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4/251)

진짜를 찾아라.

이곳은 황궁의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수로.

경정 일행은 어두운 수로를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지나고 있었다.

경정은 소풍영의 등에 업힌 고정엽의 얼굴을 계속 확인했다.

고정엽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경정은 이내 시선을 돌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서굉과 그가 들쳐메고 있는 하신을 바라봤다.

하신 역시 고정엽과 마찬가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소풍영이 경정에게 물었다.

“경정아. 대체 이 길은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이냐? 황궁 지하에 이런 수로가 있다는 것은 궁에서 일하는 환관들도 모를 것 같은데 말이야.”

“혹시나 해서 알아본 것입니다. 황궁에서 환혼술을 하는 것이기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거든요.”

소풍영은 오랜 시간 황궁에서 살았지만, 이 수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경정이 이런 곳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때 선두에서 먼저 길을 확인하던 제갈원과 벽서온이 돌아왔다.

“마마님. 이 길로 조금만 더 가면 수로의 끝이 나옵니다. 황궁 근처의 천변과 연결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벽맹주님. 근처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나가서 살펴 주시겠습니까?”

“확인 해 보겠습니다. 마마님.”

벽서온과 제갈원이 포권을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경정은 그녀가 냉궁에 갇혀 있단 소식만으로 이렇게 달려와 준 풍죽오우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스승님. 풍죽오우 분들이 참으로 의리가 있으시네요.”

“경정아. 저것이 의리로 보이느냐?”

“그럼요. 의리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쯧쯧. 여인의 손 한번 못 잡아 본 나도 아는 사실을 너는 모르는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

“됐다. 그냥 말을 말자. 어서 가자꾸나. 경정아.”

“알겠습니다. 스승님.”

***

경정 일행이 이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들이 냉궁에 들이닥쳤다.

황궁을 수색하던 금의위가 냉궁에서 들린 폭발음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냉궁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큰 싸움이 벌어진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소명은 난리가 난 냉궁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냉궁 안을 수색했던 금의위 송범한이 그 안에서 혼절한 여인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소명은 그 여인이 백귀비일 거라 생각하고 달려갔다.

하지만 송범한이 데리고 온 여인은 백귀비가 아니었다.

“가귀인 마마님······?”

소명은 감옥 안에 있어야 할 가귀인이 왜 냉궁에서 발견된 것인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때 내의원 의원들이 달려와 혼절한 가귀인을 살폈다.

“곽어의. 가귀인 마마님은 어떠하신가?”

송범한이 묻자 가귀인의 맥을 짚은 곽어의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 당장 내의원으로 모셔가서 치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송도통.”

“그러시게. 금의위가 자네를 도와 가귀인 마마님을 모셔다드릴 것이니 부탁하네.”

곽어의가 가귀인을 데리고 가려고 하자 소명이 앞으로 나섰다.

“잠깐! 거기 서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소태감.”

“가귀인 마마께서는 죄를 지어 내일 아침 일찍 참수형을 당하실 것이옵니다.”

“뭐라고요? 참수형이라고요?”

송범한을 포함한 금의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후궁 마마님이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그 형벌이 참수형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참말입니까? 정말로 가귀인 마마께 참수형이 내려진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송도통. 폐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옵니다.”

“폐하께서 어찌하여 그런 명을 내리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사실은······”

소명은 송범한의 귀에 대고 냉궁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송범한은 화들짝 놀랐다.

황제가 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는 갔지만 그래도 참수형은 너무한 처사였다.

그때 송범한의 수하가 다가와 그에게 뭔가를 고했다.

“백귀비 마마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냉궁은 물론 이 일대를 샅샅이 살펴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소명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귀비는 냉궁에서 황제와 함께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소태감. 아무래도 가귀인 마마님께 내려진 참수형을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송도통?”

“백귀비 마마께서 냉궁에서 사라지셨으니 가귀인 마마께서 뭔가를 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흠. 일리가 있군요.”

생각을 마친 소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가귀인 마마님께 금의위를 붙여 감시해 주십시오. 송도통.”

