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51)

물고 물리는 악인의 최후

경정은 희빈이 궁녀를 죽여 우물에 버린 일은 알지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체? 갑자기 무슨 시체란 말인가?’

경정이 고개를 돌려 희빈과 채소의를 바라봤다.

우물에서 시체가 나왔다는 말에 채소의는 눈을 번뜩이며 좋아했지만 희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아하! 희빈이 수하를 죽여 입을 막았구나. 채소의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분명 그일로 뭔가 일을 꾸민 것이 분명해.’

경정은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이 암투의 주인공은 더는 내가 아니다. 희빈과 채소의가 주인공이 되었어. 두 사람이 어찌 서로 물어뜯는지 편하게 구경이나 해볼까?’

하신은 우물에서 시체가 나왔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존귀한 여인들이 사는 내명부가 이런 곳이었군. 마교 본산도 이렇게 피 튀기는 암투가 벌어지지는 아니한데 말이야..’

그때 채소의가 앞으로 달려들어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외쳤다.

“폐하. 경양궁의 시녀인 진슬이 분명합니다. 진슬이 희빈 마마님의 계략을 수행하는 측근 시녀인데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채소의가 진슬을 거론하자 희빈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 입 닥쳐라! 채소의.”

“당장 시신을 가져와 보라고 할까요? 내 말이 맞는지 희빈 마마님의 말이 맞는지 알아보지요.”

“감히 성스러운 보화전에 천한 궁인의 시체를 가져오라 말하는 것이냐?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채소의.”

“이것을 좀 보십시오. 폐하. 희빈께서는 본인의 죄가 탄로 날 것이 두려워 그런 것이옵니다.”

하신은 시끄럽게 떠드는 여인들의 싸움이 짜증이 나는지 천로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그 시체를 이곳에 가져와라.”

“예. 폐하.”

***

고정엽은 지금 몹시도 불편했다.

눈앞에 당소소와 열음 그리고 소천이 신의와 의녀가 되어 그를 치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 밖에서 만나니 참 쑥스럽구먼.’

그때 당소소가 장침을 꺼내들고 말했다.

“가주님. 아프시더라도 잠시 참아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아픔을 잘 참는······ 헉!”

당소소의 장침이 고정엽의 척수뼈 아래로 깊게 들어갔다.

고정엽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합죽이가 됐다.

“아프지요? 이 침이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잘 참으시네요.”

“아. 예.”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럼, 더 아픕니다.”

“······하.”

“일다경은 그러고 있어야 하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 사이에 다리에도 침을 좀 놓겠습니다.”

“······허.”

당소소가 웃으며 다른 침을 꺼냈다.

그것 또한 엄청나게 길고 두꺼운 장침이었다.

고정엽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사천당가라 그런지 맵구나. 철한이 그놈도 손이 매운데 같은 핏줄이라 그런지 신의님 역시 장난이 아니야.’

“열음. 소천. 얼음물을 준비해라. 시침이 끝나면 얼음물로 몸을 씻어내야 한다.”

“예. 신의님.”

열음과 소천이 달려가더니 냇가에서 가져온 두꺼운 얼음이 담긴 항아리를 들고 나타났다.

항아리가 꽤 무거웠기에 경이 그것을 옮기는데 도움을 줬다.

그때 고정엽의 척추에 박힌 장침이 뽑혀 나왔다.

‘크헉!’

고정엽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당소소는 곧바로 허벅지에 찔러 넣었던 장침도 뽑았다.

‘컥!’

고정엽은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되었습니다. 일어서실 수 있겠지요?”

“예. 신의님.”

“그럼, 이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옷을 입은 채 들어가셔야 합니다. 나오면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고요.”

고정엽은 얼음이 가득한 항아리를 보며 침음을 삼켰다.

‘어찌 된 것이 자고독의 발작보다 치료가 더 고통스럽구나.’

고정엽이 주저하자 경이 다가와 그의 허리를 잡았다.

“가주님. 제가 돕겠습니다.”

“잠! 잠깐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고정엽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경이 고정엽을 들어 항아리 안에 집어넣었다.

당소소와 열음 그리고 소천은 경이 힘이 세다며 칭찬했다.

“경이가 인제 보니 힘이 아주 세구나.”

“경이 오라버니 최고예요.”

