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빈, 이용당한 댓가를 치르다.
이곳은 황제의 욕탕.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하신이 양팔을 들자 궁인들이 등장해 그의 젖은 몸을 닦고 용포를 입혀줬다.
“소공공. 청초각에는 연락을 넣었는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귀비 마마께서도 지금 채비 중이실 것이옵니다.”
“그렇군. 가자.”
하신이 욕탕 밖으로 나오는데 갑자기 천로가 나타났다.
“폐하.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하신은 그의 걸음을 방해하는 천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폐하. 계빈 마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신은 계빈이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황제를 보며 즉시 계빈이 누군지 설명했다.
“폐하. 저수궁에 사시는 계빈 마마시옵니다.”
하신은 갑자기 찾아온 계빈이 마땅치 않았다.
“돌아가라 전해라.”
“하오나 폐하. 계빈 마마께서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후궁 따위가 가져온 소식을 하신이 궁금해할 리가 없었다.
“밤이 늦었으니 내일 들을 것이다.”
“계빈 마마께서 정말 중요한 일이라며 반드시 지금, 폐하를 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잊었는가? 나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하신이 노려보자 천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소신이 잘못했습니다. 폐하.”
천로가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고하자 하신은 소매를 털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욕탕이 있는 건물 밖에서 계빈이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빈은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황제를 보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신은 눈앞의 여인이 계빈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헛웃음을 지었다.
‘궁중의 여인들이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감히 이 나라의 황제를 무어라 여기는 것인가? 아무 때나 찾아와서 떼를 쓰면 된다고 여긴 것인가?’
화가 난 하신이 그녀를 그냥 지나치자 놀란 계빈이 외쳤다.
“폐하. 청초각의 뒷마당에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건청궁으로 가던 하신이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계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로구나. 폐하께서 돌아보셨어.’
계빈은 이번 일로 승승장구하던 백귀비를 끌어내릴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계빈은 놀란 황제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폐하. 감히 황궁에 안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청초각에 묻기까지 하다니요. 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하신이 아무 말도 없이 계빈을 노려보자 천로가 다가와 물었다.
“계빈 마마.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감히 천한 환관 따위가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소인이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다만 청초각에 시체가 묻힌 것을 어떻게 아시게 되었는지 그것을 알고자 여쭙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궁금하실 것이오니 말씀해주시지요. 계빈 마마.”
천로는 지금 황제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몸을 사렸다.
계빈은 황제가 어떤 기분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폐하. 신첩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것이옵니다. 청초각의 뒤에는 작은 약초밭이 있습지요. 백귀비 마마께서 그것을 저희 내명부의 후궁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셨기에 신첩도 가끔 청초각에 찾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한가운데의 흙이 유난히 부풀어 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만 했는데 오늘 가보니 흙더미 속에서 사내의 손가락이 보이더이다.”
계빈은 조태감이 알려준 대로 사실을 부풀려 고했다.
천로는 이것이 큰일임을 직감하고 황제를 살폈다.
하신은 계빈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백귀비가 사람을 죽여서 약초밭에 묻었다고? 이것은 또 다른 후궁의 음모인가?’
하신이 알고 있는 백귀비는 총명한 여인이었다.
백귀비가 희빈과 채소의의 음모를 어떤 식으로 파훼하여 그들을 끌어내렸는지 알고 있기에 계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계빈은 황제가 아무 말이 없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폐하. 들으셨습니까?”
하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계빈.”
“예. 폐하. 신첩 계빈이옵니다.”
“자네는 백귀비가 바보 천치라고 생각하는가?”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알고 있는 백귀비는 총명한 여인이다. 그런 귀비가 함부로 사람을 죽여 시체를 처소의 뒷마당에 묻어 놓았을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폐하. 신첩이 아둔하여 알아듣지 못하겠나이다.”
“그렇겠지. 자네는 멍청해서 못 알아듣겠지.”
“예?”
하신은 서슴지 않고 계빈을 비난했고 그녀는 치욕스러움을 느끼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첩은 그저 폐하를 향한 충심으로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충심이라? 우습군. 내가 오늘 백귀비의 패를 뒤집은 것을 알고 일을 꾸민 것은 아니고?”
“폐하. 신첩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첩이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신은 계빈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신이 뒤돌아서자 계빈은 초조해졌다.
