“소태감이 방금 한 말이 맞는가?”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송범한이 말을 보태자 소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귀비.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예. 폐하.”
고정엽이 부르자 경정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고정엽은 눈앞의 여인을 살갑게 쳐다보며 호리병을 건넸다.
“내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숨기고 있으라 말했는데 어찌하여 들킨 것이냐?”
“송구합니다. 폐하. 숨긴다고 숨겼는데 들키고 말았습니다. 동창은 귀신도 잡는다더니 그 말이 맞군요. 폐하. 이제 신첩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지난번 연회에서 동창의 천태감이 희빈을 단칼에 죽인 것처럼 신첩도 그리되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것을 잘 가지고 있거라.”
경정은 고정엽이 건네는 호리병을 받아 그것을 소매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소명은 그것을 보고 놀라 대경실색했다.
태후와 황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었다.
“황제.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오? 독을 숨기라 명을 내린 것이 황제였다는 말씀이시오?”
태후가 묻자 고정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태후 마마. 강호에서 구한 귀한 독입니다. 이것으로 사람을 고칠 수도 있다 하였기에 백귀비에게 맡긴 것입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백귀비가 의술에도 정통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래서 청초각 뒤에 약초밭을 만들 수 있게 황제가 윤허한 것이 아니겠는가?”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태후 마마.”
“그저 오해에 지나지 않았구먼. 허허. 난 또 큰일인 줄 알았네.”
“모든 것은 아무 말도 없이 백귀비를 데리고 출궁한 제 탓이지요.”
“자책하지 말게. 황제. 지금이라도 일을 수습하면 그만이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황궁에 자객이 들었는데 잡지 못하였으니 동창과 금의위의 실책이 큽니다. 이참에 두 조직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겠습니다.”
고정엽이 매서운 눈으로 소명과 송범한을 바라봤다.
고정엽은 송범한을 보며 말했다.
“변방에 가 있는 엄도통을 불러라. 그라면 해이해진 금의위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엄세록을 불러오라는 말에 송범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확실히 엄세록이 떠난 이후로 금의위가 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폐하. 엄도통이 돌아오면 함께 논의하여 금의위를 다시 세우겠습니다.”
“그리하라.”
말없이 지켜보던 소명은 자신이 나설 차례라고 생각하여 앞으로 나섰다.
“폐하. 동창은······.”
그때 경정이 소명을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폐하. 동창은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동창도 손을 봐야겠지.”
“폐하. 신첩이 한 말쯤 드려도 될까요?”
“그리하라. 백귀비.”
소명은 갑자기 끼어드는 백귀비를 보며 인상을 썼다.
경정은 놀란 소명을 뒤로 한 채 웃으며 말했다.
“동창의 천씨 형제가 폐하께서 주신 권력을 남용하고 후궁을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절대로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짐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폐하이십니다.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고정엽이 노려보자 소명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천씨 형제가 벌인 짓은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그들은 이미 죽고 없지 않은가?
‘그들이 지은 죄를 내가 떠안게 되는가? 어째서?’
소명이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데 고정엽이 명을 내렸다.
“송도통은 들어라.”
“예. 폐하.”
“엄도통이 회궁하면 동창을 조사케 하라 동창이 그간 저지른 비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파악해야 할 것이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동창의 모든 비리를 조사한다는 말에 소명은 경악했다.
금의위와 너무 다른 처사가 아닌가?
“폐하. 소신도 금의위처럼 안에서부터 동창을 살펴 문제를 바로 잡겠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시끄럽다. 송도통은 당장 소태감을 끌고 가라.”
“예. 폐하.”
송범한이 손을 올리자 그의 수하들이 달려들어 소명을 사로잡았다.
소명이 데리고 온 동창도 졸지에 죄인이 되어 끌려 나갔다.
경정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동창은 물론이고 환관 조직이 이번 일을 계기로 바뀔 수 있을까?’
원생의 경정은 환관들의 권력 싸움의 희생양으로 죽은 셈이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아니다. 스승님을 믿어보자. 스승님께서 보통 꽉 막힌 분이 아니시니 반드시 조직을 환골탈태시키실 수 있을 것이로다.’
잠시 원생의 기억을 떠올렸던 경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태후와 황후가 웃으며 손짓하고 있었다.
경정은 자신이 있을 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이제 후궁 백경정이다. 내명부가 내 집이야.’
경정은 환하게 웃으며 태후와 황후 그리고 그녀의 남자인 고정엽에게 달려갔다.
***
이곳은 익곤궁.
주인이 사라진 익곤궁에는 궁인도 없고 집기에는 모조리 흰 천이 덮여 있었다.
궁 안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가귀인이 쓰던 물건에는 죄다 흰 천이 덮어져 있었다.
경정은 지난날 익곤궁에 왔을 때 본 화분의 위치를 떠올리며 그곳으로 이동했다.
밤이라 익곤궁 안이 싸늘했기에 경정은 걱정이 앞섰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더는 탄을 때지 않는구나. 선연화가 더운 운남 지방에서 자라는 꽃인데 설마하니 꽃이 지지는 않았겠지?”
드디어 선연화 꽃이 있던 장소에 도착한 경정은 드리워진 흰 천을 치워냈다.
그러자 고고한 푸른 꽃잎을 자랑하는 선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 빛이 선연화의 여린 꽃잎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