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51)

비급을 노리는 가짜 황제

당소소가 멈춰서자 열음이 그녀를 살폈다.

“신의님. 왜 그러십니까?”

“열음. 저기 옆에 있는 장원에서 약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으냐?”

“냄새요?”

열음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소인은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아무래도 옆집에 병자가 살고 있나 보다. 중독이 심한 모양인데 잘 치료하고 있을지 모르겠어.”

당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두 노인의 치료가 더 급했다.

“어서 가자. 저분들을 치료하려면 한시가 급하다.”

“예. 신의님.”

***

소풍영의 장원에 불이 켜졌을 때 규환마가의 장원에도 불이 커졌다.

천지자는 가주가 내린 시험의 정답지를 내기 위해 오늘 가주전으로 왔다.

천지자는 규환마가의 인력을 어찌 배치할지 적은 글을 가주에게 건넸다.

고정엽은 천지자의 계획서를 확인하고 생각에 빠졌다.

‘규환마가의 인원을 천산으로 보내려고 하는군. 하긴 그곳에 아무도 모르는 요새가 있다고 하니 숨어 있기에 안성맞춤이겠지. 문제는 황궁에서 내 노릇을 하는 하신이란 놈이 천산의 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 이곳에 마인들을 보내면 안 된다.’

고정엽이 계획서를 접고 천지자를 바라봤다.

천지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가주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지자. 이리 오거라.”

“예. 가주.”

천지자가 고정엽의 가까이에 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올리는 규환마가의 인사법을 했다.

고정엽은 그의 손을 천지자의 손바닥에 올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지자. 너의 계획은 장단점이 명확하구나.”

“소신이 아둔하니 풀어서 설명해 주십시오. 가주.”

고정엽은 눈을 똥그랗게 뜨는 천지자를 보며 물었다.

“천산에 마가의 사람들을 보내면 그들은 안전할 것이다. 너는 우리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 그리 결정한 것이다. 맞는가?”

고정엽이 묻자 천지자는 움찔했다.

‘도저히 방법이 나오지 않아 천산으로 돌아가자고 쓴 것인데 가주께서 오해하셨구나. 어떻게 하지?’

천지자는 결국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가주. 고생한 이들이 혹여 무림맹의 추격에 사로잡힐까 두려워 천산을 떠올린 것입니다.”

“천지자. 너의 생각은 가상하나 그리되면 천산을 나와 중원에 머무른 보람이 없구나.”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이미 오랫동안 터를 닦아 놓았던 곳을 죄다 버렸습니다. 가주.”

고정엽은 그를 바라보는 천지자를 보며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하신이 쓴 일기장의 내용이 맞았군. 마후가 진정한 하신의 오른팔이고 천지자는 그저 술사에 지나지 않아. 천지자는 마가의 사람이지만 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어. 그래서 하신은 천지자를 절대 마가의 일에는 쓰지 않았다고 했지. 뼛속까지 마인인 마후가 죽고 강호인과 다를 바가 없는 천지자만 남아있는 것이 내게는 불행 중 다행이야.’

고정엽은 다정한 눈빛으로 천지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가의 사람들은 변방으로 보낼 것이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운남성이다.”

“운남이라고요? 하지만 그곳은 대리국(大理國)과 인접한 곳이 아닙니까?”

“맞다. 내가 운남성의 청죽산에 산채를 만들어 놓았다. 마가의 인원을 모두 데려가도 충분한 아주 큰 산채니라.”

“산채라니요? 가주께서 언제 그런 것을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마후와 내가 은밀히 꾸민 것이다. 하지만 마후가 죽었으니 이제는 자네가 알아야겠지.”

마후를 대신한다는 말에 천지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정엽은 기뻐하는 천지자를 보며 생각했다.

‘청죽산에 만들어 놓은 산채가 이리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군. 사실 그곳은 하성군을 위해 만든 은거지인데 말이야.’