“폐하. 당장 청초각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시지요. 약초밭에 시체가 묻혀 있는지 확인해 보셔야지요.”
계빈이 떠나는 황제의 소맷자락을 낚아채 붙잡고 사정했다.
하신은 멍청한 여인에게 잡힌 소매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거 놔라!”
하신이 손을 휘두르자 계빈이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하신의 소매를 잡았던 계빈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계빈은 앞에 떨어진 자신의 손을 발견하고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꺄악! 내 손이······. 내 손이···?”
계빈은 뒤늦게 고통을 느끼고 처절한 비명을 질러냈다.
하신은 냉혹한 눈빛을 한 채 천로에게 명을 내렸다.
“후궁을 음해한 계빈을 가두고 누구에게 사주받았는지 신문하라.”
천로는 황제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알아채고 바로 명을 받들었다.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하신은 고개를 돌려 청초각이 있는 북쪽을 바라봤다.
백귀비가 올 때까지 건청궁에서 편히 기다릴 수 없었다.
황제가 몸을 날리자 지켜보던 천로와 동창이 놀라 외쳤다.
“폐하! 폐하!”
하신은 동창을 뒤로 한 채 높은 담벼락을 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
이곳은 청초각.
오늘 밤에 건청궁에 들라 명을 받은 경정은 또다시 수를 쓰려고 하고 있었다.
소이자가 치장을 마친 경정을 보며 물었다.
“마마님. 어찌하시려 그러십니까? 또다시 욕탕에서 미끄러졌다고 하시려고요?”
“똑같은 것으로 두 번 속일 수는 없지.”
“그러면 어찌하시려고요?”
“가마에서 떨어질 것이다.”
“예? 가마에서 떨어져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떨어지면 증인이 많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다치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이고. 소이자야. 내가 가마에서 떨어진다고 다치겠느냐?”
경정의 말에 소이자의 눈이 커졌다.
“아···! 그렇지요. 마마께서는 절대 다치지 않으실 테지요.”
“걱정하지 말아라. 이것은 채소의를 끌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라.”
“채소의 마마님을요? 어떻게요?”
소이자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가마는 채소의가 사는 장춘궁 앞에서 엎어질 것이다. 가마꾼이 장춘궁 앞에 뒹구는 뭔가를 밟을 것이거든.”
“장춘궁이라고요? 가마꾼이 대체 뭘 밟습니까?”
청초각은 육궁 밖에 있어 건청궁으로 가려면 장춘궁을 지나야 했다.
경정은 장춘궁 앞에서 일부러 가마에서 떨어져 다칠 생각이었다.
“바로 이것을 밟을 것이다. 소이자.”
경정은 손에 든 뭔가를 소이자에게 보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무환자(無患子) 열매였다.
딱딱한 껍질이 씨앗을 감싸고 있는 나무 열매를 본 소이자가 놀라 물었다.
“이것은 무환자 열매가 아닙니까? 이것으로 어찌 채소의 마마님을 엮으시려고요?”
“채소의가 살을 빼기 위해 무환자가 들어간 탕약을 열심히 먹고 있단다. 다행히 강귀인은 무환자를 가까이하면 몸에서 두드러기가 나니 내가 이 열매 때문에 가마에서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채소의에게 의심이 쏠릴 것이다.”
소이자는 지난번 독살 사건의 일로 경정이 채소의를 끝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정의 생각은 달랐다.
‘조잡한 계략이므로 이것으로 채소의를 옭아맬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어. 나는 단지 신형사에서 채소의가 가짜란 것을 알아채길 바라는 것뿐이다. 감히 황궁에 몰래 들어와 사람을 바꿔치기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경정은 무환자 열매를 소매에 숨기고 일어섰다.
“가자. 소이자. 건청궁에 시침을 들러 가야지.”
“예. 마마님.”
소이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경정을 따라 일어섰다.
***
이곳은 장춘궁.
채소의가 있는 침전으로 일영이 들어왔다.
“마마님. 소인이 돌아왔습니다.”
채소의는 평온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서 답했다.
“어찌 되었느냐?”
“계빈께서 황궁 감옥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래? 그럼, 폐하는?”
“폐하는 지금 청초각으로 가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구나.”
칠혈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자 웃음이 흘러나왔다.
