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251)

풍운검의 가면이 깨지다.

마후가 주문을 외자 경정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경정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하신은 여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기까지 했다.

“이거 놔라. 홍아! 홍아!”

풍운검은 홍아를 부르짖으며 사로잡힌 몸을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경은 풍운검의 팔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경정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주문을 외우는 마후를 노려보며 살 방법을 생각했다.

‘저 구슬. 구슬을 깨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

경정은 마후가 들고 있는 구슬이 중요한 주술 도구임을 알아채고 그것을 깨트릴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탈혼(奪魂)이 시작되어 경정의 혼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내 몸이 왜 이래? 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가?’

웃음기 띤 얼굴로 지켜보던 하신이 마후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정말로 본(本)과 혼(魂)이 두 개 인가?”

마후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가주.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것인가?”

“이 몸은 탈혼술을 한번 겪었던것 같습니다.”

하신은 마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었다.

“뭐라? 탈혼술을 겪어보았다고? 지금 내게 농담을 하는가? 인간 대부분은 탈혼술로 생혼이 뽑히는 즉시 절명하고 만다. 그런데 어찌 탈혼술을 겪었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가 있어?”

마후는 할 말이 없는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내 마후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가주. 십여 년 전 재료를 태운 배가 파도에 휩쓸려 난파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이자는 그때 살아남은 재료가 아닐런지요?”

탈혼주를 든 마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배 안에서 탈혼술을 시행하던 도중, 폭풍에 휘말렸고 결국 마후 혼자만 간신히 목숨을 구하지 않았는가?

흥분하는 마후와 달리 하신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마후. 나는 예측하는 것을 싫어한다. 당장 저자의 혼을 뽑아 면경에 넣고 확인해 보면 될 것이 아니냐?”

“예. 가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술법을 계속하겠습니다.”

경정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 마후와 하신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 년 전? 배가 침몰해? 잠깐만, 그렇다면 본(本) 두 개고 혼(魂)이 두 개고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인가? 내 몸 안에 후궁 백경정 마마님의 혼이 살아있다는 뜻이잖아. 그럼, 나는 대체 뭐지?’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경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편, 풍운검은 괴로워하는 경정을 이대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풍운검은 경정이 그의 품에 넣어준 진천뢰를 떠올렸다.

‘진천뢰를 터트려야 한다. 하지만 이렇듯 붙잡혀있으니 터트릴 수가 없어.’

풍운검은 그를 꽉 잡은 경의 손을 뿌리치고 벽력탄을 터트릴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그때 괴로움을 참지 못한 경정이 구역질했고 옆에 있던 하신이 그녀를 발로 찼다.

경은 풍운검을 내려놓고 하신에게 달려가 더러워진 주인의 신발을 챙겼다.

‘지금이다!’

풍운검은 즉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목뼈가 부러졌기에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 왔지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진천뢰를 손에 넣은 풍운검은 주저하지 않고 덮개를 부서트렸다.

덮개가 깨지며 공기가 들어가자 도화선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구역질하다가 고개를 든 경정은 맞은편에서 진천뢰를 꺼내는 풍운검을 발견했다.

‘풍운검 대협······? 그 진천뢰는 대체······?’

경정은 풍운검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가주. 이제 생혼을 꺼내겠습니다.”

“지루할 참이었다. 어서 꺼내거라.”

“예. 가주.”

그때였다.

경정과 풍운검이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경정은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며 왼손으로는 하신의 발을 향해 빙하장을 날렸고 오른손으로는 마후의 손에 든 탈혼주를 향해 빙하장을 날렸다.

하신의 발을 잠깐 이나마 묶어놓으려는 방편이었으나 하신은 비웃으며 경정의 공격을 간단히 피하고 탈혼주로 날아드는 빙하장도 소매를 한번 휘두른 것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뒤에서 날아드는 진천뢰는 하신도 미처 보지 못한 상황.

하신이 뒤늦게 진천뢰가 날아오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늦었다.

