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51)

달라진 나를 만나다.

‘저자는 초계광이잖아. 객잔에 후기지수들과 함께 있던 놈이 왜 저기에 있는 거지? 나와 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 밤에 단둘이 와룡산에서 밀회를 가진다는 것이냐?’

경정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와 가까이 다가갔다.

오 장(五丈, 약 삼 미터) 거리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은 경정은 백경정과 초계광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초계광은 환관 백경정을 보며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가 나를 불렀나 했더니 이런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다니. 네놈은 하인이냐? 어서 네놈의 주인을 불러와라.”

초계광이 하인이라 비웃는데도 불구하고 백경정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실성한 놈이로군. 당사자가 아니라면 나도 더는 들어줄 생각이 없다.”

초계광이 뒤돌아서는 그때였다.

그의 귓가로 검이 뽑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고 초계광은 황급히 몸을 낮춰 검을 피했다.

환관 백경정이 쏘아 보낸 검기가 날아와 초계광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 반대편 나무를 갈랐다.

‘쿠웅! 쾅!’

검기에 사선으로 잘린 나무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고 인적없는 와룡산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계광은 백경정의 엄청난 무위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백경정은 쉴 틈도 없이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초계광을 향해 내달렸다.

‘빠르다!’

초계광은 몸을 말아 옆으로 굴렀고 백경정의 검을 간신히 피했다.

어젯밤 비가 와서 바닥은 온통 진창이었고 초계광의 몸은 진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초계광은 그제야 눈앞의 사내가 고수임을 알아차리고 대경실색했다.

“이. 이보게. 말로 하시게. 대체 왜 이러시나?”

초계광이 말로 풀어보자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백경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지 않았다.

검을 든 백경정이 달려오자 초계광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공격임을 깨닫고 눈을 감고 말았다.

‘파악! 챙!’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초계광은 날아가 나무에 부딪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방금 환관 백경정의 공격을 막은 이는 다름 아닌 무정검으로 변장한 경정이었다.

경정은 초계광이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방금 그를 공격한 남자를 마주 보고 섰다.

‘이럴 수가? 진짜 나다. 백경정이라고.’

경정은 자신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백경정. 너 백경정이지?”

“...”

환관 백경정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경정을 노려볼 뿐이었다.

“너 눈빛이 왜 그래? 누가 너를 때리고 협박했어? 왜 죽은 눈빛을 하고 그래? 무공은 어디에서 배웠어? 시귀(屍鬼)에게 끌려갔다더니 그자에게 배운 거야?”

경정이 질문을 쏟아냈지만, 환관 백경정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정이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시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경정은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환관 백경정을 보며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 설마? 나를 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

경정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걸음을 떼자마자 백경정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경정은 그가 보내는 검기를 피하며 눈을 치켜떴다.

‘고수다. 일류에 근접한 고수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백경정. 너 대체 뭐야?’

절정에 들어선 경정에게 환관 백경정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경정은 백경정에게 손을 쓰지 못하고 그의 공격을 피해 다니기만 했다.

“경정아. 내 말 좀 들어봐. 내서당(內書堂, 환관 수련원) 알지? 거기에서 함께 지낸 친우인 이유영을 기억해?”

경정은 소이자의 이름도 꺼내 보고 내서당에서 함께 지냈던 과거의 일도 꺼내며 백경정을 회유했다.

하지만 그는 시귀라는 말을 들었을 때를 제외하곤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환관 백경정의 검이 다시금 허공을 갈랐다.

경정은 살기가 담긴 그의 공격을 보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 미친놈아! 기억하라고! 네가 누군지 기억해!”

크게 낙담한 경정이 검을 내려놓자 환관 백경정의 눈빛에 다시금 살기가 돌았다.

그가 다시 검기를 쏘아 보낸 그때였다.

‘쉬잉. 챙!’

경정이 초계광을 구한 것처럼 누군가 나타나 환관 백경정이 보낸 검기를 공중에서 흩어버렸다.