황궁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쯤은 그녀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일영은 변해버린 주인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마마님. 감옥으로 끌려가는 계빈 마마님을 소인이 멀찌감치서 살펴봤는데요.”
일영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계빈이 어찌 되었기에 두려워하는 것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계빈 마마께서··· 마마께서······.”
칠혈이 재차 묻자 일영은 숨을 고르고 간신히 답했다.
“계빈 마마께서 손을 잃으셨습니다. 폐하께서 계빈 마마님의 손을 자르셨대요.”
“그래? 어째서 계빈이 손을 잃었을까?”
“계빈께서 폐하의 소맷자락을 잡고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 모양입니다. 소인이 근처에서 일하던 궁녀에게 들은 바로는 그렇사옵니다.”
“이것 참 무서워서 어디 폐하의 옷에 스치기라도 하겠는가?”
일영은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오히려 농을 던지는 채소의를 보며 몸을 떨었다.
칠혈은 그녀를 괴롭히던 계빈이 손이 잘린 채 감옥에 끌려간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역시 계빈을 이용하길 잘했군. 계빈까지 깔끔하게 보내버리니 기분이 좋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백귀비 차례인가?’
***
청초각 밖으로 나온 경정은 환관도 없이 홀로 나타난 하신을 보고 놀랐다.
‘뭐야? 저 옷차림은? 설마 건청궁이 아니라 여기서 일을 치르려고 온 거야?’
경정은 의관도 제대로 챙겨입지 않고 홀로 나타난 하신을 보며 몸서리쳤다.
하신은 차려입은 경정의 모습을 보고 마음 깊은 곳에서 본심이 튀어나왔다.
‘아름답구나.’
백귀비는 확실히 이곳 황궁의 여인과는 달랐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순하게 생긴 그녀의 외모는 황궁의 화려한 미인들과 달리 청순했다.
경정은 갑자기 등장한 하신을 보고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다가가 예를 올렸다.
“백귀비가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폐하. 궁인도 없이 홀로 청초각에는 어인 일이시옵니까?”
“귀비는 안녕한가?”
“신첩은 보시다시피 잘 있사옵니다.”
경정은 하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떠올려 봤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백귀비. 전각의 뒤편에 약초밭이 있다지?”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신경 쓰지 못한 지 오래라 지금은 내의원에 맡겨만 놓았지요.”
경정은 당소소가 떠난 이후로 약초밭을 그냥 놔두다가 이제는 내의원 의원과 궁인들에게 개방하여 알아서 약초를 기를 수 있게 했다.
‘신의께서 출궁하셨으니 내가 약초밭을 키울 수는 없지. 그런데 그걸 왜 묻는 거지?’
하신은 경정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약초밭이 있다는 곳으로 걸어갔다.
경정은 하신이 뭘 하려는지 궁금해서 황급히 뒤쫓아갔다.
넓은 약초밭은 여전했고 내의원 의원들이 잘 관리하는지 약초가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 약초밭으로 천로와 동창이 나타났다.
동창이 갑자기 약초밭을 포위하자 경정의 눈이 커졌다.
“폐하. 이곳은 왜 살펴보시는 것이옵니까?”
“백귀비. 약초밭을 궁인들에게 내어주고 살피지 않았다고 했는가?”
“예. 그랬지요.”
“그럼, 되었다.”
‘뭐가 됐다는 거냐? 좀 자세히 말해봐라. 이 마두야.’
경정은 대체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약초밭에서 시체를 찾은 천로가 외쳤다.
“폐하. 찾았습니다.”
하신은 천로가 외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귀비는 따라오지 말고 그곳에 서 있어라.”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경정은 다소곳하게 답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흥. 내 처소에서 뭔가 발견되었나 본데 대체 무엇이냐?’
경정은 내공을 눈에 집중하여 안력을 끌어 올렸다.
천로의 앞에 흙이 파헤쳐져 있었고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경정이 노려보자 이내 그녀의 시야에 흑의를 입은 시체가 보였다.
‘뭐야? 저건 시체잖아! 약초밭에 왜 시체가 묻혀 있는 것이지?’
언 땅에 묻힌 시체는 보존 상태가 좋았기에 살아있을 때의 얼굴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경정은 약초밭에서 나온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봉천전에서 황제를 죽이려고 했던 자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