규환마가의 사람들을 변방에 보내면 강호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할 수 있었고 여차하면 섭장군이 이끄는 하성군이 그들을 칠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고정엽이 고갯짓하자 경이 나타나 서찰을 천지자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가주?”

“운남성에 가면 대륭상단이라고 있을 것이다. 그곳의 상단주에게 이것을 보여라. 그럼, 마가의 사람들을 내가 만들어 놓은 산채로 안내할 것이다.”

“가주께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아셨던 것입니까? 어찌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셨습니까?”

천지자의 얼굴에 가주를 향한 존경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자네가 한 가지 더 해줘야 할 것이 있다.”

“말씀하시지요. 가주.”

“강호에 무림맹 말고 우리를 뒤쫓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무림맹이 아니라요? 대체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은신을 잘하는 고수 일부를 변방에 보내지 말고 강호에 남겨라.”

“어찌할까요? 발견하는 즉시 죽이라 명을 내릴까요?”

“아니다. 살려서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알겠느냐?”

“명을 받들겠습니다. 가주.”

천지자에게 마지막 명까지 전한 고정엽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고독의 중독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어 하신이 줄곧 타고 다녔던 기관으로 만들어진 의자였다.

고정엽은 뒷짐을 지고 열린 창문으로 달을 바라봤다.

‘하신이 분명 사람을 보내 나와 마가를 쫓고 있을 것이다. 대체 누굴 보냈는지 알아야겠다. 이왕이면 엄세록이면 좋을 텐데······. 아니야. 엄세록 그치는 눈치가 없어서 이미 하신의 눈 밖에 났을 것이야.’

고정엽이 엄세록을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뱉자 이를 바라보는 천지자는 가슴이 아팠다.

‘가주께서 변방에 숨어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아파하시는구나. 아! 가주님. 소신이 충성을 다해 모실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천지자가 무릎을 꿇은 채 기어서 고정엽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정엽은 그제야 천지자가 지척에 있음을 깨닫고 규환마가의 가주인 척을 했다.

“천지자. 앞으로 더 큰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가를 모두 도륙한 것은 그 시작일 뿐이지. 그러니 앞으로 네가 참으로 중요하다. 마후의 몫까지 다하거라. 나는 너를 믿는다.”

고정엽의 마지막 한마디가 천지자의 가슴을 울렸다.

천지자가 엎드려 가주의 신발에 입을 맞추었다.

“가주. 믿어주십시오. 오욕의 세월을 씻고 부흥에 앞장서겠습니다.”

***

이곳은 황궁 서고, 창천각.

창천각에서만 반백 년을 지낸 이공공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당황했다.

며칠 전, 동창인 천로의 방문도 수상했는데 이렇게 황제까지 등장하자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폐하. 어인 일이 이 누추한 곳을 방문 해 주셨습니까?”

이공공은 공손한 태도로 황제를 맞이했다.

하신은 천로에게 받은 비급 목록을 탁자에 펼쳐 보였다.

목록에는 붉은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이공공이 살펴보니 하나같이 창천각의 일급 보관실에 있는 책이었다.

이공공이 말이 없자 하신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을 죄다 가져와라.”

이공공은 당황하지 않고 공손히 예를 올리며 답했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폐하. 말씀하신 책을 찾아 건청궁에 보내겠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가져오거라.”

“하지만 책을 모두 찾아 꺼내려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소인이 책을 정리하여 내일 건청궁으로 보내겠습니다.”

“나는 이 책들을 지금 당장, 이곳에서 보길 원한다.”

하신은 규환마가는 물론 팔대 마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재였다.

자고독이 그의 발목을 붙잡지만 않았어도 벌써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섰을 것이었다.

하신은 오늘 밤에 황궁 서고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 확인하여 그가 익힐 비급을 선별할 참이었다.

