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251)

뒤바뀐 사람 (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깊은 잠에 빠져있던 고정엽이 드디어 눈을 떴다.

고정엽이 손을 들자 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 부축했다.

익숙한 손놀림에 고정엽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을 가져오라.”

“예. 가주.”

“이왕이면 차가운 물로 가져오라.”

“예.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가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던 사내가 다가와 고정엽에게 차가운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고정엽은 그것을 단숨에 들이킨 후에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밤새 몇 번이나 깨고 다시 잠들어 같은 꿈을 반복했던 것 같았다.

“등을 밝혀라. 방이 너무 어둡구나.”

“예. 가주.”

고정엽은 그제야 사내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여봐라. 왜 자꾸 나를 가주라 부르는 것이냐?”

사내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등을 켠 후, 고정엽에게 쪼르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등불이 처소 안을 비추었고 고정엽은 그제야 그곳이 눈에 익숙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고정엽이 이마를 짚자 사내가 고개를 들고 고정엽을 살폈다.

“가주님.”

“왜 나를 가주라 부르는 것이냐? 너는 누구냐?”

고정엽의 목소리가 커지자 사내는 놀라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고정엽은 그 인사법을 어디에서 본 것만 같았다.

그때 고정엽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았다.

고정엽은 그제야 이곳이 황궁이 아님을 깨달았다.

황궁이 아닐뿐더러 지난밤에 꿨던 악몽도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래. 나는 제운벽에 있었다. 나는 홍아를 구하고 그자와 함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어.’

고정엽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자잘한 상처는 보였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큰일이로구나. 구사일생으로 살았지만 내가 놈들에게 잡혀 온 모양이로구나. 홍아는 없는 것을 보니 잘 탈출했겠지?’

고정엽은 긴장한 채 눈앞의 사내를 살폈다.

‘저자의 이름이 백경정이라 했지? 내가 던진 진천뢰를 맞고 죽은 것은 시귀가 틀림없으리라.’

고정엽은 홍아의 친우였다는 눈앞의 사내가 혹시라도 그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너는 백경정이 맞느냐?”

고정엽이 묻자 경이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저는 경입니다.”

다 큰 성인이 마치 어린아이가 말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어색한 말투로 말하는 것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백경정이 아니라 경이라고?”

“가주님. 저는 경입니다.”

고정엽은 경이라는 사내가 자신을 자꾸 가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신경이 쓰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사내는 세뇌를 당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경아. 이곳은 대체 어디냐?”

“장원입니다.”

“어디에 있는 무슨 장원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경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열두 번째 장원입니다.”

“열두 번째라고? 혹시 중원 땅에 너희들이 사는 집이 많더냐?”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혹시 도성 안에 있는 장원이냐?”

“음······.”

“좀 더 쉽게 물어보마. 이 장원 근처에 뭐가 있지?”

“장원 옆에 장원이 있습니다. 주위에 집이 아주 많습니다.”

“이 장원의 특별한 점은 없느냐? 큰 나무가 있다든지? 지붕 색이 특이하다든지?”

고정엽이 질문을 쏟아내자 경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에 집이 아주 아주 많습니다.”

경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고 고정엽은 그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정엽이 더는 묻지 않자 경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이내 얼굴을 씻을 물을 챙겨 가지고 들어왔다.

‘이놈들이 납치된 나에게 왜 이리 잘해주는 것인가?’

고정엽은 의아해하면서도 호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미지근한 물에 얼굴을 씻어내자 경이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다.

‘소공공보다 빠릿빠릿하군.’

고정엽은 경의 보살핌이 마음에 드는지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고정엽이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자 경이 다가와 면경을 건넸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납치해놓고 이렇게 잘해준다고? 설마 내가 황제라는 것을 들킨 건가? 그래서 나를 이용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고정엽은 입술을 깨물었다.

납치당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용까지 당해야 한다니.

혼란스러운 와중에 눈앞의 면경에 비친 사내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으흠······?’

고정엽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지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고정엽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경의 손에서 면경을 빼앗아 자세히 쳐다봤다.

면경 속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고정엽은 거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얼굴을 찡그려가며 살폈다.