경정은 허공에서 땅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푸른색 장포와 흑갈색의 긴 머리카락 그리고 잘생긴 턱과 얼굴을 가린 박달나무 가면.

경정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외쳤다.

“풍운검 대협!”

풍운검은 그를 알아보는 삿갓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운검은 환관 백경정을 공격하며 경정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아십니까?”

“강호에서 박달나무 가면을 쓴 협객을 모르는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잊힌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아! 저기 풍운검 대협. 저자는 제 지인이옵니다. 살살 다뤄주십시오.”

“지인이라 하셨습니까? 이 자가요?”

‘그럼, 나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풍운검은 살초를 쏟아내는 무표정한 사내를 보며 인상을 썼다.

무공은 일류 수준에 자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격까지.

아무리 봐도 백도의 인물이 아니었다.

경정은 풍운검이 의심하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말을 보탰다.

“풍운검 대협. 접니다. 무정(無情)입니다. 저자는 시귀에게 끌려갔던 제 지인이고요.”

“무정 대협이셨습니까?”

풍운검은 공격을 멈추고 환관 백경정에게 장을 날려 보냈다.

‘크헉!’

가슴팍에 장을 맞은 백경정의 몸이 뒤로 날아가더니 나무에 부딪혔고 그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환관 백경정을 보고 경정이 놀라자 풍운검이 말했다.

“손에 사정을 뒀으니 크게 다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경정은 즉시 풍운검 앞에 달려와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풍운검 대협.”

“오랜만입니다. 무정 대협을 다시 만날 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풍운검은 진심이었다.

황궁에서 황제 노릇을 하느라 풍운검이 되어 강호에 나오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경정은 차마 지난번 무림맹 서고에서 봤다고 말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오늘은 삿갓을 쓰고 나오셨군요.”

“예. 면사보다 이게 편하더이다.”

경정은 풍운검과 말을 하면서도 줄곧 나무 아래 쓰러진 환관 백경정을 살폈다.

풍운검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경정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물었다.

“무정 대협. 아직도 무림맹에 쫓기고 계시는 것이옵니까? 제가 무정검께서는 오대악적의 제자가 아니라고 벽서온 맹주께 따로 말씀드렸습니다.”

“맹주님과도 친분이 있으신가요?”

“예. 젊은 날에 함께 뭉쳐 놀던 지기이지요. 벽맹주도 무정검 대협께서 오대악적의 제자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무림맹 특작조가 쫓는 명단에서 빼고 현상금도 낮출 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었군요.”

“그래서라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경정은 그제야 왜 자신이 두억보다 못한 액수의 현상금이 책정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풍운검 대협. 저자는 제가 데리고 하산하겠습니다.”

“도와 드릴까요? 시귀라면 신비에 쌓인 악인이 아닙니까? 그 자에게 사로잡혀 세뇌라도 당한 것이라면 일이 큽니다.”

경정은 환관 백경정을 데리고 녹가로 갈 것이기 때문에 절대 풍운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제게 연근산이 있으니 이것을 먹여 데리고 가면 됩니다. 그러니 안심하시지요.”

풍운검은 무정검이 불편해하는 것을 알아채고 더는 권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저는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경정은 아쉬움 속에 뒤돌아섰다.

‘오랜만에 풍운검을 만났는데 이리 빨리 헤어지는구나. 아쉽구나. 아쉬워.’

그때 등 뒤에서 풍운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모르니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경정이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풍운검의 손에는 작은 신호탄이 하나 들려 있었다.

“벽서온 맹주님이 제 지인이라 말씀드렸지요. 무림맹을 호출할 수 있는 신호탄입니다.”

‘알지요. 알다마다요. 저도 무림맹원이었는 걸요.’

경정은 풍운검이 건네는 신호탄을 손에 들었다.

‘어라? 이것은 그냥 무림맹 신호탄이 아니다. 각주급 이상의 고위직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신호탄인데 이것을 왜 풍운검께서 가지고 계시지? 아무리 풍죽오우라고 해도 벽맹주께서는 함부로 맹의 물건을 주실 분이 아닌데?’

