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251)

밝혀진 비밀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저수궁이라고?”

“폐하께서 백귀비 마마님과 함께 청초각을 떠나자마자 동창이 저수궁으로 몰려갔다고 합니다.”

칠혈은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했다.

“백귀비가 끌려간 것이 아니라 폐하와 함께 청초각을 떠났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마마님. 귀비 마마께서 시체를 보고 혼절하시어 폐하께서 귀비 마마님을 안아 들고 건청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일영의 말을 들은 칠혈은 입술을 깨물었다.

‘냉궁에 묻은 육혈의 시체를 파내 청초각에 가져다 놓았거늘. 어째서 황제는 백귀비가 아닌 계빈을 의심한다는 말인가?’

칠혈은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떠올려 봤으나 그녀의 계략은 완벽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채소의의 굳은 얼굴을 본 일영은 걱정이 앞섰다.

“마마님. 이럴 때 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시끄럽다. 너는 그만 나가 보아라.”

“예. 마마님. 제가 오늘 궁의 불침번을 설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일영이 나가자 침전에 칠혈이 홀로 남았다.

‘백귀비.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것이냐? 어떻게 내 계략을 빠져나간 것이지?’

칠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

이곳은 건청궁.

하신이 혼절한 백귀비를 데리고 가마에서 내렸다.

마두의 품에 안긴 경정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자객의 시체 문제는 잘 해결이 되었는데 네놈이 문제로구나.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지?’

경정이 어떤 수를 쓸까 고민하는데 건청궁 앞으로 가마가 연달아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린 것은 다름 아닌 황후와 태후였다.

경정은 그들을 보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이 오셨구나. 역시 나는 운이 좋아.’

경정이 정신을 차린 듯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떴다.

하신은 경정이 깨어나자 놀라 물었다.

“백귀비. 괜찮은가?”

“폐하······? 신첩이 잠깐 정신을 잃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인지요?”

“건청궁이다. 짐이 너를 데리고 왔다.”

“어머나! 폐하. 신첩을 내려 주시어요.”

경정이 놀라 바둥거리자 하신이 그녀를 내려놓고 부축했다.

그때 그녀의 앞으로 태후와 황후가 달려왔다.

“백귀비!”

“귀비. 괜찮은가?”

“태후 마마님 그리고 황후 마마님.”

경정이 그들에게 예를 올리려고 하자 태후가 손을 내저었다.

“백귀비. 놀랐을 텐데 예를 올리지 말게.”

“태후 마마. 제가 가서 귀비를 살피겠습니다.”

황후는 경정을 부축하고 있는 하신에게 다가가 말했다.

“폐하. 백귀비는 신첩이 챙기겠습니다.”

하신은 갑자기 나타난 태후와 황후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후궁들은 그가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 존재였지만 태후와 황후는 달랐다.

하신이 경정의 몸에서 손을 떼자 경정은 이때다 싶어서 황후에게 달려갔다.

“황후 마마.”

“백귀비 소식을 듣고 왔네. 괜찮은 것인가?”

“제가 너무 놀라서 경황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

황후는 손을 떠는 경정이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그때 태후가 다가와 하신에게 당부했다.

“황제. 이번 일은 청초각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태후 마마.”

“흠. 황제가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이미 동창에 어찌 된 영문인지 조사하라 명을 내렸으니 안심하시지요. 태후 마마.”

“황제. 범인을 찾되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이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태후는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으나 하신은 그 말이 듣기 거북했다.

경정은 하신의 눈에 잠깐 살기가 스쳤다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몸서리쳤다.

‘저 마두가. 감히 태후 마마님을 흘겨보다니.’

경정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아 즉시 황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후 마마. 신첩이 갑자기 어지럽고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백귀비가 많이 놀랐구나. 어서 종수궁으로 가자. 내가 보살펴주마.”

황후와 태후가 경정을 데리고 떠나자 하신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만 가자.”

“예. 폐하.”

하신이 건청궁으로 들어가자 소공공이 그의 뒤를 따랐다.

소공공은 내명부에 피바람이 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이곳은 규환마가의 은거지.

고정엽의 앞에 선 천지자는 걱정이 앞섰다.

‘큰일이로구나. 마혁에게 소식이 끊어졌다. 이 사실을 어찌 고해야 한단 말인가? 성격이 불같은 가주님이 아시면 나를 용서치 않으실 것이로다.’

천지자가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가주님.”

“강호에 남은 마혁에게는 소식이 있더냐?”

“그것이··· 가주님. 아직 소식이 없어서 소신도 백방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천지자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주?”

“내가 강호에 나갔던 동안 마혁과 연락이 닿았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천지자는 마혁이 가주에게 따로 연락했다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혁은 지금 천산에 있다. 장로께서 남긴 보물을 찾았다고 하더구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소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천지자는 놀라는 와중,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장로들이 남긴 보물을 찾다니. 그래서 내게 연락을 끊은 것이었구나. 마혁. 네놈이 가주께 잘 보이려고 수를 쓰고 있어.’

천지자는 마혁이 일부러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이라 오해했다.

“가주. 이제 천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다. 경이만 데리고 나 혼자 떠날 것이다.”

“어째서요?”

“너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규환마가가 이주한 청죽산의 산채로 떠나라.”

“그럼, 운남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운남으로 가라는 말에 천지자의 안색이 굳었다.

‘천산도 아니고 운남이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마혁에게 좌사자 자리를 빼앗기고 말겠구나.’

“천지자. 듣고 있는가?”

“예. 가주. 소신이 잘 알아들었사옵니다.”

“그럼, 하루를 줄 테니 당장 이곳을 떠나거라.”