혹시나 인피면구를 쓴 것은 아닐까 살갗을 쥐어뜯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남자는 자신이 틀림없었다.

고정엽은 대경실색하여 들고 있던 면경을 떨어트렸다.

‘챙그랑!’

면경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서 깨졌고 고정엽은 깨진 유리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다시금 확인하고 절망했다.

그의 얼굴은 황제 고정엽이 아니라 그와 함께 폭발에 휘말린 의문의 사내로 바뀌어 있었다.

고정엽은 그제야 경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 이해됐다.

‘내가 이자들의 가주가 되었구나.’

***

천산의 절벽 꼭대기에 소풍영이 도착했다.

소풍영은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을 기어올라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한 것이다.

“어이구. 외팔이가 되어 절벽을 오르려니 죽을 맛이로구나.”

초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소풍영의 얼굴은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소풍영은 잠시 숨을 돌린 후, 주위에 있는 나무 덩굴을 모으기 시작했다.

덩굴을 일일이 묶어 기다란 끈으로 만든 소풍영은 그것을 절벽 위의 큰 나무에 단단히 고정한 후에 힘들게 올라왔던 절벽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올라갈 때는 두 시진(時辰, 네 시간)이 걸렸는데 내려갈 때는 다행히 반시진(半時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내려와 보니 서굉은 바닥에 누워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소풍영은 그를 들것에 싣고 나무 덩굴로 만든 끈으로 칭칭 동여맸다.

외팔이가 된 몸으로 서굉을 데리고 이곳을 탈출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도구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서굉은 몸이 꽁꽁 묶이자 그제야 눈을 떴다.

“소가. 너냐?”

“서가야. 실컷 잤으면 이제 일어나라.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가자꾸나.”

“나는 네가 나를 버리고 도망친 줄 알았는데?”

“쳇. 이래 봬도 내가 백도의 무인이다. 어찌 나를 살려준 이를 버리고 혼자 도망친다는 말이냐? 나는 마교와 달라.”

소풍영이 이죽거리자 서굉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동창도 백도인가? 그들이 고자를 받아주더냐?”

“시끄럽다. 서가야.”

소풍영은 두 손에 침을 뱉은 후에 나무 덩굴을 당기기 시작했고 들것에 실린 서굉의 몸이 천천히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서굉은 말할 힘도 없으면서 소풍영을 놀리기 위해 죽을힘을 짜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느리구나. 소가야.”

“괴팍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입 닥쳐라.”

***

경정이 서찰을 써서 소이자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마님?”

“이 서찰을 신의께 보내라.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 폐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다. 아무래도 신의님을 모셔와야 할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마마님. 소인이 당장 서찰을 녹가로 보내고 오겠습니다.”

서찰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려던 소이자가 고개를 돌렸다.

“뭐하고 서 있느냐? 어서 나가보래도.”

“마마님. 소인이 없는 동안 잘 계셔야 합니다.”

“왜 갑자기 내 안부를 걱정하는 것이냐?”

소이자는 걱정이 됐다.

황궁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희빈이었다.

경정과 같은 빈의 품계를 달고는 있으나 그녀의 뒷배가 서하공주이니 두려울 만했다.

‘아이고.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는 것이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누가 우리 마마님을 힘들게 할 수 있겠어.’

소이자는 애써 걱정을 지워내고 환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소인이 원래 걱정이 많지 않습니까?”

“실없기는. 어서 가거라. 나도 이제 채비를 마치고 건청궁으로 가야 한다.”

“이렇게나 일찍 가시려고요?”

지금은 묘시(卯時, 오전 6시)로 밖은 아직 어두웠다.

소이자가 놀라자 경정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으니 일찍 가련다.”

지난 사흘간 경정은 고정엽을 간호하며 큰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함과 그리움 그리고 미안함.

고심 끝에 경정은 마음이 가는 데로 하기로 했다.

‘폐하가 보고 싶다. 폐하께서도 내가 보고 싶을 것이야.’

***

건청궁에 도착해보니 넓은 정원에 아무도 없었다.

