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51)

나는 규환마가의 가주가 아니다.

“마마님. 궁 밖이라니요? 지금 독살사건 때문에 궁 안이 어수선한데 출궁하다 걸리기라도 하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경양궁의 궁인들이 죄다 신형사에 끌려가 희빈의 일로 추궁을 받고 있었고 냉궁에서는 선비가 공범으로 몰려 죽지 않았는가?

소이자는 이럴 때 일수록 몸을 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마님. 시기가 좋지 않으니 청초각에 계시지요. 소인이 출궁하여 살피고 돌아오겠습니다.”

소이자는 주인을 걱정했지만, 경정의 생각은 달랐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궁 안이 혼란스러울 때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가자. 소이자야.”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보화전으로 가야지.”

“희빈께서 돌아가신··· 그 보화전이요?”

소이자는 참혹한 희빈의 시신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래. 희빈이 죽었으니 내가 선방에 들어 넋이라도 위로해야 옳다. 가자. 소이자.”

보화전에 간다는 말에 소이자는 울상을 지었다.

“아이고. 마마님.”

***

이곳은 장춘궁(長春宮).

처소에 틀어박힌 채소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폐하는 인간의 정이 없어. 지옥에서 온 아수라가 분명해.”

채소의는 희빈의 마지막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서히 빛을 잃고 허물어지던 희빈의 마지막 모습이 채소의를 괴롭혔다.

“너무 무섭구나. 이제 궁에서 어찌 살아가야 한단 말이냐.”

냉궁에서 고초를 겪으며 독해진 그녀였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깨달았다.

자신은 적을 이기고 위로 올라갈 주인공이 아니라 악역에게 당해 쓰러지는 졸개라는 사실을 말이다.

채소의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데 시녀 일영이 탕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마마님. 이것을 좀 드시지요.”

“필요 없다. 가져가라.”

채소의는 일영의 건네는 약그릇을 밀어냈다.

“일영아. 바깥의 상황은 어떠하냐? 혹시 폐하께서 마음이 바뀌시어 나를 죽이고자 하시지는 않으시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후 마마께서 직접 약을 보내셨습니다. 마마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후 마마 말고 폐하께서는 뭐라 시든?”

“폐하께서는 지금 건청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중서성 도철 대인께서 독대를 원하셨지만 돌려보내셨다고 합니다.”

채소의는 두려웠다.

황제가 언제 마음이 바뀌어 그녀를 죽이고자 할지 알 수 없었다.

“마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백빈께서 마마님을 도와주시려나 봅니다.”

“백빈이 나를?”

채소의가 눈을 크게 떴다.

우습게도 보화전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챙겨준 사람이 백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소의는 여전히 백빈을 증오했다.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백빈이 왜 나를 돕는다는 것이냐?”

“백빈께서 지금 보화전 선방에 들어 마마님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계시다고 합니다.”

“백빈이 나를 위해?”

“이번 일을 겪은 내명부의 모든 마마님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데 결국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마마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마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요.”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될까?”

“그럼요. 사실 희빈을 그리 만든 것은 희빈 자신입니다. 질투에 눈이 멀어 독이 묻은 비녀를 들고 백빈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니 동창은 폐하를 향한 역모라고 생각하고 죄인 희빈을 죽인 것이죠.”

“그래. 맞다. 희빈을 죽인 것은 폐하가 아니라 천로라는 동창이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백빈 마마님을 총애하시는 것 같으니 백빈께서 보화전에서 기도를 올리시는 모습을 보고 이번 일을 더는 문제 삼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조용하지 않습니까?”

순간 채소의의 눈빛이 번뜩였다.

“선비는 어찌 되었지?”

“죄인 이선은 냉궁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채소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일영. 약을 내놓거라.”

“잘 생각하셨습니다. 약을 드시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십시오.”

“그래. 나는 일어설 것이다. 훗날에는 온전히 내 힘만으로 백빈을 끌어내릴 것이다. 반드시.”

***

이곳은 소풍영의 장원에 있는 노천 욕탕.

욕탕 안에는 당소소가 채워 놓은 약초로 가득했다.

