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51)

멍청한 건 바로 너다!

이곳은 춘하장원의 전각.

그곳에 도착한 경정은 눈가리개를 풀고 그 안을 살폈다.

전각 안의 물건은 모두 치워져 있었고 내실에서 어스름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경정은 어제 내내 감옥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이 난국을 타파할지 계획했다.

서로의 말과 행동을 몇 번이나 맞췄고 경정은 밤새 잠도 자지 못하였다.

'계획한 대로 놈들이 움직여야 할 텐데. 뭐, 일이 틀어져도 내가 그렇게 흘러가게 만들면 된다.'

내실로 들어가 주렴을 걷자 화려한 침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석은 마가의 가주 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풍석은 황궁에서 왔다는 여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강호를 주유하며 아름다운 미인을 많이 봐왔다.

경국지색의 미인들을 수도 없이 만나 정기를 흡수한 그였으나 눈앞의 여인에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피부가 참으로 희구나.”

풍석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스물 중반쯤 되었을까? 반로환동(返老還童)한 노괴가 아니라면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로구나.’

경정은 일부러 풍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탁자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차가 끓고 있었다.

경정은 풍석에게 눈웃음을 흘리며 쌍두사의 피로 만든 독단을 주전자 속으로 흘려보냈다.

“차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경정의 맑고 단아한 목소리가 침전 안에 울려 퍼지자 풍석은 경정의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경정은 독단이 퍼지길 기다리며 시간을 끌기로 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황궁에서 온 마마님이라지?”

“저는 황제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백빈이옵니다.”

“꽤 수작을 부릴 줄 아는구나. 그래서 황제의 총비가 된 것이겠지.”

“수작이라니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으로 생각해주시지요.”

“내가 너를 죽일 것 같으냐?”

“글쎄요. 오늘 제가 어찌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풍석은 여태껏 수많은 여인을 만나봤지만 자신 앞에서 이렇듯 당당한 사람은 오늘 처음 봤다.

경정은 독이 우러난 차를 따라서 풍석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침상 위에 나른하게 누워있던 풍석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경정을 불렀다.

“더 가까이 오라.”

“차를 쏟으면 안 되니 대협께서 일어나시지요.”

“내가 대협인가?”

“강호인은 죄다 대협(大俠) 아니면 소협(小俠)이 아니십니까?”

“네 말이 맞다. 강호인은 자신을 협객이라 여기고 있지. 하하하.”

풍석은 경정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그제야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체에 얇은 침의 한 장을 대충 걸치고 일어서는 풍석을 보며 경정은 어이가 없었다.

‘볼 것도 없는 놈이 왜 저래? 부끄럽지도 않느냐? 나도 한때는... 아이고. 말을 말자.’

경정이 사내의 벗은 몸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자 풍석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역시 후궁은 평범한 여인과 다르군. 궁에는 황제를 위한 여인들이 수백 명이나 모여 산다지?”

“오해이시옵니다.”

“그런 곳에서 총비의 자리를 꿰찬 것을 보면 보통은 아닐 거야. 그러니 오늘 나를 찾아온 것일 테지. 자, 말해보아라. 무엇을 원하는가? 너를 첩실로 삼아주길 원하는가? 살고 싶으냔 말이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을 즐기는 풍석은 경정이 그에게 애원하길 바랐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씨부렁거리는구나. 독이 들어간 차를 마시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두고 보자.’

경정은 단아하게 웃으며 찻잔을 풍석에게 바치며 말했다.

“이것을 드시고 나면 그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풍석은 경정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풍석은 차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경정을 손을 잡으려고 하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경정은 눈을 질끈 감고 풍석의 품에 안겼다.

이렇게 저돌적인 여인을 상대하는 것이 처음인 풍석이 당황해하는 그때.

경정은 손에 든 찻잔을 풍석의 입에 가져간 후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우선 한 모금 드시지요. 아~~.”

여인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들은 풍석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임무를 완수한 경정은 재빨리 풍석의 몸에서 떨어져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조를 때는 언제고 이제는 도망치는 것이냐?”

“그러면 안됩니까? 제 마음인데요.”

뒷걸음질 치던 경정은 협탁에 부딪혀 멈춰섰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협탁 위에 수상한 화상(畫像)이 두 장 놓여 있었다.

하나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생긴 미남의 화상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 두 얼굴은 경정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젊은 미남은 하오문에서 산 인피면구의 얼굴이었고, 노인은 바로 그녀의 스승님인 소풍영이었다.

경정이 흠칫 놀라자 풍석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경정은 들킨 것 같아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풍석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황궁에서 이 노인을 본 적이 있느냐?”