이공공은 황제와 대면한 적이 많지는 않지만, 그의 성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황제는 지금과 전혀 다른 차분하고 온화한 사람이었기에 이공공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뭐 하는가? 어서 가지고 오라.”

이공공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황제 폐하였기에 그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말씀하신 책이 각기 다른 서고에 보관되어 있어 모두 추려서 가지고 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옵니다.”

“알았으니 어서 찾아라.”

하신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공공은 부리는 환관을 시키지 않고 그가 직접 서고에 가서 책을 가져올 요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공공이 달려 들어왔다.

“폐하!”

하신은 얼굴이 벌게져서 달려오는 소공공을 모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물었다.

“왜 그러느냐?”

“폐하. 큰일 났습니다. 서하공주께서······.”

하신은 서하공주라는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리 놀라는 것이냐? 서하공주가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폐하?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소공공은 너무 놀라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공공은 방금 황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을 똑똑히 목격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서하공주께서 공주부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래? 무슨 사고지?”

소공공은 담담하게 묻는 황제를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서 답해라. 무슨 사고로 죽었느냐?”

“예. 그것이 다름이 아니오라······.”

소공공은 두려운 마음을 뒤로하고 간신히 답했다.

“공주께서 타신 마차가 오성교를 지나다 그만 마차가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마부가 어찌 마차를 몰았길래 다리 아래로 떨어졌을까?”

“다리 위로 갑자기멧돼지가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겨울이라 먹을 것이 없으니 산에서 내려온 것이겠지요.”

“그렇군.”

하신은 천로가 일을 잘 처리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를 귀찮게 하는 것이 사라지고 나니 후련하기까지 했다.

“폐하. 어서 가보시지요.”

“지금? 내가 꼭 가야 하는가?”

“폐하. 서하공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신은 오늘 창천각의 책을 다 볼 생각이었다.

한번 결정한 이상, 그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내일 날이 밝으면 그때 가보겠다. 그러니 소공공은 돌아가라.”

“폐하. 아니 되십니다. 대신들이 이 일을 알면 큰 사달이 일 것입니다.”

하신이 가지 않겠다고 하자 소공공이 끈질기게 매달렸다.

하신은 귀찮게 매달리는 소공공을 노려봤다.

소공공은 살기 어린 하신의 눈빛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신은 그제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황제를 보며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흠. 황제 노릇을 해줘야 하는 것인가? 아! 귀찮구나.’

하신은 결국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공공. 내가 말한 책은 모두 찾아 건청궁으로 보내라.”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하신은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소공공을 쳐다보지도 않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공공은 간신히 일어나 황제를 따라 나갔다.

이공공은 떠나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하다. 어찌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

황궁에 아침이 밝아왔다.

안타까운 서하공주의 소식으로 궁 안은 밤새 뒤숭숭했다.

하지만 황궁의 변두리에 있는 창천각은 이런 일과는 무관하다는 듯, 오늘도 조용한 아침을 맞이했다.

이공공은 황제가 찾아 보내라 했던 책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모두 강호의 무공서적들이로구나. 대체 폐하께서는 이것을 왜 보자고 하시는 것일까?”

이공공은 다른 사람처럼 구는 황제도 수상했지만, 갑자기 무공서적을 가져오라 명을 내린 것도 수상했다.

황제가 내린 명을 수행하기 위해 밤새 일을 하느라 잠을 설친 이공공이 한숨을 쉬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그가 있던 집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은은한 차 향이 퍼지자 이공공은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용정차로구나. 잘 가져왔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야.”

“드시지요. 영감.”

그가 부리는 환관의 목소리가 아님을 눈치챈 이공공의 눈이 순간 커졌다.

찻잔을 건네받으려던 이공공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고 그는 고개를 돌려 말을 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환관으로 변장한 경정이 이공공의 앞으로 달려가 고했다.

“소인은 동창에서 온 소이자라 하옵니다. 건청궁에 책을 옮기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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