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251)

다시 황궁으로

“풍운검 대협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혹시나 하여 들러봤습니다.”

“그럼, 일부러 저를 보러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풍운검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정은 놀랐다.

다른 강호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의심부터 들었을 것이다.

혹시 나를 잡으러 왔나?

내가 오대악적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살아남은 색마의 수하는 아닐까?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그녀를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가 아닌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혹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어제 그렇게 바쁘게 헤어진 것이 마음에 걸려서요.”

“아! 그러셨군요.”

경정은 풍운검이 그녀가 걱정되어 온 것임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풍운검 대협이시구나. 과거에는 왜 저분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경정은 원생에 풍죽오우와 꽤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한 사람, 풍운검은 볼일이 없었다.

풍운검이 워낙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경정의 편견도 한몫했다.

‘그때는 풍운검이 느끼한 풍류 공자인 줄 알았어. 이렇게 다정한 분이신 줄 몰랐지.’

고정엽은 나무밑동 위에 손수건을 깔더니 경정에게 앉으라 권했다.

“시귀(屍鬼)가 데려간 친우분은 어찌 되었습니까?”

“아무래도 못 찾을 것 같습니다. 제 친구를 찾는 것보다 시귀를 찾는 것이 더 빠를 듯합니다.”

“시귀는 신비 문파의 사람입니다. 찾기 힘드실 텐데요. 제가 도와 드릴까요?”

“아니요. 매번 풍운검 대협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죠. 이미 세 번이나 도움을 받았는걸요.”

“세 번이요? 회강의 일과 어제 일까지 두 번이 아닌가요? 우리가 또 어디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풍운검의 말에 경정은 깜짝 놀랐다.

‘아! 깜빡했다. 무림맹 서고에서는 시비로 위장하고 있었지. 바보 같은 놈. 그걸 까먹냐.’

“그렇군요. 세 번이 아니네요. 두 번입니다. 두 번. 하하하.”

풍운검은 경정의 처소에서 본 단추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 서고에서 만났던 자가 역시 홍아가 맞았구나. 무정검이 홍아였어.’

풍운검이 말이 없자 경정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 환관 백경정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 친우가 시귀에게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입니다. 그런데 어제 살아있는 친우를 보았으니 안심입니다. 그 아이가 그래 보여도 꽤 근성이 있는 놈이거든요.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제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친한 분인가 봅니다.”

“예. 그렇습니다.”

풍운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대악적의 제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무림맹에 쫓기고 계시는데 어떻게 친우분을 찾으시려고요?”

“이렇게 얼굴을 숨기고 강호를 주유하며 찾아봐야겠지요.”

“강호를 주유··· 하시려고요?”

“지금은 매인 몸이지만 이제 곧 자유로운 몸이 될 겁니다. 그때부터 제 친우를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러셨군요.”

박달나무 가면 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경정은 풍운검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 있는 곳에서 나오면 강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텐데요. 혹시 그때 풍운검을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지금 있는 곳을 그렇게나 나오고 싶으십니까?”

“예?”

경정은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는 풍운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게 아닌가? 누가 황궁 안에 갇혀 평생을 보내고 싶겠어? 하지만 풍운검은 내가 구중궁궐에 사는 후궁인 것을 모르시니 궁금하실 수도 있겠네.’

“제가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은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쳐진 새장 같은 곳입니다. 새장 안은 화려하고 귀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렇다고 평생 새장 안에 갇혀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새장이었군요. 지금 사시는 곳이··· 그런 곳이었어요.”

“비유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진짜 새장은 아니고요.”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일 텐데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좋지 않으셨나요? 무정검 대협은 그분들을 버리고 가실 것입니까?”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요?”

경정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황후와 태후 마마님이었다.

‘청초각 식구들은 모두 데리고 나올 것이니 상관없고, 문제는 황후 마마님과 태후 마마님이시다. 그분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못 볼 것은 아니야.’

경정은 이미 그분들이 여름마다 행궁에 가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황궁의 여름 행궁이 열하와 무한에 있으니 때를 맞추면 볼 수 있었다.

풍운검은 경정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떠올렸으면 하고 물은 것이었지만 경정은 가장 마지막에야 간신히 황제를 떠올렸을 뿐이다.

‘주위에 폐하의 총애를 바라는 후궁이 많으니 괜찮을 것이다. 원래 곁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그립지는 않을까요?”

“아뇨. 오히려 제가 사라지면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경정은 그녀의 총애를 시기하는 다른 후궁들을 겨냥하고 말한 것이었지만 풍운검은 마치 비수를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러시군요. 전혀 애착이 없으시군요.”

경정은 풍운검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풍운검은 내 상황을 모르시니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놔도 되겠지? 비밀 친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좋은 일이었다니. 참으로 좋구나.’

그때였다. 가만히 경정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풍운검이 벌떡 일어섰다.

경정은 갑자기 일어서는 풍운검을 따라 함께 일어섰다.

“제가 풍운검 대협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군요. 송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즐거웠습니다.”

풍운검은 즐겁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웃지 않았다.

“저는 이만 하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헤어지죠.”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포권을 하고 헤어졌고 경정이 먼저 산에서 내려왔다.

한참을 내려오다 고개를 돌려보니 풍운검은 여전히 그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정은 풍운검이 볼 수 있도록 손을 들어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풍운검이 그녀의 모습을 봤는지 손을 흔들어줬다.

***

이곳은 회옥(回獄) 안.

사이좋게 딱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소풍영이 벌떡 일어섰다.

“전각에 있던 마인을 몰살한 것이 규환마가라는 것인가?”

마교 교주가 규환마가와 풍도마가에 내린 자고독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 것이었다.