심지가 모두 타서 뇌관을 건드렸고 진천뢰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콰앙!’

지축이 흔들리며 계죽산의 북쪽에서 흔들림이 느껴졌다.

황제와 백빈을 찾아 헤매던 금의위와 무림맹이 동시에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세록은 벽력탄이 터진 곳이 어딘지 알아차리고 외쳤다.

“제운벽이다. 금의위는 모두 제운벽으로 집결하라!”

“존명!”

무림맹원도 뒤이어 제운벽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엄세록이 도착해보니 절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엄세록은 미친 사람처럼 내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렇게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일까? 폐하. 부디 무사하셔야 합니다.’

***

진천뢰의 폭발 범위는 대략 십 장(十丈, 약 육 미터).

마후의 등 뒤에서 진천뢰가 터졌기에 마후는 오체분시(五體分屍) 되어 몸뚱이가 사방에 떨어졌다.

그가 들고 있던 탈혼주는 폭발로 인해 깨지며 그 자리에 핏빛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탈혼주가 만든 소용돌이가 진천뢰가 만들어낸 불길을 끌어들이며 거침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탈혼주가 불길을 빨아들이지 않았다면 마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경정이 화를 당했을 터.

한편, 마후를 잃은 하신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신은 자신의 앞에 떨어진 마후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마후. 감히 주인인 나보다 먼저 죽다니······.”

순간 하신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타오르는 열기로 화끈했던 그곳이 순식간에 하신이 내뿜는 살기로 가득 찼다.

경정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풍운검을 발견하고 오지 말라 외쳤다.

“오지 마세요! 풍운검 대협!”

경정이 손을 내민 그때였다.

소용돌이 안에서 이차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불길이 순식간에 두 배가 되며 풍운검을 덮쳤다.

풍운검은 경정을 노려보는 하신의 옆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함께 죽자! 이 악마야!”

불타오르는 핏빛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던 풍운검이 하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신은 분노하며 풍운검을 떨쳐냈으나 이미 그의 몸도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상황.

그때 풍운검의 얼굴을 가린 박달나무 가면이 소용돌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쩌억!’

자신의 민얼굴이 드러난 것도 모른 채 풍운검은 경정이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남은 힘을 쥐어 짜내 장을 날렸고 경정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장을 쏘아 보낸 풍운검은 그 반발력으로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하신을 놔주지 않고 꼭 붙들고 있었다.

풍운검이 보낸 장을 맞고 제운벽의 절벽으로 날아가는 경정은 마지막으로 봤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폐하?’

하늘을 나는 경정의 눈에 세상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탈혼주가 만들어낸 핏빛 불길의 소용돌이가 넘실거리는 모습이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폐하. 어째서 폐하께서 가면을 쓰고··· 거기에 계신 것이옵니까?’

불길은 이내 근처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하신 그리고 고정엽까지.

두 사람의 신형이 자색 불길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

이곳은 종수궁.

황후가 목욕을 마치고 경대 앞에 섰다.

안상궁이 황후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요즘 들어 황후 마마님을 괴롭히던 두통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그렇네. 나도 그리 느끼고 있네. 마음이 편해진 탓일 테지.”

“황후 마마. 요즘 걱정거리가 없으시죠?”

“그리 보이는가?”

“그렇습니다. 내명부가 화목하여 그렇겠지요?”

황후는 답하지 않고 거울을 보고 웃었다.

겨울 속의 여인이 오랜만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일 폐하께서 회궁하시면 백빈 마마님도 함께 오시겠지요? 황후 마마.”

“그렇다네. 오랜만에 내명부가 활기차질 것이야. 백빈이 오면 조촐한 연회를 열어야겠네.”

“그러시지요. 이번에 새로 품계를 받은 후궁도 있으니 백빈 마마님과 인사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입니다.”

“새로운 후궁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생각이 났네. 희빈은 어떠한가? 잘 지내고 있는가?”