경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풍운검이 건네는 신호탄을 받아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헤어져야겠군요. 저도 일이 있어서 무한에 온 것이라서요.”

“일이라면 풍죽오우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경정은 풍죽오우가 지금 이곳 천진에 있기에 풍운검이 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풍운검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

“아닙니다. 아내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내라고요? 풍운검 대협께 아내가 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무림맹 서고······.”

“예? 무림맹··· 뭐라고 하셨지요?”

경정은 아차 싶었는지 입을 굳게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모하는 정인이 있으시다면서요? 그분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하실 때가 엊그제인데 설마, 일사천리로 마음을 확인하고 혼인까지 하신 것입니까?’

경정은 마치 풍운검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정검이 아무 말이 없자 풍운검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여겼다.

‘아.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무정검께서는 여인의 몸으로 오대악적의 제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도피 중이신데 나는 그 앞에서 혼인하여 아내가 있다고 자랑을 했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풍운검을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경정과 풍운검이 동시에 발검하여 뒤돌아섰다.

그때 환관 백경정이 쓰러져 있던 나무 아래의 땅속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왔다.

바짝 말라비틀어진 노인의 손이 튀어나와 그 앞에 쓰러진 환관 백경정의 목을 움켜쥐었다.

경정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경정아!”

풍운검은 백빈의 이름이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노인은 환관 백경정의 목덜미를 잡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백경정! 경정아!”

경정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고 풍운검은 너무 놀라 한 걸음도 떼지 못하였다.

경정이 나무 아래에 도착해 확인해보니 커다란 구덩이만 남아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정아.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경정이 당황하는 그때였다.

와룡산 아래, 녹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임을 깨달은 경정은 벌떡 일어섰다.

풍운검 역시 종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놀랐다.

‘행렬이 도착했구나. 먼저 무림맹에 가서 풍죽오우를 만나고 가려고 했는데.’

경정과 풍운검이 동시에 앞으로 다가가 포권을 했다.

“친우분을 찾는 것을 도와드려야 하는데 송구합니다. 제가 볼일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저도 가볼 곳이 있습니다. 풍운검 대협.”

“조심히 가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인사를 주고받고는 두 사람은 이내 서로 등을 돌려 와룡산을 내려갔다.

그들은 반대로 움직였으나 목적지는 같았다.

‘어서 빨리 녹가로 가자.’

***

처소로 들어온 경정은 재빨리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욕탕 안으로 들어온 열음이 그녀가 벗어놓은 옷가지를 챙겼다.

“마마님. 폐하께서 오셔서 대청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지금 목욕 중이니 잠시 기다려달라 말씀드리거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열음이 옷을 가지고 욕탕에서 나가자 경정은 재빨리 몸을 씻었다.

‘여인들은 씻을 때 오래 걸리니 의심하지 않으시겠지?’

한편, 경정의 처소에 도착한 고정엽은 욕탕 쪽에서 나오는 열음과 만났다.

열음은 한달음에 달려와 고정엽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너는 청초각의 열음이지?”

“소인을 기억해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열음은 고개를 숙이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만 일어나래도. 백빈은 안에 있느냐?”

“마마님은 지금 목욕 중이십니다.”

“늦가을이라 밤에는 추울 것인데 목욕이라니.”

“욕탕 안은 따뜻하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열음도 한때는 밤에 목욕을 즐기는 경정을 걱정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 마마님은 얼음물로 목욕을 하셔도 거뜬하실 것이다.’

열음은 경정이 벗어놓은 옷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을 나서며 열음의 발아래로 뭔가 떨어졌다.

소빈자가 달려가 열음이 떨어뜨린 물건을 챙겨 들었다.

“이것이 뭐지? 엄도통께서 가지고 다니시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소빈자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고정엽이 그에게 손짓했다.

“열음이 뭘 떨어뜨리고 간 것이냐? 이리 가져와 보아라. 내가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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