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궁 마마님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곳은 건청궁의 연공실.
방금 대주천(大周天)을 끝낸 하신이 눈을 떴다.
‘경지가 올랐구나.’
하신은 어젯밤 분노에 차오른 상태로 연공실로 들어와 규화보전의 팔성(八成)을 뚫어냈다.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아있었으나 지금의 성취 속도로 봐서는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쁜 마음에 미소 짓던 하신의 머릿속에 갑자기 여인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백귀비······.’
하신은 자청하여 냉궁에 들어간 백귀비를 떠올렸고 갑자기 그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경지를 뚫어 환희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은 여인을 떠올리자마자 열기로 불타올랐다.
‘마치 내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것 같군.’
하신은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안달복달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연공실 문이 열리고 하신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소공공이 달려와 그의 몸에 용포를 둘러줬다.
“폐하. 따뜻한 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욕탕으로 가실까요?”
“소명을 불러와라.”
“지금이요?”
“그래. 당장 소명을 불러와라.”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하신은 어젯밤 연공실로 들어가며 소명에게 명을 내렸다.
[당장 동창을 풀어 신의를 찾아라. 신의를 당장 내 앞에 끌고 오란 말이다.]
하신은 살아있다는 풍석을 찾는 일보다 신의를 찾는 일이 먼저였다.
소명은 지금쯤 황제가 내린 명을 수행하기 위해 수하들을 궁 밖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백귀비는 약해 보이지만, 절대 약한 여인이 아니다.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지키려고 할 것이다.”
하신은 당장 냉궁에 쳐들어가 백귀비를 끌고 나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여인이 완전히 마음을 돌려 버릴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규환마가의 어린 가주.
소악마라 불렸던 천하의 하신이 여인의 마음 하나를 얻지 못해 고민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스웠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소명이 들어왔다.
소명은 하신의 몸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폐하가 달라지셨다.’
하신은 어젯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또 경지를 뚫어내셨구나. 하! 이것이 재능의 차이인가? 이 황궁 안에 폐하를 이길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소명은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폐하. 명을 내려주십시오.”
하신은 소명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풍죽오우를 불러라.”
“강호인 풍죽오우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 그들을 황궁으로 불러라.”
소명은 황제가 내린 명령을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더는 묻지 않고 답했다.
“존명.”
***
냉궁 안에는 죄인들이 지내는 전각이 세 개 있다.
그리고 그 전각은 언제 쓰러질지 모를 정도로 낡아 있었다.
그곳에 내쳐진 죄인들은 냉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하루에 두 번씩 벽에 뚫린 구멍으로 음식이 배달되었다.
죄인에게 내려지는 식사는 궁에서 먹던 음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냉궁 근처에 음식을 할 수 있는 부엌이 없어 가장 가까운 전각에서 음식을 해서 가져오는데 거리가 멀어서 갓 지은 밥이라도 오는 동안 차갑게 식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방금 한 따뜻한 밥을 죄인에게 내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구멍으로 들어오는 식사는 언제가 딱딱하게 굳은 쉰밥과 궁인들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뿐이었다.
입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새 옷을 지을 옷감을 냉궁에 보내지 않았기에 재수가 없으면 냉궁에 들어갈 때 입고간 옷으로 평생을 지내야 하는 일도 있었다.
소이자는 냉궁 마마님들이 어떤 삶을 보내는지 잘 알고 있기에 물건을 바리바리 싸 들고 이곳에 왔다.
소이자가 냉궁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경정을 불렀다.
“마마님. 소인이 왔습니다. 소이자가 왔어요.”
소이자가 애타게 경정이 부른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정이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왔느냐? 소이자. 네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마님!”
소이자는 경정을 보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다.
“마마님.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어찌하여 냉궁에 들어 계신 것이옵니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기에 소이자는 그녀가 대체 왜 냉궁에 유폐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울먹이는 소이자를 보며 경정은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라. 죄를 지었으니 냉궁에 온 것이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소인도 들여보내 주십시오. 안에 들어가 마마님을 모시겠습니다.”
