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
‘태산(泰山)보다 큰 황금 부처(敷處)라고?’
‘비밀의 문이 열린다고?’
경정이 벌떡 일어나 투광경이 만들어낸 부처님의 형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강귀인과 소이자는 경정이 왜 저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비 마마님. 왜 그러십니까? 거울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경정은 부처님 그림자를 손으로 매만지며 읊조렸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것이 바로 열쇠였어.”
경정은 천산에 숨겨진 환혼주(換魂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밝아졌다.
경정은 투광경을 품에 들고 그것을 꼭 껴안았다.
“백귀비 마마님······?”
“강귀인 마마. 이것을 제가 써도 되겠습니까?”
“백귀비 마마께서 직접 보화전에서 기도를 올리시려고요?”
“예. 그러려고 합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강귀인은 경정이 기도를 올린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지요. 백귀비 마마께서 기도를 올리시면 하늘도 감동할 것이옵니다.”
“고맙습니다. 강귀인 마마.”
경정은 투광경을 손에 꼭 쥔 채 환하게 웃었다.
‘폐하. 천산에 있는 환혼주. 제가 반드시 찾을 겁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주세요.’
***
경정이 황궁에서 투광경의 비밀을 발견한 그 시각.
노인 두 명과 청년 두 명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천산으로 떠나는 소풍영과 서굉 그리고 고정엽과 경이였다.
소풍영은 뒤따라오는 고정엽을 계속 쳐다봤다.
“소가야. 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이냐? 똥이라도 마려운 것이야? 방금 성문을 나섰는데 좀 참지 그러느냐?”
“아이고. 서가야.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 왜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어?”
“소가야. 황제 폐하를 모시고 천산에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황제가 자신도 가겠다고 했다며? 가서 함께 찾으면 좋지. 어차피 천산에는 아무도 없다. 하신. 그 아이가 다 죽였거든.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폐하께서는 자고독 때문에 고통스러우실 텐데 그 먼 천산까지 가시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쳇. 신의가 당분간 발작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 했다. 혹시라도 발작이 찾아오면 먹으라고 약까지 챙겨주셨는데 무슨 걱정을 그리하는 것이냐?”
“그야. 이 나라의 황제 폐하시니까 그렇지.”
“걱정하지 마라. 하신의 몸을 빌리고 있으니 저 나이대 무인 중에는 최강이다. 천지자도 잘 구슬려서 시간을 벌었다고 했으니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그럴까?”
“그만 걱정하고 어서 가자. 말을 타고 쉼 없이 달리면 열흘 안에 천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소풍영은 고삐를 쥐며 생각했다.
‘경정아. 하신에게 걸리지 말고 황궁에서 잘 있어야 한다. 내가 반드시 환혼주를 찾아서 돌아가마.’
***
경정이 탄 가마가 보화전으로 향했다.
지금 궁 안에는 백귀비가 수면치료에 들어간 황제를 위해 보화전에서 백일기도를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져 난리였다.
백귀비를 질투하던 후궁들도 백일동안 보화전에 들어가 기도를 올리겠다는 경정을 보고 놀라 말을 아꼈다.
성스러운 선녀로 불리는 백귀비를 음해했다고 질타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궁인들은 백귀비의 가마를 보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모두가 고귀한 백귀비를 보며 존경해마지 않았으나 두 사람만은 악의를 품고 그녀의 가마를 주시했다.
한 사람은 채소의의 시녀인 일영이었고 다른 이는 풍도마가의 사람인 칠혈이었다.
‘백귀비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만 가는구나. 이것은 우리 채소의 마마님께는 악재이니라.’
일영이 백귀비의 가마를 노려보고 있는데 이런 일영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칠혈이었다.
백귀비의 가마가 떠나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궁인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일영은 내무부에서 받아온 겨울 옷감을 들고 장춘궁으로 향했다.
일영의 손에 들린 보따리는 아주 볼품없었다.
내무부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기는커녕 문제만 일으키는 채소의에게 좋은 물건을 줄 리가 없었다.
칠혈은 몰래 일영의 뒤를 쫓았다.
일영이 장춘궁으로 들어가자 칠혈은 멀찌감치 서서 궁을 바라봤다.
‘채소의가 신자고에서 일하는 나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군. 하긴 죄인 희빈과 엮였으니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지. 아마도 궁 생활이 지옥일 것이다.’
궁에 잠입한지 오래된 칠혈은 내명부의 여인들이 어떤 삶을 보내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폐하의 총애가 없다면 가문이라도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런데 채소의는 총애도 받지 못하고 가문도 별 볼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으면서 총명하지도 못하다니. 안타깝구나. 채소의. 너는 절대 백귀비를 이기지 못한다.’
비웃음을 흘리며 뒤돌아서는 칠혈이 그 자리에 멈췄다.
칠혈이 고개를 돌려 채소의가 사는 초라한 궁을 바라봤다.
‘후궁이라··· 후궁.’
칠혈의 얼굴에서 악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힘들게 건청궁에 숨어들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다. 폐하의 후궁이 되면 언제든 건청궁에 드나들 수 있으니 말이야.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황제를 암살할 방도를 찾은 칠혈의 얼굴에 그제야 평온함이 감돌았다.
***
이곳은 천산의 요새 안.
고정엽 일행은 벌써 사흘째 요새 안을 돌며 헤매고 있었다.
분화구 안은 성(城)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컸기에 이곳을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서가야. 이대로면 일 년이 걸려도 보물을 찾지 못할 것 같다. 대체 이놈들이 어디에 보물을 숨겨뒀다는 말이냐?”
“분명히 그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북쪽 절벽 아래에 개미굴 같은 굴이 많다. 그곳에 보물을 숨겨두기 안성맞춤이란 말이다.”
