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251)

하신이 눈을 뜨다.

경정은 깨어난 하신을 유심히 살폈다.

‘벌써 깨어나다니. 한 이틀은 정신을 못 차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괴물인가?’

경정이 고개를 돌려 가귀인을 바라보니 그녀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가귀인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신이 일어서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연공실에서 막 나온 그는 바지 위에 장포 한 장만 걸치고 있었기에 열린 장포 사이로 그의 벗은 몸이 언뜻언뜻 보였다.

소명과 동창은 즉시 뒷걸음질 쳐서 전각 밖으로 나갔고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경정은 하신의 몸과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주화입마는 완전히 몰아낸 것 같구나.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죽은 목숨이었다. 이 망할 놈아.’

걸어오는 하신의 눈은 경정을 향해 있었다.

자신이 괜찮은지 먼저 살피는 여인의 얼굴을 본 하신의 표정이 뭔가 좀 이상했다.

감격한듯해 보이기도 했고 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하신이 경정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경정을 바라보던 하신이 이내 고개를 돌려 가귀인을 응시했다.

하신의 얼굴은 어느새 북해의 찬바람이 쌩쌩 불 것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가귀인은 악귀를 만난 것처럼 몸이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명은 들어라.”

“예. 폐하. 하명하시지요.”

가귀인은 그녀를 노려보는 하신을 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하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죄인 가씨를 당장 감옥에 가두라.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참수할 것이다.”

소명은 후궁을 참수한다는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곧바로 답을 했다.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가귀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참수······? 나를 참수한다고? 나, 가보현이 죽는단 말인가?’

황제가 이 야심한 밤에 냉궁에 왔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그가 참수형을 내린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꿈만 같았다.

소명은 황제의 포악한 성경을 알기에 즉시 달려가 가귀인의 양팔을 붙잡았다.

가귀인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이거 놓아라! 당장 놓지 못하겠는가? 어서 놔라!”

가귀인이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녀의 찢어지는 비명이 냉궁을 가득 채웠다.

“폐하. 신첩은 죄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백귀비 때문에 벌어진 일이옵니다. 백귀비! 네가 나를 끌어들이려고 함정을 판 것이지? 어찌하여 이리 악독하단 말인가?”

끌려가는 가귀인이 하신과 경정을 향해 말을 쏟아냈고 소명은 가귀인의 입을 막고 냉궁 밖으로 끌고 나왔다.

경정은 점점 멀어지는 가귀인의 뒷모습을 보며 몸서리쳤다.

‘참수라니. 그래도 후궁인데 어찌하여 참수형을 내린다는 말인가?’

가귀인을 처리한 하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달빛이 그를 비추고 있었고 하신은 그 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경정은 잔혹한 마두가 치가 떨리게 싫었으나, 표정을 갈무리하고 예를 올렸다.

“신첩 백귀비가 폐하를 뵙습니다.”

경정이 예를 올리고 일어섰으나 하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경정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단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폐하께서 오시면 아니 되십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백귀비. 이제 냉궁에서 나오거라.”

하신의 말에 경정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경정은 놀랐으나 이내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신의는 찾으셨습니까? 신의를 찾지 못하셨다면 그럴 수는 없지요. 아직도 신첩을 오해하고 계실 것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냉궁에서 나오라 하시는 것이옵니까?”

경정이 토라진 얼굴을 하고 하신을 흘겨봤다.

그런데 받아주는 하신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경정은 하신이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하신이 왜 저러지? 주화입마에 빠지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그때 하신이 손을 뒤로 뻗더니 열린 전각의 문을 닫았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전각 안이 고요해졌다.

‘미친놈아. 왜 문을 닫는 것이냐? 혹시 여기서 자고 가려는 것이냐?’

경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정신이 멍해졌다.

“냉궁은 폐하께서 계실 곳이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경정이 문으로 달려가려는데 하신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경정이 화들짝 놀라 잡힌 손을 잡아 뺐다.

하지만 하신은 그녀의 손을 놔주지 않고 오히려 잡아끌었다.

경정은 연약한 여인인 척 정체를 숨기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하신에게 끌려갔다.