“환관이 어찌 냉궁에 들어온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나저나 궁의 상황은 어떠하냐? 내가 냉궁에 들어간 일로 말들이 많지?”
“폐하께서 입단속을 시키셨는지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폐하는 어쩌고 계시고?”
“소인이 소빈자에게 물어보니 폐하께서 연공실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신다고 하시네요.”
“그래?”
“하지만 후궁 마마님들이 몰려다니며 말씀들을 나누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계시지 않으니 낮은 품계의 후궁들이 문제이옵니다. 가귀인 마마께서 그 대장 격이시지요.”
경정은 후궁들이 어쩌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하신이 연공실에서 나오지 않는다니. 무슨 비급이라도 얻은 것인가? 황궁 서고의 비급은 내가 모조리 바꿔치기해서 익힐 만한 것이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수련을 그리 열심히 하는 것이지?’
경정은 하신이 규화보전을 손에 넣고 그것을 수련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소이자. 나를 위해 뭔가 챙겨온 것은 없느냐?”
“여기 있습니다. 마마님.”
소이자는 청초각에서 준비해온 보따리를 구멍 안으로 들이밀었다.
보따리가 자그마치 열 개나 되었다.
“소이자야. 이걸 네가 다 들고 온 것이냐?”
“수레를 빌렸습니다. 빌린 수레는 다시 돌려줘야 합니다.”
경정은 충직한 신하인 소이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소이자야. 이 물건들은 내가 잘 쓰마. 너는 하루에 한 번씩 이곳으로 와서 소식을 전하거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님.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조석(朝夕)으로 오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어서 돌아가라. 수레를 돌려줘야 한다면서?”
“예. 마마님. 부디 무탈하게 잘 지내십시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소이자는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경정은 소이자가 가져온 보따리를 들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냉궁에 오는 후궁들은 주로 환관을 매수할 비싼 장신구와 옷 등을 챙기는데 소이자도 다르지 않았다.
“값비싼 보물들이 반이나 되는구나. 소이자도 참. 내가 이곳에서 힘든 생활을 할까 봐 걱정한 것인가?”
하신은 냉궁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기에 경정을 배려하지 않았지만, 소공공은 달랐다.
그는 황제가 백귀비를 여전히 총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냉궁을 지키는 시위들에게 일러 백귀비 마마님을 잘 모시라 전했다.
그렇기에 아무도 경정을 괴롭히지 않았고 삼시세끼 따뜻한 식사가 배달되었다.
경정은 소이자가 가져온 보물을 뒤로하고 다른 보따리를 열었다.
나머지 보따리에는 황궁에서 흔히 보지 못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연근산이고 이것은 해독제구나. 신의께서 주신 단약은 이제 한 알 남았어. 아껴 먹어야지.”
경정이 챙겨온 것은 하나같이 후궁이 가지고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에구머니나! 이것은 독이잖아. 약과 독을 섞어서 가지고 오다니. 소이자 이놈이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이런 실수를 벌인 것인가?”
경정은 독이 든 호리병을 꺼내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손에 든 호리병은 칠혈이 만든 바로 그 독이었다.
장춘궁에 남아있던 독을 경정이 소이자를 시켜서 몰래 빼돌린 것이었다.
“마교가 만든 독이니 필시 천하를 호령할 극독일 것이다. 내가 필요할 때 잘 써야지.”
경정은 하신에게 들킬까 봐 빼고 다녔던 연검을 허리에 감고 옷으로 가렸다.
“검을 차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든든하구나.”
경정은 비수를 허벅지에 숨기고 암기는 소매 안쪽에 숨겨놨다.
완전 무장하고 일어서니 몸이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하신. 기다려라. 이제 곧 폐하와 스승님이 오신다. 그럼, 넌 끝장이야.”
경정이 들키지 않게 보따리를 숨기는데 갑자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지? 냉궁을 지키는 시위들도 물러가라 명을 내려서 올 사람이 없는데?”
경정은 혹시라도 망나니 하신이 일을 벌여 냉궁에 다른 후궁을 내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가보자. 대체 누가 왔는지 나가보면 알 테지.”