“지금 그 말만 스무 번은 넘게 들었다. 이제는 안 속으련다.”
소풍영이 자리에 주저앉자 고정엽이 달려가 그에게 물 주머니를 건넸다.
“소풍영 대협. 드시지요.”
“폐하. 이런 것은 소인이 하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소풍영은 이런 일까지 직접하는 고정엽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폐하. 아무래도 하산해야 할것 같습니다. 벽곡단이 바닥이 났습니다. 소인이 아랫마을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경이를 보내시지요.”
“음. 경이요?”
소풍영이 경을 바라보자 경이 놀라 고정엽의 등 뒤로 숨었다.
“저놈이 또또 내외하는구나. 안 잡아먹는다. 이놈아.”
고정엽은 경을 달래며 말했다.
“경아. 너 혼자 아랫마을에 다녀올 수 있겠느냐?”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녀올 수 있습니다. 가주.”
“그래. 여기 돈을 줄 테니 지난번에 저자에서 사왔던 고대로 사오면 된다. 알겠지?”
“예. 가주.”
경이 일어서자 소풍영과 서굉이 동시에 외쳤다.
“경아. 술도 좀 사와라.”
“경아. 죽엽 청주 한 병을 사오거라.”
소풍영이 서굉을 보며 말했다.
“서가야. 너는 얼마 전까지 병자였다. 무슨 술을 마신다고 그러느냐?”
“소가야. 내 뼈는 이미 다 붙었다. 보면 모르겠어? 그리고 네놈의 입만 입이냐? 내 입도 입이다.”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소풍영과 서굉이 싸우고 있는데 경이 뭔가를 발견하고 고정엽에게 말했다.
“가주님. 저기를 보십시오.”
“응? 왜 그러느냐?”
“저기 산꼭대기 위에서 뭔가 번쩍거립니다.”
“번쩍거려? 대체 뭐가 번쩍거린다는 말이냐?”
고정엽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경의 말대로 분화구의 꼭대기에서 뭔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런데 빛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반대편 분화구의 절벽을 비추는 것이 아닌가?
소풍영과 서굉도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싸움을 멈췄다.
그때 절벽을 비추던 빛이 점차 모이더니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으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형상.
모두 대경실색한 얼굴로 절벽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때 고정엽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태산(泰山)보다 큰 황금 부처(敷處)······?”
순간 모두의 얼굴이 희색으로 물들었다.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바로 그것이었다.
오대악적이 남긴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
***
이곳은 천산의 분화구.
경정은 깎아지는 듯한 절벽을 올라 분화구 아래를 내려다봤다.
도성만큼이나 큰 분지가 분화구 속에 숨겨져 있었으며 한가운데에는 사람이 살법한 도시도 꾸며져 있었다.
“저곳이 폐하께서 말씀하신 마교의 은거지로구나.”
경정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분화구 위의 절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안에 스승님과 폐하가 계실 것 같은데 어디에 계실지 모르겠구나. 너무 커서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경정은 출궁하고 장원에 도착해서야 소풍영과 고정엽이 이미 천산으로 떠났음을 알게 됐다.
뒤늦게 그들을 따라 천산에 왔지만 당최 고정엽과 스승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이제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경정은 바닥에 주저앉아 매고 온 궤짝 안에서 투광경을 꺼내 살폈다.
솜이불 안에 고이 모셔서 가지고 온 투광경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거울에 빛을 비추니 경정의 발아래 작은 부처님의 형상이 생겨났다.
“진짜 신기한 물건이야. 오대악적이 불가의 물건을 이용하여 보물을 숨겼을 줄 누가 알았겠어?”
경정은 투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결국 그것을 들고 분화구 주위를 돌아보기로 했다.
“폐하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물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선은 보물을 먼저 찾아보자.”
경정은 처음에는 투광경을 가슴에 안고 걸었는데 걷기가 불편했다.
어쩔 수 없이 투광경을 등과 머리에 이고 움직여 봤다.
들고 걷는 것 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쏟아지는 태양 빛을 가리는 효과도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분화구 주위를 반쯤 돌았을까?
갑자기 그녀의 몸 주위로 커다란 빛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게 뭐지?’
경정은 화들짝 놀라 머리에 이고 있던 투광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바닥에 직선으로 세워놓은 투광경이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닌가?
경정은 화들짝 놀라서 투광경과 멀리 떨어져서 분화구의 반대편을 쳐다봤다.
반대편에 무슨 장치가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쪽에서 투광경에 빛을 쏘고 있음이 분명했다.
경정은 투광경의 위치를 바꾸며 조정했고 이내 빛을 가장 잘 반사하는 각도가 맞춰졌다.
투광경이 모여든 빛을 흡수하더니 반대편 절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경정은 서서히 나타나는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오오.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경정은 투광경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부처의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절벽에 그려진 부처의 형상을 감상하던 경정의 미간이 갑자기 획 찌푸려졌다.
“저것은 뭐야?”
자세히 살펴보니 부처님의 머리 쪽에 마치 뿔이 난 것처럼 뭔가 튀어나와있었다.
성스러운 부처님의 모습은 어느새 뿔이 난 악신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부처님이 왜 갑자기 악신으로 변하셨을까?”
순간 경정의 눈이 커졌다.
“어······? 그러고 보니 악신이라면 마교와 딱 맞지 않아?”
경정은 안력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반대편 절벽의 뿔처럼 보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뿔이 아니구나. 저것은 뿔이 아니야.”
경정은 그제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벽 한가운데 뚫린 동굴이었다.
“찾았다. 바로 저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어. 저기가 바로 비밀의 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