밤새 고정엽을 지킨 내의원 의원과 시비들이 돌아다닐 뿐 후궁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후궁들은 해가 뜨고 나서야 건청궁으로 몰려왔고 서로를 견제하며 폐하가 깨어나시길 기다렸다.

경정이 건청궁 문 앞으로 들어서는데 전각 안에서 소빈자가 뛰어나왔다.

경정은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소빈자를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밖으로 나온 소빈자는 경정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에 희색을 띈 채 달려가 고했다.

“마마님. 그렇지 않아도 소인이 청초각으로 가려던 참입니다.”

“새벽부터 어인 일로 나를 찾았는가?”

“폐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폐하께서 일어나셨어요.”

“그래? 그것이 정말이냐?”

“폐하께서는 태의 영감께 진맥을 받으신 후에 아침 수라까지 드셨습니다.”

경정은 기쁜 나머지 두 손을 꽉 쥐고 눈을 꼭 감았다.

‘폐하. 드디어.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소빈자. 너는 어서 황후 마마와 태후 마마께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하거라.”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은 기도를 드리러 궁 밖의 계태사(戒台寺)에 가셨습니다.”

“그래도 소식은 전해야 하니 소빈자 네가 챙기거라. 소공공은 경황이 없어서 챙기지 못할 수도 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경정이 기쁜 마음에 건청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때였다.

예민한 경정의 귀가 움찔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경정은 문밖으로 나와 밖을 확인했다.

안력을 키워 멀리 내다보니 가마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희빈의 가마로구나. 점점 일찍 오네. 나를 따라 하는 건가?’

경정은 희빈은 물론이고 다른 후궁들이 몰려와 건청궁 앞에 장사진을 치는 꼴이 눈앞에 그려졌다.

‘폐하께서 방금 깨어나셨는데 날파리들이 날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지.’

경정은 소빈자를 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방금 깨어나시지 않았느냐? 소란스러운 것은 피해야 하니 건청궁의 문을 당장 닫아 놓거라.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문을 열고.”

“예. 소인이 시위들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이왕이면 지금 당장 닫거라.”

“하지만 건청궁의 문이 커서 소인의 힘으로는 혼자 닫지 못합니다. 당장 시위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소빈자가 시위를 찾으러 뒤 돌아서는 그때였다.

‘끼익.’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어왔다.

소빈자가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일장(一丈, 약 삼 미터)이 조금 안되는 건청궁 대문이 닫혀 있는 것이 아닌가?

“어? 이 문이 왜 닫혀 있지? 누가 닫았지?”

소빈자가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경정이 건청궁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빈자에게 말했다.

“소빈자야. 너는 궁인들이 쓰는 뒷문으로 나가거라.”

“백빈 마마님!”

경정은 손을 흔들더니 건청궁 앞으로 쏙하고 들어갔고 홀로 남은 소빈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인들이 쓰는 뒷문이 있다는 것을 백빈 마마께서 어떻게 알고 계신 것이지?”

***

건청궁 안으로 들어온 경정은 즉시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곳을 지키는 궁인들은 경정을 보고도 아무도 막지 않았다.

그녀가 폐하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인 백빈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침전의 문을 열자 탕약 냄새와 섞인 짙은 향이 맡아졌다.

경정은 향을 맡고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이런 진한 향을 피웠을꼬.’

그때 궁인이 경정의 방문을 고했다.

“폐하. 백빈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경정은 침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얇은 은사가 드리워진 침상에 황제의 그림자가 보였다.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에 처음으로 두 사람이 대면하는 것이었다.

경정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고정엽이 그녀를 부르길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고정엽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궁인이 당황하여 다시 한번 백빈이 왔다고 고했다.

“폐하. 백빈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알아들었으니 두 번 말하지 말라.”

북해에 부는 바람처럼 차가운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자 경정은 흠칫 놀랐다.

‘폐하······?’

그때였다.

황제의 침상 옆에 놓인 향로가 경정의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훈향이 아닌가? 폐하께서는 내가 권한 이후로는 단향만 쓰시는데? 이런 짙은 향을 쓰실 분이 아니야.’

어둠 속에서 경정의 눈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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