***
전각 밖으로 나온 경정은 그녀의 눈을 의심했다.
경정의 앞에는 가귀인과 그녀가 데리고 온 시녀가 서 있었다.
‘뭐야? 이것들은?’
경정은 가귀인을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가귀인은 최근에 입궁했고 입궁 시기가 경정이 녹가에 있을 때였다.
‘내명부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수녀를 계속 뽑는 것일까? 어차피 폐하께서는 나만 바라보실 것인데 말이야.’
경정이 가귀인을 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자 가귀인은 화가 났다.
“소녕. 죄인이 어찌 내게 예를 올리지 않는 것이냐?”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소인이 죄인을 혼내볼까요?”
소녕이 묻자 가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를 데리고 온 보람이 없구나. 비켜라.”
“예. 마마님.”
가귀인은 소녕을 밀치고는 경정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경정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가귀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에 담이라도 걸렸는가? 왜 저렇게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거지?’
경정은 가귀인이 왜 저러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 카랑카랑한 가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인 백가는 내게 예를 올리지 않는가?”
가귀인의 말에 경정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죄인 백가?”
경정이 눈을 치켜뜨자 가귀인도 지지 않고 그녀를 노려봤다.
“내가 잘못 말하지 않았을 텐데? 냉궁에 유폐되었으니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경정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죄인이 되어 냉궁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황제는 그녀의 품계를 그대로 두고 봉호도 박탈하지 않았다.
경정은 여전히 지체 높은 귀비였고 눈앞에서 잘난 체하는 여인은 귀비와 비교할 수도 없는 낮은 귀인이었다.
‘꼭 이런 것들이 있어요.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바보 말이다.’
경정은 가귀인이 황궁 법도를 알지 못해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큰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황궁 법도에 대해 잘 아는 내가 가르쳐야 하지 어쩌겠어.’
경정이 가귀인의 앞으로 다가오자 그녀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죄인은 그 자리에 있어라. 가까이 오지 말라.”
경정은 가귀인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의 코앞에 섰다.
“뭐··· 뭐 하는 것이냐?”
“가귀인.”
“···”
“내가 황궁의 어른이니 편하게 부르겠네. 가귀인. 잘 듣게.”
가귀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경정을 응시했다.
그녀는 경정이 내뿜는 위압감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귀인. 나는 일이 있어 냉궁에 들어온 것이지. 죄인이 아니네.”
“하지만 폐하께서 죄인을 냉궁에······.”
“폐하께서 뭐?”
“그러니까 폐하께서···.”
“폐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자네가 들었는가?”
“그것은 아니지만···.”
“자네는 건청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나? 그곳에 가본 적은 있는가?”
“나는 원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죄인 백가는 지금 이곳에 갇혀 있지 않은가?”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보지.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영원히? 아니면 십 년? 그것도 아니면 한 달?”
경정의 물음에 가귀인은 입을 꾹 닫았다.
가귀인은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려 뒤에 서 있는 소녕을 향해 속삭였다.
“소녕. 냉궁에 한 번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다시는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어?”
“소인도 잘 모릅니다. 마마님.”
“너는 대체 아는 것이 무엇이냐?”
“송구하옵니다. 마마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가귀인이 고개를 돌려 경정을 바라봤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그녀는 어느새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귀인. 나는 죄를 지어 냉궁에 들어오긴 했으나 폐하께서 아직 내 봉호를 박탈하지 않으셨네. 그러니 나는 여전히 귀비의 신분이지.”
경정의 말을 들은 가귀인은 식겁했다.
그녀는 백귀비가 죄인이 되어 다시는 냉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귀비라고?”
“귀비가 아니라 귀비 마마님이라네. 가귀인이 이제 보니 말이 짧구나.”
경정은 가귀인을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 날파리들이 냉궁에 몰려와서 나를 괴롭히려고 들 수도 있다. 물론 내가 괴롭힌다고 괴로울 사람도 아니지만 말이야. 가귀인 어쩔 수 없이 자네를 그 본보기로 삼아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