고정엽은 치료를 위해 약욕(藥浴)을 하고 있었고 옆에서 경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가주. 발작이 오지 않은지 열흘이 넘었습니다.”

“신의님의 의술이 이렇듯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구나. 생각해보니 당태의보다 훌륭하고 철한이 그놈은 우리 신의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사천당가에서 인재가 났어.”

고정엽은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어떻게 사천당가의 사람이 수녀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철한이 그놈이 내막을 말하지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가주. 잠시 이곳에 계시지요. 내실에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 이제 약욕을 끝내고 마가로 돌아가야겠구나. 너무 늦게 가면 천지자가 의심할 수도 있어.”

“예. 가주.”

경이 등불을 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이 전각은 소풍영이 당소소를 위해 마련해준 곳이었다.

위층에는 수면치료를 하는 서굉이 쓰고 있었고 일 층은 고정엽이 쓰고 있었다.

내실 안으로 들어간 경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은 안에 무공을 할 줄 아는 강호인이 들어있음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소풍영이 내실 안에서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은 굳은 얼굴을 펴고 조심스럽게 내실의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실 안에는 하얗게 센 머리를 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소풍영 대협. 가주께서 약욕이 끝나셨습니다. 소인은 의복을 챙겨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나오지 마십시오.”

경은 소풍영에게 붙잡힐까 봐 두려워하며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경이 탁자 위에 놓인 고정엽의 옷을 집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노인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경의 손을 붙잡았다.

“가주라 하였느냐?”

“소풍영 대협······?”

“네놈의 가주가 설마하니 하씨 성에 이름인 ‘신’인 사내는 아니겠지?”

노인이 고개를 돌리자 경은 대경실색했다.

서굉은 눈을 부라린 채 규환마가의 문양이 수놓아진 고정엽의 의복을 꽉 움켜쥐었다.

“규환마가의 어린 가주가 자고독을 치료하기 위해 신의를 찾아왔구나. 바보 같은 소풍영은 악마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신의님께 치료를 맡겼어. 참나.”

수면 치료를 위해 약을 먹은 서굉은 한 달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당소소의 예상과 달리 서굉은 약을 먹은 지 열흘 만에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서굉은 목이 말라서 아래층에 내려왔다가 규환마가의 문양이 수놓아진 옷을 발견한 것이었다.

“네 가주는 어디에 있느냐?”

경은 눈앞의 노인이 고수임을 알아채고 달려들었다.

그에게는 하늘과도 같은 가주님을 죽이려는 노인을 막아선 것이다.

서굉은 달려드는 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경의 발에 지풍을 날렸다.

새햐얀 빛이 터지더니 경의 발이 바닥에 붙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도 서굉의 몸놀림은 엄청났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온 서굉이 경의 입술을 만졌다.

경은 입술에 재갈을 물린 듯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규환마가의 잔당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실토해야 하니 너는 죽이지 않으마. 하지만 네놈의 가주는 다르지. 그 악마 놈은 내 손에 당장 죽어줘야겠다.”

서굉은 경을 남겨두고 고정엽의 의복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

당소소와 열음, 소천 그리고 소풍영은 오랜만에 저자에 나가 물건을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과를 먹으며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열음이 난데없이 소리를 질렀다.

“아! 맞다.”

“열음아. 귀 떨어질 뻔 했다. 왜 그러느냐?”

“소할아버지. 경이의 당과만 사고 가주님의 당과는 빼먹었습니다.”

“가주와 경이는 지금쯤이면 옆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아닙니다. 소할아버지. 신의님이 오늘 밤에 약욕을 하고 가야 한다고 준비해 놓으셨거든요. 지금 약욕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냐?”

소풍영은 제 몫으로 꼬불쳐 놓은 당과 두 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 안된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가주 그놈이 몸이 아프니 내 것을 내어주마.”

소풍영이 당과를 준다고 하자 열음과 소천이 화들짝 놀랐다.

“소할아버지께서 자기 몫을 떼어주신다고요? 정말요?”

“이놈들아.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다친 서가를 데리고 천산에서 이곳까지 이역만리를 업고 온 것이 바로 나다.”

소풍영이 으스대자 열음과 소천이 까르르 웃었다.

“그럼, 가주님께는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건데요? 소할아버지?”

