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놀이하러 가자.
연화루가 팔렸다는 말에 일혈이 놀라 물었다.
“연화루를 팔았다면 기녀들도 함께 판 것인가?”
“이곳 연화루에 기녀는 더는 없습니다.”
호선댁은 당장 내일부터 연화루의 장사를 접을 생각이었다.
또한 기녀들도 고향에 가지 않고 남는다는 사람을 추려 신의의 의관에서 일하는 의녀가 되게 도와줄 결심을 했다.
자세한 이유를 모르는 풍석은 기녀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호선댁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찰나의 순간 호선댁은 목이 죄어드는 것 같은 살기를 느꼈다.
“나. 나리?”
호선댁이 기겁하여 책상 아래 숨겨진 종을 울리려고 했다.
하지만 부채 위로 보이는 풍석의 살기 어린 눈빛에 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혈.”
“예. 가주님. 말씀하시지요.”
“이곳은 됐다. 가자.”
“예. 가주님.”
풍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고 일혈이 따라 나섰다.
호선댁은 그들이 나가자 의자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며 오늘 당장 연화루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당장 연화루를 접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한편, 연화루 밖으로 나온 풍석에게 일혈이 다가와 물었다.
“가주. 어찌할까요? 다른 기루를 찾아볼까요? 이곳 연화루가 홍등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택한 것인데 팔렸다고 하니 다른 기루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법을 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보름달이 뜨길 기다려야 하니 이레 정도 남았습니다. 그 안에 백 명의 젊은 여인을 구해야 합니다.”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되는가?”
“무한에서 인수한 기루에서 얻은 여인들이 스물셋으로 모두 일흔아홉이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채울 수 있겠구나.”
“어차피 이번에 치를 대법이 마지막입니다. 예전처럼 아무 집이나 들어가 여인을 끌고 나올까요?”
“안 된다. 무림맹이 추격하고 있으니 사라져도 찾을 가족이 없는 기녀가 제일 적당하다. 또한 기녀는 음기가 충만히 쌓인 여인이니 대법을 치르기 안성맞춤이다.”
“그럼, 다른 기루를 물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빙각의 소각주가 어디에서 묵고 있는지도 알아 와라. 이번 대법의 화룡점정이 될 여인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칠혈을 보내 놓았습니다.”
풍석은 빙공을 익힌 나설희를 흡수할 생각에 조금 전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풍석이 마차에 오르자 일혈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가주. 회강 근처에 있는 장원으로 가시지요. 이미 혈사자를 보내 그곳을 깨끗이 치워 놓았습니다.”
일혈의 말은 장원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없앴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장원에 살았던 이들은 지금 돌덩이를 어깨에 진 채 회강 바닥에 모조리 가라앉아 있었다.
풍석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다. 가자.”
“예. 가주님.”
***
이곳은 천산(天山).
사방에 짙푸른 안개가 끼어있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낭떠러지가 있는 것도 모른 채 걷다가 떨어져 죽을 판이었다.
소풍영은 나침반을 꺼내 들고 오대악적이 남긴 지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천산을 샅샅이 알고 있는 내가 아니었다면 이 안개에 갇혀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천산은 자고로 사시사철 안개가 끼는 곳이라 마교가 숨어있기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어. 안개가 심해 앞이 보이지 않으니 들짐승도 숨어버렸구나. 참으로 기이한 일이야.”
소풍영은 천산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수상했다.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소풍영의 발아래에서 미세하게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풍영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몸을 뒤로 날렸다.
방금 소풍영이 있던 자리가 움푹 꺼지더니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무저갱(無底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곳에 기관이 숨겨져 있다니.”
소풍영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데 갑자기 주변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풍영은 공기 중에 섞인 탁한 향을 맡고 인상을 썼다.
향을 조금 맡았을 뿐인데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독이로구나.”
소풍영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막고 경정이 챙겨가라고 내어 준 당소소가 만든 해독제를 먹었다.
그런데 해독제를 먹어도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정신이 혼미해진 소풍영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상하구나. 해독제를 먹었는데도 왜 이렇게 어지러운 것이냐?”
소풍영은 결국 검을 꺼내 그의 손바닥을 그었다.
시뻘건 핏물이 튀기자 소풍영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제정신이 남아있을 때 이곳을 떠나려던 소풍영은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린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질풍처럼 내달리던 소풍영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시커먼 구멍을 보고 정신이 멍해졌다.
방금 그가 봤던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이었다.
소풍영은 근처에 떨어진 피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방금 흘린 피가 분명했다.
소풍영은 그제야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유를 깨달았다.
“독이 아니라 미혼진(迷魂陳)이로구나. 내가 미혼진에 갇힌 것이야.”
진법에 한 번 갇히면 자력으로는 절대 탈출이 불가능했다.
생문(生門)을 찾으면 또 모를 일이었으나 진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소풍영이 생문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순간 소풍영의 눈빛이 번뜩였다.
소풍영은 무한에서부터 매고 온 커다란 봇짐을 풀어헤쳤다.
경정이 준 해독제부터 연근산, 말린 육포 등등.
없는 게 없는 보물단지였다.
소풍영은 그 안에서 작은 종을 꺼냈다.
소리가 울리지 않기 위해 감싸놨던 천을 풀어 헤치자 금빛의 요령(搖鈴, 종 모양의 법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지난날 경정이 악악산에서 가져온 진법을 깨는 요령이었다.
소풍영은 즉시 주위를 배회하며 요령을 흔들었다.