“그런 것은 왜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풍석은 당황하는 경정이 귀여운지 콧잔등을 손으로 훑었다.

경정은 이를 악물고 풍석의 수작질을 견뎌냈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나무아미타불. 원시천존. 조상신이시어!’

경정이 몇 번이나 올라오는 구역질을 삼키고 있는 그때였다.

침전 밖에서 다급한 일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 빙각의 무인이 도망쳤습니다.”

경정을 희롱하던 풍석의 손이 멈추었다.

풍석은 경정을 뒤로 보내고 일혈에게 들어오라 명을 내렸다.

“어찌 된 일이냐? 빙각의 무인이 도망치다니?”

“족쇄를 깨트리고 홀로 도망쳤습니다.”

“당장 찾아라. 내일 대법이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야!”

“존명. 저도 당장 합류하여 함께 쫓겠습니다.”

일혈이 일어서자 풍석이 손을 들었다.

“잠깐! 감옥은 누가 지키고 있느냐?”

“구혈에게 지키고 서 있으라 명을 내렸습니다.”

“알았으니 이만 나가보라.”

“예. 가주.”

뒤에 선 경정은 그들의 대화에서 대법이란 단어를 듣고 속이 철렁했다.

‘역시 여인들을 희생양 삼아 뭔가를 계획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놈들!’

풍석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고민에 빠졌다.

‘안 되겠다. 나도 나가봐야 할 것 같구나.’

풍석이 침전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경정이 알아채고 한달음에 달려와 풍석의 손을 잡았다.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흠···.”

풍석은 웃는 경정을 보며 마음이 동하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경정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풍석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여인이 사내의 침의 안으로 손을 넣으니 풍석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경정은 마치 불경을 외듯 딴생각을 했다.

‘그래. 참자. 환관 어르신을 안마해 드린다고 생각하고 참자. 맞아. 그거랑 이거랑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

경정은 용기를 내어 손을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풍석은 이런 여인은 처음 본다는 듯이 경정을 쳐다봤다.

그런데 웬일인지 싫지 않았다.

풍석은 경정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금쯤이면 나 소각주가 삼봉도로 도망쳤을 것이다. 삼봉 아래 숨겨진 공간에 숨어있으면 마인들이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경정은 눈을 감고 느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풍석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풍석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목과 얼굴의 피부 결이 부자연스러웠다.

‘어라? 이거 인피면구 같은데?’

경정의 머리 속에 미남 소풍영의 인피면구가 그려진 화상이 떠올랐다.

‘설마, 그 면구의 진짜 주인이 이놈인가?’

경정은 갑자기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눈앞의 마인과 싸우며 소란을 일으켜야 할 터.

‘어디 네 놈의 진짜 얼굴을 좀 보자.’

경정은 순식간에 감춰둔 내공을 풀어내고 풍석의 얼굴로 돌진했다.

풍석은 갑자기 여인의 기도가 달라지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경정은 풍석이 경계할 틈을 주지 않고 그의 목을 붙잡고 사선으로 뜯어냈다.

‘찌이익!’

인피면구가 뜯겨나갔고 풍석의 하관부터 왼쪽 위의 얼굴이 드러났다.

경정은 얼굴에 흉측한 반점이 가득한 풍석의 본 얼굴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풍석은 경정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노려봤다.

“뭐 하는 짓이냐?”

경정은 풍석의 완맥(緩脈)을 짚고 손목을 틀어 빠져나왔다.

그리고 즉시 허리띠를 풀어 그 안에 감춰놓은 연검(軟劍)을 잡아당겼다.

‘촤라락’ 소리와 함께 경정의 연검이 펼쳐졌다.

풍석은 황제의 후궁이라는 여인이 무공을 펼치자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 내가 당한 것인가?”

풍석은 경정이 마시라고 애교까지 부리며 건넸던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늦었다. 너는 천하의 맹독이라 불리는 쌍두사의 독을 먹었다.”

“내가 독을 마셨군. 하하.”

“그래. 이 마교 놈아.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풍석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그의 입술을 핥았다.

뱀같이 끝이 갈라진 그의 혀가 검은 입술과 피부를 핥는 모습이 어찌나 흉측한지 경정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독을 이기지 못했는지 풍석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경정은 선 채로 눈을 감은 풍석을 보며 안도했지만, 아직 그의 목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선 감옥을 지키는 놈부터 해치우자.’

경정은 독에 중독된 풍석을 그대로 놔두고 장을 날려 전각의 지붕을 날려버렸다.