“그거야 이웃사촌이니까 그렇지.”

“정말로 그것뿐인가요?”

열음의 물음에 소풍영은 웃음을 흘렸다.

‘사실은 놈이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무공의 귀재라서 그렇다. 내가 고쳐서 제자로 삼을 것이로다. 하하하.’

소풍영이 웃다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렸다.

“왜 그러세요? 소할아버지?”

소풍영은 방금 노천 욕탕으로 향하는 검은 그림자를 봤다.

소풍영은 들고 있던 당과를 열음에게 맡기고 욕탕으로 달려갔다.

***

고정엽은 눈앞에 등장한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을 보고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뉘십니까?”

“이곳에서 뻔뻔하게 약욕을 즐기고 있다니. 어이가 없구나. 아이야.”

“혹시 저를 아십니까?”

“너를 아느냐고? 내가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그날 천산에 모인 이들 중에 너를 아는 이가 얼마나 있었을까? 내가 알기로 거의 없었다. 그들은 마가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천산의 요새에 모인 것이었다.”

“천산의··· 요새라고요?”

고정엽은 속으로 큰일이 났다 싶었다.

‘큰일이구나. 마교의 사람인가 보다. 대체 누구지? 일기장에는 분명 천산에 모인 마가를 모두 죽였다고 쓰여 있었는데?’

순간 고정엽의 눈이 커졌다.

‘그래. 마교 교주의 좌사자. 빙염마제는 죽이지 않고 회옥이라는 진에 가두고 왔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빙염마제인가?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만났을까? 내가 하신이 아니라고 말하면 믿어줄까?’

서굉이 천천히 고정엽의 앞으로 걸어왔다.

규환마가 가주의 몸에는 자고독을 치료한 참혹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저것이 바로 자고독이라는 것이구나.’

흉터를 본 서굉은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저 아이의 이름이 하신이라했지? 조부의 이름을 이어받았구나. 신아. 왜 교주를 시해하려고 하였는가?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진정 몰랐는가? 자네의 한순간 실수로 자손들이 대대손손 고통을 겪고 있단 말이다.’

서굉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기 전에는 하신을 동정하는 눈빛이 언뜻 보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이야. 너는 뼛속까지 악인이다. 너 같은 악마를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다. 미안하구나. 지옥에 먼저 가 있으면 내가 곧 따라가마.”

“대협.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하신이 아닙니다.”

“그 맑은 눈동자에 다시 속지 않는다. 죽어라!”

서굉이 쏘아보낸 장이 날아왔다.

고정엽은 대경실색하여 몸을 뒤로 날렸고 간신히 날아오는 장을 피했다.

서굉이 완벽히 회복한 상태였다면 고정엽은 절대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콰앙!’

노천 욕탕의 한쪽 벽이 방금 서굉의 공격으로 뻥 뚫리고 말았다.

그때 뚫린 벽 사이로 소풍영이 날아왔다.

“서가야! 너 지금 뭐하는 것이냐?”

“소풍영! 이자가 누군지 알고 들인 것이냐?”

“갑자기 깨어나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 어리석은 노인네야. 저놈이 바로 천산에서 마가를 모두 도륙한 규환마가의 어린 가주란 말이다.”

“뭐라?”

소풍영이 놀라 구석에 도망친 고정엽을 바라봤다.

“소풍영 대협. 오해입니다. 저는 절대 규환마가의 가주가 아닙니다.”

“소가야. 자고독을 기억하느냐? 교주의 암살 시도를 했던 풍도마가와 규환마가가가 자고독을 받았고 그 독을 먹으면 후손까지 모두 독에 중독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느냔 말이다.”

“그럼, 저자가 중독된 것이 마교의 독이란 말인가?”

“그래. 맞다. 저자는 신의에게 치료받기 위해 너를 속인 것이다.”

서굉의 말에 소풍영의 안광이 번뜩였다.

서굉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소풍영까지 등장하자 고정엽은 눈앞이 깜깜했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내가 하신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갑자기 뚫린 노천 욕탕의 하늘에서 뭔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고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흑의인이 천천히 일어서서 고개를 들었다.

흑의인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고 소리쳤다.

“폐하! 제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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