“그럼요. 서하공주께서 사람을 보내 희빈 마마님을 살뜰히 챙겨주고 계십니다.”

“서하공주께서 궁에 들인 사람이니 챙기실 수밖에.”

“빈(嬪)의 품계를 바로 받은 것도 그렇고 서하공주께서 황궁 안에 외부인을 보내시는 것도 그렇고 말이 많습니다.”

“태후 마마께서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선은 이대로 지켜보세. 자네도 이 일은 함부로 거론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황후 마마······.”

안상궁이 긴장한 채 입을 떼자 황후가 물었다.

“왜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최근 이 년 동안 폐하께서 황후 마마님과 백빈 마마님 말고는 다른 후궁을 찾지 않으셨지요.”

“그래. 나는 지병이 있어 폐하께서 오셔도 모시질 못하니 백빈이 폐하의 침전에 든 유일한 여인이었지.”

“그것 때문에 서하공주께서 조금 불편한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서하공주께서?”

“예. 얼마 전에 공주께서 태후 마마님을 만나 뵙고 갔었지요.”

황후의 안색이 부쩍 어두워졌다.

“그래. 서하공주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희빈 마마는 자신의 사람이니 절대 홀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태후 마마님을 찾아가 말씀 올렸다고 합니다.”

“흠. 공주께서 못 할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소인은 희빈께서 서하공주님을 믿고 마음대로 하실까 봐 그것이 염려되옵니다.”

“제아무리 뒤를 봐주는 사람의 권세가 막강하다 해도 폐하의 총애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네.”

“황후 마마님의 말씀은······?”

안상궁은 직접 내뱉을 수 없어서 말을 흐렸다.

황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조만간 백빈의 품계를 비(妃)로 올려달라 청해야겠구나. 폐하의 총비에 걸맞은 품계를 갖춰야 아랫사람을 편히 살필 수 있을 것이네.”

안상궁은 황후가 경정을 위해 희빈보다 더 높은 품계를 달아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고 웃으며 답했다.

“황후 마마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안상궁이 말을 마치고 침전 밖으로 나가려는데 밖에서 환관이 뛰어 들어왔다.

건청궁을 지키는 소빈자였기에 안상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이냐?”

“안상궁 마마. 큰일 났습니다.”

“이곳은 황후 마마께서 계시는 종수궁이다. 경박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말해 보아라.”

“안상궁 마마. 폐하께서 돌아오셨는데 크게 다치셨다고 합니다.”

“뭐라? 폐하께서 오셨어? 그런데 다치시다니 대체 얼마나 다치신 것이냐?”

“지금 태의께서 건청궁에 들어가셨습니다.”

안상궁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후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때 황후가 밖으로 나와 살폈다.

안상궁의 놀란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무슨 일인데 이 밤에 소란스럽게 구는 것인가?”

안상궁이 황후의 앞으로 달려가 고했다.

“황후 마마. 그것이······.”

안상궁이 소빈자에게 들은 것을 고하자 황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황후가 휘청거리자 안상궁이 그녀를 부축했다.

“황후 마마. 고정하십시오.”

황후는 몸이 떨리고 설 힘도 없었으나 이런 상황일수록 황후가 굳건해야 한다.

“안상궁. 채비해라. 어서 건청궁으로 가자꾸나.”

황후의 굳은 얼굴을 본 안상궁이 큰 소리로 답했다.

“예. 황후 마마. 명을 따르겠나이다.”

***

이곳은 청초각.

소이자는 침상 위에 누운 경정을 살피고 있었다.

폭발로 날아간 경정은 제운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늘이 보살펴주시어 나무줄기에 옷이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다.

소이자는 큰 상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경정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신의님과 함께 왔어야 하는데. 어쩌지? 지금이라도 신의님을 불러야 할까?”

소이자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경정이 깨어나길 기도했다.

그때 나지막한 경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소이자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경정을 바라봤다.

“마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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