“나도 놀랐네. 규환마가의 어린 가주가 그런 힘을 키우고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아직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 자고독을 완전히 치료하지 못했을 텐데 그 몸으로 마가를 그 정도로 키웠다니 놀랍더군. 마치 교주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했어.”

“서가야. 지금 과거를 회상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규환마가가 마가를 몰살했다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 전각으로 오면서 쥐새끼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단 말이다.”

“모를 일이지. 어린 가주가 나를 살려 이 회옥 안에 가두더니 자신은 강호에 나간 풍도마가의 가주를 찾으러 갈 것이라 했다.”

“풍도마가? 놈들도 살아있단 말이냐?”

소풍영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듯 엄청난 이야기를 미친 노인에게 듣고 있다니.

믿을 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도 심히 의심이 갔다.

서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빙마가 놈들이 아니었다면 이런꼴을 보지 않고 그때 죽었을텐데. 나도 이제 교의 일이라면 학을 뗐다.”

“서가야. 자네가 정말로 마교 교주의 좌사자란 말이냐? 실성한 것이 아니고?”

“실성하다니. 떼끼.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나는 멀쩡해. 그러니 규환마가의 어린 가주가 나를 두려워하여 회옥에 가둔 것이 아니겠느냐?”

소풍영은 서굉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때였다.

추위를 피해 쪼그리고 앉아 있던 서굉이 벌떡 일어섰다.

“소가야. 이제 시작이다.”

“무엇을 말이냐?”

“저기를 보아라. 진이 뒤틀리고 있어.”

소풍영이 놀라 눈을 치켜뜨고 주위를 돌아봤다.

기의 흐름을 살펴보니 서굉의 말대로 정상이 아니었다.

평범한 이들은 알아차리기 어려운 아주 미세한 흐름이었다.

초절정에 오른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경지.

소풍영과 서굉이 동시에 두 눈을 마주쳤다.

“소가야. 내 말이 맞지? 이제 힘을 합쳐 회옥을 빠져나가자꾸나. 내가 회옥을 탈출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겠구나. 하하하.”

소풍영은 미친 사람처럼 웃는 서굉을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미친 노인이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정말로 저자가 백 년 전의 마교 좌사자라고?’

소풍영은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지금은 고민이나 하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은 회옥을 탈출하는 것이 먼저였다.

“가자. 소가야!”

“그래. 서가야! 탈출하자꾸나.”

***

오늘은 경정이 황궁으로 떠나는 날이다.

녹가에서 할 일을 모두 끝내고 기분이 홀가분했지만, 한가지가 그녀의 마음에 걸렸다.

소이자가 다가와 그녀에게 차를 올리며 말했다.

“마마님. 폐하께서 바로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소인은 폐하께서 마마님과 함께 회궁하실 줄 알았습니다.”

‘영원한 총애는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군. 내가 색마에게 납치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를 꺼리는 것이다. 어이가 없군. 역시 하루라도 빨리 황궁에서 나와야 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이다.’

경정이 소이자와 함께 짐을 살피고 있는데 그녀의 처소 안으로 반가운 사람이 들어왔다.

빙각의 나설희와 최정, 북해빙궁의 위라서와 범세연이었다.

“마마님. 저희가 왔습니다.”

“마마님을 뵙습니다.”

네 명의 무인들이 웃으며 경정에게 예를 올렸다.

“왔는가? 무림맹의 일은 다 끝내고 왔는가?”

“그럼요. 다 끝냈으니 그들이 우리를 놓아준 것이지요.”

나설희는 웃으며 말했지만, 위라서는 화를 냈다.

“했던 질문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게 하고. 무림맹이 왜 색마를 사로잡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잘 알겠더군요.”

위라서는 무림맹에 납치된 이야기를 몇 번이고 말하느라 진이 다 빠져 있었다.

경정은 여전히 사나운 위라서를 보며 웃었다.

위라서는 그날 이후로 경정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경정이 그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고 그날 지하 감옥에서 그녀가 보여준 압도적인 빙공에 경외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위라서가 경정의 짐을 보고 물었다.

“마마님. 짐은 이것이 다입니까?”

“그렇네.”

“너무 적네요.”

‘이제 가면 황궁에서 도망 나올 것이라 많이 가져갈 수 없지.’

경정은 속내를 숨기며 그냥 웃기만 했다.

“얼마 안 되니 제가 들고 가지요.”

위라서가 경정의 짐을 한 손에 들더니 먼저 처소 밖으로 나갔다.

경정은 든든한 짐꾼의 뒷모습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같이 가세. 소궁주.”

***

녹가 장원 밖에는 경정이 구해준 백여 명의 여인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정은 그녀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마마님. 살펴 가십시오.”

“마마님.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마마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여인 한 명이 등장해 경정에게 비단 장포를 바쳤다.

지하 감옥 안에서 경정이 장포를 입혀줬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소인이 마마께서 주신 옷을 깨끗이 빨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경정은 무릎 꿇은 여인의 얼굴을 살폈다.

눈빛이 죽었던 지난날과 달리 여인은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니네. 이것은 자네가 가지고 있게.”

“소인에게 너무 과분합니다.”

“내 다시 녹가를 찾을 것이니 그냥 가지고 있게.”

경정이 녹가에 돌아 온다고 하자 여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마님. 그때까지 신의님의 가르침을 받아 훌륭한 의녀가 되겠습니다.”

“마마님. 훌륭한 의녀가 되겠습니다.”

백여 명의 여인들이 일제히 의지를 다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경정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마님. 이제 가셔야지요.”

“그래. 소이자야. 가자꾸나.”

경정이 마차로 다가가는 그때였다.

백여 명의 여인들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경정이 놀라 고개를 돌리는 인파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백빈 마마님. 제가 마마님을 황궁까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박달나무 가면을 쓴 사내.

그는 바로 풍운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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