가주가 있는 전각에서 큰 소리가 들리자 감옥을 지키고 있던 구혈이 그곳으로 달려왔다.

침전 안에 몰래 숨어있던 경정은 구혈이 나타나자마자 연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떨어진 구혈의 목이 바닥을 굴러 풍석의 앞에 당도했다.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풍석의 맨발을 적셨고 경정은 이제 풍석을 완전히 해치우기 위해 연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연검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는 그때였다.

눈을 뜬 풍석이 경정의 연검을 붙잡았다.

경정은 풍석이 눈을 뜨자 대경실색하여 연검을 잡아 뺐다.

하지만 그의 손에 잡힌 검은 빠지지 않았고 오히려 검을 통해 풍석의 내공이 밀려왔다.

경정은 이를 악다문 채 쏟아지는 풍석의 내공을 참아내느라 애를 썼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이렇듯 강한 여인이 있다니.”

풍석이 잡았던 연검을 풀자 경정의 몸이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경정은 피를 흘리며 풍석을 노려봤다.

“뱀독에 당한 것이 아니었나?”

“그 어떤 독도 나를 상하게 할 수 없다.”

“뭐라?”

풍석은 만독지왕(萬毒之王)이라 불리는 자고독에 중독되어 있어 쌍두사의 독도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풍석의 몸에 들어간 쌍두사의 독이 고대로 자고독에 흡수된 후였다.

경정은 즉시 문 앞으로 달려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감옥에서 다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버텨야 해.’

경정이 풍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를 죽이고 가라.”

풍석은 그를 가로막는 하룻강아지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는 없지. 너는 대법의 재료이니 죽이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풍석이 손을 들자 벽에 매달려 있던 그의 철선(鐵扇)이 날아왔다.

풍석은 철선을 들자마자 즉시 허공을 갈랐다.

거대한 기파가 날아오자 경정은 대경실색하며 몸을 피했다.

방금 그녀가 있던 자리가 박살이 나고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대들보 위에 올라간 경정은 침을 꼴깍 삼켰다.

‘큰일이다. 초절정 고수다. 아무리 망했다지만 마가의 가주라 이건가?’

그때 풍석의 철선이 대들보 위로 날아왔고 경정은 부서진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고개를 돌려 와룡산을 바라보니 산을 타는 당소소와 백여 명의 여인들이 보였다.

‘됐다. 다 빠져나갔구나.’

“어딜 도망가려고!”

지붕 위로 올라온 풍석이 경정을 노려봤다.

경정은 풍석이 와룡산을 보지 못하게 즉시 바닥으로 내려와 감옥 쪽으로 내달렸다.

풍석은 도망치는 경정을 보며 조소했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너는 독 안에 갇힌 쥐다.”

지하 감옥에 도착한 경정은 즉시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철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풍석이 감옥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멍청하구나. 퇴로가 없는 곳으로 오다니.”

경정은 손에 뭔가를 들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내가 멍청해 보이는가?”

“그럼, 틀렸는가?”

“너야말로 멍청하구나. 이곳이 어디인가? 대법인지 뭔지를 하려면 재료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놈의 재료는 다 어디로 갔을까?”

경정이 비웃자 풍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제야 감옥 안이 텅 비어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일부러 이곳에 네놈을 끌어들인 거라면 어찌할 것인가?”

경정이 자신만만해하며 웃자 풍석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사방이 막힌 지하 감옥이라 도망칠 곳도 없는데 뭘 믿고 저리 오만한 웃음을 보이는 것일까?

풍석은 뭔가 께름칙한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만년빙정만은 아끼고 안 쓰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구나. 너를 이기려면 쓸 수밖에.’

경정은 양손에 빙정을 손에 들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풍석은 갑자기 기도가 확 달라진 경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섭도록 차가운 이 기운.

순간 풍석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야 알겠다. 너는 빙염마제가 보낸 자객이로구나."

빙정을 이용해 내공을 끌어 올리던 경정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빙염마제는 백 년 전 마교 교주의 좌사자가 아닌가? 왜 나를 빙염마제의 수하라 생각하는 것이지? 좌사자가 아직 살아있을 리는 없고 또 다른 빙염마제가 있는 것인가?'

경정은 빙염마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빙염은 모르겠고 빙정 맛이나 봐라. 야압!”

어두운 감옥이 환해지더니 이내 경정의 몸이 빛에 휘감겨 보이지 않았다.

***

'우르릉 쾅!'

엄청난 소리가 춘하장원 쪽에서 들려왔다.

삼봉도에 숨어 있던 나설희와 와룡산의 석굴 안에 들어가려던 당소소가 동시에 춘하장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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