하신이 경정을 품에 안으려는 그 순간, 경정은 미꾸라지처럼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 뒤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경정의 동작이 어찌나 정확하고 재빠른지 하신은 당황하여 찰나의 순간에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소공공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어째서 시위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폐하를 제대로 모시지 않다니 큰일입니다. 자객이 황궁에 들어왔음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경정은 자객을 운운하며 황급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순식간에 하신이 다가와 섰다.

경정은 하신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려고 하자 경악하여 그녀도 모르게 하신의 가슴을 밀쳐냈다.

“폐하. 이러지 마십시오!”

하신은 몸이 뒤로 밀리는 와중에 경정의 허리끈을 낚아챘다.

마두가 경정의 허리끈을 풀려고 하자 경정은 대경실색했다.

‘뭐 이런 변태 같은 놈이 다 있어?’

경정은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하신을 노려봤다.

그런데 일어서는 하신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정이 허리춤에 둘러놓았던 연검(軟劍)이었다.

하신이 연검을 손에 들고 아래로 내리치자 검신이 곧게 펴지며 바닥을 갈랐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전각의 마룻바닥이 깨졌다.

하신은 연검을 보며 말했다.

“귀한 연철로 만든 검이로구나. 이런 것은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지.”

하신은 검을 칭찬하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연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경정이 아끼던 연검이 큰 소리와 함께 대들보에 깊게 박혀버렸다.

하신은 고개를 돌려 경정을 바라봤다.

경정과 하신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불꽃이 튀었다.

“백귀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는가?”

“······”

“귀비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여인이라 생각했었는데. 내 오해였구나. 그렇지 않은가?”

경정이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하신은 경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백귀비. 그대의 정체가 무엇인가?”

***

감옥으로 끌려가던 가귀인의 앞으로 소녕이 달려왔다.

소녕은 동창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주인을 보고 외쳤다.

“마마님을 풀어주십시오.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놓아라! 저리 썩 꺼져라!”

“놔주십시오. 우리 마마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십니까? 운남 포정사이신 가성규 대인의 따님이십니다.”

“죄인이 누구의 딸인지는 중요치 않다. 비켜라.”

“죄인이라고요?”

“그렇다. 죄인 가씨는 내일 아침이면 참수형을 당할 죄인이란 말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마님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셨다는 것입니까? 백귀비 마마님께서 마마님을 음해하신 것입니다.”

가귀인을 끌고 가던 동창들이 혀를 찼다.

“우습구나. 오히려 그 반대로다. 죄인 가씨가 백귀비 마마님을 음해한 것이란 말이다. 폐하께서 그것을 보시고 죄인에게 참수형을 내리신 것이니 당장 길을 비켜라.”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다고요?”

소녕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인이 참수형을 당한다니.

소녕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동창의 바짓가랑이를 잡던 손을 뗐다.

소명은 수하들의 말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마디 했다.

“어린 시녀를 그만 괴롭혀라. 어서 죄인을 감옥으로 압송하기나 해.”

“송구합니다. 소태감 나리.”

그들이 감옥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저 멀리 남쪽 궁에서 징 소리가 울리며 소란스러워졌다.

소명은 징 소리를 듣고 미간을 좁혔다.

“소태감 나리. 소리가 짧게 두 번, 길게 세 번씩 울렸습니다.”

“나도 들었다. 누군가 황궁 안에 침입한 것 같구나.”

소명은 고민하더니 이내 명을 내렸다.

“너 혼자 남아 죄인 가씨를 끌고 감옥으로 가라.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침입자를 쫓으러 간다.”

“예. 소태감 나리.”

소명과 동창이 징 소리가 울리는 남쪽 궁으로 달려갔고 홀로 남은 동창이 가귀인을 끌고 감옥으로 향했다.

“이거 놓아라. 나는 가귀인이다. 어찌 후궁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냐?”

“가귀인 마마. 이제 이 문으로 들어가면 더는 귀인이 아닙니다. 참수형을 앞둔 죄인일 뿐이지요.”

가귀인은 그녀의 목이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모든 것이 백귀비 그녀 때문이었다.

“울지 마시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침이 오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감옥에서 참회라도 하시지요.”

가귀인을 끌고 가는 동창은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내였다.

동창이 가귀인을 끌고 감옥으로 들어서는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등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다름 아닌 소녕이었다.