하신이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천지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 가주. 명을 따르겠나이다.”

천지자가 나가자 고정엽은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이제 되었구나. 이제 편히 황궁에 잠입할 수 있겠어.”

고정엽은 운남으로 쫓겨난 엄세록에게 연통을 넣어 청축산에 모여 있는 규환마가를 일망타진하라 명을 내릴 작정이었다.

규환마가는 정리될 일만 남았고 남은 것은 황궁에 남은 하신 뿐이다.

고정엽이 일어서자 경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경아.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이제 아프지 않다. 창문을 열어다오.”

“예. 가주.”

경이 쪼르르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으로 까만 어둠을 깔고 앉은 달이 보였다.

고정엽은 황궁 어딘가에서 경정이 같은 달을 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홍아.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너를 보러 가마.”

고정엽은 경정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

야심한 새벽.

모두가 잠든 황궁에 유일하게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황궁의 감옥이었다.

감옥에는 저수궁에서 끌려온 궁인들이 고신을 받고 있었다.

저수궁의 수령태감인 조석이 동창의 새로운 수장이 된 소명에게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고했다.

“소인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정말로 너는 우연히 청초각에 갔다가 그곳에 시체가 묻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냐?”

“그렇습니다. 소인이 청초각의 약초밭에 간 것을 내의원 의원들이 알고 있으니 그들을 불러 하문해 보시지요.”

“하지만 너는 시체를 보고도 시위에게 고하지 않고 계빈 마마께 달려갔다. 맞는가?”

“그것은 사실이오나······.”

조태감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소명의 앞으로 기어가 살려달라 매달렸다.

“소인은 계빈 마마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살려주십시오.”

“이자를 끌어내서 좀 더 심문해라. 최근에 저수궁에 방문한 사람은 없는지 빠짐없이 알아내.”

“예. 소태감 나리.”

“소인은 정말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살려주십시오!”

조석의 간절한 외침을 뒤로하고 소명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하에게 물었다.

“계빈 마마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지금 독방에 갇혀 계십니다. 방금 내의원에서 다녀갔고 치료도 끝마쳤습니다.”

“마마님의 손은 살릴 수 있다고 하더냐?”

소명이 묻자 수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명은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독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고 감시해라.”

“마마님은 따로 심문하지 않으십니까?”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저수궁의 궁인들이 모두 불 것이다. 마마님의 손이나 문제없이 치료하라.”

수하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소태감 나리. 정녕 저수궁에 범인이 있다고 여기시는 것이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

“맞습니다. 저수궁은 진짜 범인에게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태감 나리.”

수하가 소명에게 뭔가를 건넸다.

소명은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무환자 열매를 확인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자객의 몸에서 발견한 것이옵니다. 이것은 무환자 열매로 과자를 만들거나 약의 재료로도 쓰이지요.”

“시체가 약초밭에서 발견되었으니 약재가 발견된 것이겠지. 뭐가 문제인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무환자 열매는 방금 딴것이 아니라 탕약에 넣으려고 후작업을 거친 것이라고 합니다.”

“탕약이라고?”

순간 소명의 눈빛이 번뜩였다.

“너는 당장 내의원으로 가라. 가서 무환자 열매를 사용한 적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소태감 나리.”

수하가 감옥을 떠나자 소명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두운 감옥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고 이따금 조태감의 비명이 멀리서 들어올 뿐이었다.

그때 칠흑같이 어두운 복도 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칠혈이었다.

칠혈이 위험을 무릅쓰고 감옥에 온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지하 감옥의 가장 마지막 방 앞에 섰다.

칠혈이 손에 쥔 하얀 가루를 날리자 감옥을 지키던 병사들이 기절하여 쓰러졌다.

그들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빼낸 칠혈이 감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음산한 분위기가 풍기는 감옥 안에는 약초밭에서 빼내온 육혈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칠혈은 시체로 다가가 그의 팔을 확인했다.

풍혈(風血)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칠혈이 이미 문신을 지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찾아온 것이었다.

칠혈은 가지고 온 화골산(化骨散)을 육혈의 팔에 떨어뜨렸다.

작은 물방울이 시체의 살갗에 닿자마자 치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풍도마가의 표식인 풍혈이란 글자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한 칠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혈. 네 시체를 이용한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것은 모두 풍도마가와 돌아가신 가주님의 원한을 풀기 위함이었다.”

칠혈은 육혈의 시체를 보며 다시 한번 복수를 다짐했다.

“풍운검!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테다. 내가 후궁이 되어 침전에 들 수 없다면 다른 수를 쓰는 수밖에.”

잠시 생각에 빠진 칠혈의 얼굴에 갑자기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황제를 지척에서 볼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어. 그날을 노리면 될 것이야.”

칠혈은 황제를 죽여 없앨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황제를 먼저 죽이고 백귀비도 죽일 테다. 두 사람을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야!”

칠혈은 풍운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육중한 철문이 닫히고 감옥 안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때 고요한 감옥에 난데없이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감옥 바닥이 돌이 스르르 열리며 그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환관으로 위장한 경정이었다.

경정은 놀란 눈으로 자객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철이 보낸 자객이 아니었구나. 그런 거였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경정은 경악했다.

“채소의가 마가의 사람이었다니. 풍도마가. 풍석이 부리던 수하였어.”

경정은 방금 칠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제를 지척에서 볼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어. 그날 황제를 먼저 죽이고 백귀비도 죽일 테다.]

채소의처럼 품계가 낮고 총애받지 못하는 후궁은 황제를 바로 앞에서 볼 기회가 흔치 않다.

경정은 채소의가 노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책봉식. 채소의는 책봉식을 노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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