“소태감께서는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폐하께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말씀드려야지요. 폐하께서는 연공실로 돌아가셔서 아무것도 모르고 계실 것이옵니다.”

송범한은 최근에 기이한 행보를 보이는 황제를 떠올리며 소명을 걱정했다.

황궁에 들어온 침입자를 놓쳤고, 백귀비까지 사라졌으니 황제의 진노가 하늘을 찌를 것이라 예상했다.

소명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송도통.”

“예. 소태감.”

소명은 수하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홀로 건청궁으로 향했다.

***

이곳은 도성의 남쪽 거리에 있는 소풍영의 장원.

전각 안에는 사내 두 명이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그들은 환혼술을 마치고 돌아온 고정엽과 하신이었다.

경정이 진맥을 끝낸 당소소와 당철한의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신의님. 어찌 되었습니까? 폐하께서 왜 깨어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당소소와 당철한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경정을 자리로 이끌었다.

“우선 앉아 보십시오. 마마님.”

경정은 당소소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당소소는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말했다.

“차부터 드십시오.”

“지금 한가하게 차나 마실 기분이 아닙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신의님.”

경정은 시선을 피하는 당소소를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소소가 입을 열지 못하자 당철한이 대신 입을 열었다.

“마마님. 저들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저희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다친 곳이 전혀 없습니다. 대법이 잘 되었다면 깨어날 것입니다.”

“그럼, 좀 더 기다려봐야 할까요?”

“소풍영 어르신께 들어보니 고정엽과 마두의 몸이 바뀌었을 때도 며칠 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했다면서요?”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그런 것이라면 기다려야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님. 소소와 제가 있으니 반드시 고정엽을 살려 놓겠습니다.”

당철한이 호언장담하자 경정은 그제야 안심이 됐다.

사천당가의 미래를 짊어진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때 당소소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마마님. 폐하의 옥체가 말입니다.”

경정은 불안한 얼굴로 당소소를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폐하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제가 진맥해 보았는데 폐하의 옥체에 곳곳에 극음의 기운이 너무 많이 퍼져있습니다. 사람은 음양의 조화가 맞아야 살 수 있는데 폐하의 옥체는 그 조화가 깨져 있습니다.”

경정은 하신이 규화보전을 익히다 주화입마에 빠져 그녀를 찾아온 일을 떠올렸다.

경정이 벌떡 일어나더니 닫혀 있던 침전의 문을 화들짝 열었다.

침전 밖 내실에서 소풍영과 서굉 그리고 풍죽오우가 귀를 쫑긋 열고 안의 상황을 엿듣고 있었다.

경정은 밖으로 달려가 소풍영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스승님. 들으셨지요? 신의께서 그러시는데 폐하의 옥체가 음양의 조화가 깨졌다고 합니다.”

“음? 어째서 그러실까?”

“하신이 규화보전을 익혔습니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을 제가 내공을 불어넣어 간신히 위기를 넘겼고요.”

“뭐라? 규화보전? 그것을 대체 어디에서 얻었단 말이냐?”

“어디긴요. 동창의 천씨 형제들이 바친 것이겠지요.”

“그럼, 황궁 안에 있던 규화보전이라는 말이냐?”

소풍영이 다짜고짜 큰 소리로 외쳤다.

경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풍영에게 물었다.

“스승님.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경정아. 규화보전은 환관이 만든 무공이다. 처음부터 양기가 충만한 사내를 위해 만든 무공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하신이 아직 규화보전을 완벽하게 익히시지 못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된다. 황궁 안에 있는 규화보전이 가짜인데 어찌 그것을 익혀 대성할 수 있겠느냐? 지금 보니 그래서 주화입마가 찾아온 것이다. 이미 기혈이 뒤틀리고 음과 양의 조화가 모두 깨졌을 것이다.”

“가짜라니요?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나를 가둔 동창에게 복수하기 위해 규화보전을 가짜로 바꿔치기하지 않았더냐? 그것을 익히면 지금의 폐하처럼 음양의 조화가 어긋나 결국엔 단전이 붕괴하고 말 것이다.”