소녕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녀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꽂은 구리 비녀를 빼서 동창을 찌른 것이었다.

‘크헉!’

등을 찔린 동창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채 몸이 허물어졌다.

동창이 쓰러지자 소녕이 달려가 가귀인을 일으켜 세웠다.

“마마님. 어서 가십시오.”

“소녕. 어찌 된 일이냐?”

“누군가 황궁에 침입했다고 합니다. 궁이 소란스러우니 잠시 피해 있다가 이곳을 탈출하시지요.”

“황궁 안이 꽉 막혔는데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렇다고 여기에 있다가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우선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마마님.”

소녕은 가귀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소녕과 함께 도망치던 가귀인이 물었다.

“소녕. 대체 궁에 누가 쳐들어왔단 말이냐?”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봉천전에 들었던 그 자객의 일당이 아닐까요?”

“자객이라고?”

순간 가귀인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봉전천의 자객과 채귀인이 한패라고 했었지.’

가귀인은 고개를 돌려 냉궁 지붕을 바라봤다.

“마마님. 어서 움직여요. 늦으면 아니 됩니다.”

“소녕. 냉궁으로 가자.”

“냉궁이라고요? 혹시 냉궁에 숨을 생각이십니까? 그곳에는 백귀비 마마님이 계십니다. 안 됩니다. 마마님.”

“아니다. 나는 냉궁으로 갈 것이다.”

가귀인은 소녕의 손을 뿌리치고 냉궁으로 달려갔다.

“마마님.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마마님!”

냉궁의 지붕이 점차 가까워지자 가귀인의 눈빛이 번뜩였다.

‘백귀인. 네가 채귀인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들이 너에게 복수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나는 네가 자객의 검에 의해 죽는 것을 보고 말 것이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야!’

***

검을 찬 흑의인 여럿이 동창을 피해 황궁의 지붕을 타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은 하신의 명을 받고 입궁하기 위해 도성에 온 풍죽오우 네 사람이었다.

제갈원, 남궁후, 당철한 그리고 무림 맹주인 벽서온까지.

제일 늦게 도성에 도착한 벽서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기에 황궁의 담을 넘어 다니며 어찌 된 사정인지 들었다.

“그렇다면 마마님께서 지금 냉궁에 갇혀 계신다는 것이냐?”

벽서온이 놀라 제갈원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 출궁하는 환관에게 돈을 쥐여주며 물었는데 마마님께서 냉궁에 갇혀 계신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고정엽. 이 자식이 실성했는가? 감히 마마님을 냉궁으로 보내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풍죽오우는 고정엽과 하신의 몸이 바뀐 것을 몰랐기에 이 모든 것이 변심한 황제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남궁후가 끼어들었다.

“원아. 아무래도 수상해. 우리가 이 일을 알면 마마님을 납치해서라도 도망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고정엽은 우리를 황궁으로 불러들였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그래서 이렇게 흑의를 뒤집어쓰고 황궁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고정엽이 우리를 부르든 말든 그 이유는 중요치 않다. 우리는 오늘 밤, 마마님을 모시고 궁에서 탈출한다.”

풍죽오우 네 사람은 경정이 냉궁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궁에 침입했다.

하지만 황궁이 어디 만만한 곳이겠는가?

황궁을 지키는 금의위에 곧바로 발각되어 지금 이렇게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도망치고 있었다.

“원아.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이냐? 왜 냉궁이 보이지 않지?”

남궁후가 참지 못하고 앞서 달리는 제갈원을 독촉했다.

제갈원은 출궁하던 환관에게 돈을 더 주고 냉궁의 지도를 그리게 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멍청한 환관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잘못 그려넣은 바람에 냉궁의 반대 편인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큰일이구나. 우리를 쫓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난다. 이대로는 잡히고 말 것이야.’

그때 풍죽오우의 앞으로 세 명의 또 다른 흑의인이 등장했다.

앞서 달리던 제갈원이 멈춰서고 검을 뽑았다.

“누구냐? 길을 비켜라!”

벽서온과 남궁후 그리고 당철한도 검을 뽑고 흑의인을 노려봤다.

그때 가장 앞에 선 흑의인이 복면을 벗으며 말했다.

“제갈원 공자. 냉궁은 그쪽이 아니오. 나를 따라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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