“가주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든든한 시비가 항상 곁을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얼음물 항아리에 들어간 고정엽은 달달 떨리는 입으로 간신히 답했다.

“예. 그. 그렇지요.”

***

보화전의 한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한구가 누워있다.

후궁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한쪽에 비켜섰고 황후가 그들을 걱정하며 챙겼다.

“안심해라. 폐하께서는 죽은 궁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이다.”

황후의 말에 강하연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답했다.

“그런 것이면 우리는 다 물리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무섭습니다. 황후 마마.”

황후도 강하연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황제의 명을 하늘과도 같았기에 함부로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시체 옆에는 희빈과 채소의 그리고 경정이 서 있었다.

경정은 두려워하며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연기였고 가린 소매를 살짝 들어 시체를 확인했다.

‘역시 채소의가 시체에 손을 썼군. 희빈과 선비를 함께 엮어서 보내려는 것인가? 채소의. 냉궁에 들어갔다가 나왔더니 담이 아주 커졌구나. 입만 살았던 예전과 달라졌어.’

보화전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는 채소의의 말대로 경양궁에서 일하는 진슬이 맞았다.

그런데 진슬의 허리춤에 특이한 모양의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경정은 그 열쇠를 보고 실소했다.

‘냉궁 문을 여는 열쇠로구나.’

희빈은 수상한 열쇠가 시체에 매달려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나 궁인들은 저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독을 냉궁에서 얻었구나. 아마도 냉궁에 갇혀 있는 선비와 작당한 것으로 몰아붙이겠지. 원래 계획대로 내가 황후 마마님을 죽인 범인으로 몰려 처결을 받고 나면 그 후에 이 시체가 황궁에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날이 예년보다 따뜻하여 시체가 생각보다 일찍 떠올라 빨리 발견된 것이로다.’

경정은 희빈과 채소의를 싸우게 해서 그들의 계략을 타파하려고 했는데 애초에 그들은 같은 편이 아니었다.

‘참으로 악랄한 수법이로구나. 채소의가 냉궁에서 선비에게 배운 것이 적지 않아.’

경정이 채소의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천로가 냉궁의 열쇠를 찾아 황제에게 고했다.

“폐하. 이것은 냉궁의 열쇠이옵니다. 그리고 방금 내의원 어의가 확인했는데 장신구에 발라져 있는 독은 냉궁에 사는 죄인들이 암암리에 숨기고 다니는 독이 맞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채소의의 말이 맞았군. 희빈이 냉궁에서 독을 구해서 채소의를 죽이고 그것으로 백빈을 옭아매려 했어.”

희빈은 지금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폐하. 신첩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 저기 죽어 있는 시체가 경양궁에서 일하는 궁녀가 아니라는 것이냐?”

“그것은 맞지만······. 왜 우물에 빠져 죽었는지 신첩은 알지 못합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희빈 마마. 폐하. 진슬의 손톱을 확인하여 주시옵소서. 장신구에 독을 발랐다면 필시 손톱 밑이 거뭇할 것입니다.”

하신이 손을 들자 천로가 즉각 진슬의 손톱 밑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채소의의 음모입니다.”

그때 희빈의 눈에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는 백빈이 보였다.

백빈은 소매로 눈을 가린 채 진슬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경정의 모습을 보자 희빈은 눈이 뒤집혔다.

“백빈! 네가 채소의와 결탁하여 나를 음해하는 것이다. 멍청한 채소의가 이런 일을 꾸밀 리가 없지. 모두 네가 꾸민 짓이지?”

분노한 희빈이 눈을 뒤집고 경정에게 달려들었다.

“어머! 사람 살려!”

경정이 오두방정을 떨며 슬쩍 옆으로 피하며 엎어지는 시늉을 하는 그때였다.

쓰러지는 척하는 경정을 누군가 등 뒤에서 받아냈다.

‘누구야? 감히 폐하의 후궁을 건드리는 자가? 무엄하구나! 어?’

순간 경정의 눈이 커졌다.

경정을 받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가짜 황제였다.

경정은 척이 아니라 진짜로 놀라서 황급히 몸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하신은 한번 잡은 경정을 쉽사리 놔줄생각이 없었다.

황제와 백빈이 서로 껴안자 지켜보던 궁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경정은 당장이라도 황제의 가슴에 장을 날리고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이 마두야! 이거 놔라!’