“뭐라고요?”

경정이 경악하며 누워있는 고정엽에게 달려갔다.

고정엽은 평소와 달리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정이 고정엽의 손을 꼭 잡자 그의 손에서 얼음장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폐하.”

경정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그것이 고정엽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경정이 서럽게 울자 사람들은 차마 위로의 말을 전하지 못하고 주위를 서성였다.

그때였다.

차가운 무언가가 경정의 정수리를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경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고정엽과 눈이 마주쳤다.

“폐하···? 폐하십니까?”

고정엽이 일어나자마자 서굉이 달려가 그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경정이 그것을 보고 놀라 외쳤다.

“서굉 어르신! 지금 뭘 하시는 것입니까?”

“환혼술이 잘 되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하신일 수도 있으니 너는 어서 이 자와 떨어져라!”

“서가야.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소풍영이 달려와 서굉을 말리려고 하는데 서굉이 소풍영이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더니 그것을 옆자리의 하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서가야. 너 지금?”

“시끄럽다. 소가야. 마두도 깨어났으니 조용히 해라.”

“뭐라?”

서굉의 말대로 고정엽과 하신, 두 사람 모두 눈을 뜨고 있었다.

서굉은 두 사내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말했다.

“서가야. 어서 두 사람의 아혈을 짚어라.”

“아혈을 왜?”

“어서 내 말대로 해라!”

서굉이 재촉하자 소풍영은 어쩔 수 없이 고정엽과 하신의 아혈을 눌러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소가야. 너는 모른다. 하신 저놈이 얼마나 악랄한 놈인지. 저 간사한 혀로 우리를 속일 수도 있으니 입을 막고 확인해 봐야 한다.”

그때 고정엽이 살짝 움직였고 서굉은 검에 내공을 실어 보냈다.

검이 살갗을 파고들며 고정엽의 목에 상처를 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가차 없이 벨 것이다. 나는 소풍영처럼 황제의 사람도 아니고 백도의 사람도 아니니 거칠 것이 없다. 한다면 한단 말이다.”

경정은 고정엽이 또 움직여 상처를 입을까 봐 그와 손을 떼고 떨어져 섰다.

“서굉 어르신. 너무 하십니다. 두 사람이 몸을 되찾았는지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경정이 묻자 서굉이 하신을 노려봤다.

하신은 힘이 없는지 축 늘어진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고정엽은 서굉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튀어 올라 검을 두 동강 낼 것 같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표정으로만 봐서는 고정엽의 몸에 아직도 하신의 혼이 깃들어 있는 듯 보여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풍죽오우도 가세하여 두 사람을 포위했고 남궁후는 무공을 모르는 당소소를 데리고 전각 밖으로 피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서로의 눈치만 보는 그때였다.

갑자기 경정이 벌떡 일어나 당철한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 서굉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서굉은 갑자기 달려오는 경정을 보고 화들짝 놀랐으나 검을 들고 있는 손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그런데 서굉의 앞으로 달려오던 경정이 두 남자 사이에 서서 갑자기 비수를 그녀의 가슴에 대고 찌르는 것이 아닌가?

“경정아! 너 뭐 하는 것이냐?”

“마마님!”

비수가 경정의 가슴을 찌르려는 그때였다.

커다란 손이 나타나 비수를 가로막았고 그의 손바닥이 날카로운 비수에 의해 뚫리고 말았다.

비수를 막은 이는 다름 아닌 고정엽이었다.

고정엽은 함부로 움직이느라 검날의 끝이 그의 목을 파고들어 깊게 베인 채였다.

서굉이 놀라서 주춤하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신이 서굉을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

경정은 즉시 고정엽의 손바닥에 박힌 비수를 빼내어 도망치는 하신의 등으로 내던졌다.

비수가 하신의 등을 정확히 타격하자 사내가 몸을 떨었다.

경정은 서굉이 놓쳤던 검을 들고 일어나 휘청거리는 하신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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