그런데 그때였다.

분노로 정신이 혼미해진 희빈이 증거로 바닥에 놔둔 홍옥 비녀를 들고 경정을 향해 달려왔다.

하신은 미쳐서 뵈는 게 없는 희빈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하신이 몸을 틀었고 경정은 그 틈을 타서 옆으로 도망쳐 황후와 다른 후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달려가는 경정이 눈에 대경실색한 황후의 얼굴이 보였다.

황후뿐만 아니라 다른 후궁들도 눈이 휘둥그레진 채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경정은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순간 뛰어가던 경정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짜 황제의 앞에 피 칠갑을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희빈이었기 때문이다.

희빈의 몸은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신을 지키던 천로가 달려드는 희빈에게 검을 내지른 탓이었다.

지척에 있던 채소의는 몸이 절단돼서 죽은 희빈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혼절하고 말았다.

‘미친놈이 아닌가? 감히 신성한 보화전에서 살인을 해?’

천로는 피가 묻은 검을 털더니 가짜 황제의 안위를 살폈다.

‘마두가 시킨 짓이로구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폐하의 후궁을 저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희빈을 죽인 것은 천로의 검이었으나 시킨 것은 가짜 황제가 분명했다.

경정은 가짜 황제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경정은 정신을 차리고 황후에게 달려가 그녀를 챙겼다.

황후는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황후 마마. 다른 마마님들 저를 따라오십시오.”

“백··· 백빈···.”

“황후 마마. 저곳은 보지 마시고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시지요.”

“하지만 백빈.”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마마. 제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황후는 떨리는 손으로 백빈의 손을 꼭 잡았다.

황제는 독을 가져온 범인을 잡기 전까지는 보화전의 문을 열어주지 말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범인이 사로잡혀 처결까지 끝냈으니 더는 황후와 후궁들을 그곳에 가둘 명분이 없었다.

하신은 후궁들을 통솔하여 보화전을 떠나는 경정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생각하기에 오늘 희빈의 계략이 드러난 것은 아무래도 백빈이 안배한 것 같았다.

‘백빈. 총명함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하지만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정적을 모두 처리하다니 그 점은 높이 사마.’

하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희빈과 기절한 채소의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때 천로가 다가와 물었다.

“폐하. 채소의 마마님은 어찌 처결할까요?”

“살려서 돌려보내라.”

“그래도 될까요? 채소의 마마님이 희빈과 계략을 꾸민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일은 둘 사이가 틀어져서 벌어진 일이겠지요.”

“그래서 살리기로 했다. 시체에 손을 쓰면서까지 치밀하게 준비했으니 채소의는 살 가치가 있다. 다만 이 험난한 내명부에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

천로는 황제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냉궁에서 독약을 준비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자를 찾아내 죽여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폐하.”

보화전 밖으로 나온 하신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오랜만에 피를 보니 좋구나.’

하신은 황궁 생활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이곳이 마가와 다를 바 없는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

청초각에 돌아온 경정은 머리가 아팠다.

‘마두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저 미친놈을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

경정은 황궁에서 살인까지 한 가짜 황제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천산에 가신 소풍영 스승님은 대체 왜 연락이 없을까? 소식이 없어서 보낸 하오문 자객도 연락이 없고. 에잇. 되는 일이 없구나.’

경정이 고민하고 있는데 소이자가 처소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마마님. 큰일 났습니다. 냉궁에 갇힌 죄인, 이선의 목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선? 선비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조사를 길게 하지도 않고 바로 처결하는구나. 두렵구나. 두려워.”

경정은 가짜 황제와 천로가 날뛰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소이자가 소매 안에서 서찰을 꺼내 경정에게 건넸다.

“마마님. 윤영에게 서찰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걱정이 많으시겠지만, 시간을 좀 내서 이것을 살펴보시지요.”

“윤영이라고?”

경정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이자의 손에서 서찰을 빼앗아 갔다.

이번 일로 근심이 가득했던 경정의 얼굴에 어느덧 희색이 떠올랐다.

“마마님. 왜 그러십니까?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아주 좋은 소식이다. 이제 드디어 폐하를 찾으러 갈 수 있겠어.”

“폐하를 찾으러 가시려고요? 건청궁으로요?”

“아니, 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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