내공이 실린 요령 소리가 미혼진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귀곡성과 같은 음산한 요령 소리에 소풍영은 귀를 막았다.
한참을 미혼진 안을 배회하는데 드디어 요령 소리에 반응하는 공간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나무 아래의 공간이 요령 소리에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여기로구나.”
소풍영은 한 손으로는 요령을 흔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일그러지는 공간에 장법을 쏟아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찌이익’하며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간이 찢어지며 바깥세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이다!”
소풍영은 발검(拔劍)하여 찢어진 공간에 검기를 날려 보냈다.
엄청난 기파와 함께 그곳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소풍영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보고 즉시 신형을 날렸다.
화살처럼 쏘아진 그의 몸이 구멍을 통과하자 벌어졌던 곳이 스스로 움직여 빈틈을 메웠다.
찰나의 차이로 소풍영이 미혼진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나 죽겠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소풍영은 허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을 감싸고 있던 짙은 안개는 이미 사라졌고 이십 년 전 소풍영이 기억하는 천산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안개에 진입한 순간부터가 미혼진이었구나. 진에 빠진 것도 모르고 평생을 그곳에서 갇혀 지낼뻔했어. 참으로 이상하구나. 이십 년 전에는 이런 미혼진이 없었는데. 그사이에 대체 누가 이런 흉악한 것을 설치했단 말인가? 설마 오대악적 놈들이 한 것인가? 그런 것 치고는 진법을 만든 술사가 대단한 것 같은데?”
소풍영은 궁금증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에는 소풍영이 기억하는 천산이 펼쳐져 있었다.
소풍영은 길게 숨을 토해낸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약방의 침상에 누워있는 위라서는 밖에서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제 내상을 거의 다 치료하여 내일 아침이면 북해빙궁으로 떠난다.
위라서는 신경질적인 말투로 범세연에게 물었다.
“왜들 저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냐?”
“소궁주. 백빈 마마님께서 오늘 저녁에 회강에 누각선을 띄우고 뱃놀이를 하신답니다.”
“뱃놀이?”
“이곳에서 유명한 검무단(劍舞團)을 초청하여 선상에서 검무를 감상한다고 하던데요.”
“내게 그렇게 큰돈을 뜯어가 놓고는 검무단을 초청하여 뱃놀이한다고? 백빈이 참으로 이상한 여인이로구나.”
“소궁주.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범세연은 방문을 열고 바깥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오늘 저녁에 누각선을 띄운다고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누가 오는 것인가?”
“백빈 마마님과 신의님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는 의녀 열음과 소천. 마지막으로······.”
범세연은 위라서의 눈치를 살피며 마지막 참가자를 밝혔다.
“빙각의 나설희와 최정 무인입니다.”
“나만 빼놓고 모두 모인다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소궁주.”
위라서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신의에게 내어준 기부금이 삼천 냥 정도에 이곳 강호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만년빙정까지 백빈에게 강탈당했다.
그런데 검무단을 불러 놀면서 자신에게는 갈 거냐고 묻지도 않는다니.
위라서는 이불을 꼭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북해의 손님들 안에 계십니까?”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위라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백빈을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환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범세연이 문을 열자 환하게 웃는 소이자의 얼굴이 보였다.
위라서는 그 주인에 그 하인이라며 해맑게 웃는 소이자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왜 그러는가?”
“마마님께서 소궁주께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소이자는 말을 하며 초대장을 범세연에게 건넸다.
범세연은 그것을 위라서에게 전했고 위라서는 침상 위에서 경정이 보낸 초대장을 읽었다.
‘마마님이 북해빙궁의 소궁주는 초대장을 받아도 절대 뱃놀이에 끼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지. 하지만 눈치는 보이니 초대장을 보내야 한다고 말이야.’
소이자는 위라서가 거절할 것이라 예상하고 이만 돌아가려고 했다.
“소궁주님. 소인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위라서는 초대장을 펼쳐 든 채 소이자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소이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라서의 앞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초대장에 시간이 적혀있지 않구나.”
“오시려고요?”
소이자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언제까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유시(酉時, 오후 여섯 시)에 이곳에서 선착장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때 함께 가시면 되긴 하는데······. 그런데 진짜로 오시려고요?”
소이자가 재차 묻자 위라서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소이자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소인이 백빈 마마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따 함께 뱃놀이하러 가시지요.”
소이자는 위라서에게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갔다.
소이자가 떠나자 범세연이 다가와 물었다.
“정말로 가시려고요? 내일 아침 일찍 북해로 떠나야 하는데 피곤하시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갈 것이다. 누각선을 빌리고 검무단을 초청한 것이 누구 돈으로 했을 것 같으냐? 다 내 주머니에서 나온 내 돈이다. 그러니 반드시 가고 말 것이다.”
위라서는 가서 뱃놀이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뱃놀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줄 것이야!”
***
이곳은 춘하장원의 전각.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새가 울던 춘하장원은 온데간데없고 죽음의 기운만 흐르고 있었다.
풍석은 상석에 의자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풍석의 앞에 풍도마가를 지키는 혈사자(血使者)가 늘어서 있었다.
혈사자는 총 열 명인데 이 자리에는 총 일곱 명밖에 없었다.
풍석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위하는 일혈이 풍석의 앞에 서서 고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 회강에 누각선이 뜨는데 그 배에 빙각의 소각주와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탄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인으로 이루어진 검무단 십수 명도 함께 탈 거라고 합니다.”
편히 앉아 있던 풍석이 처음으로 의자에서 등을 뗐다.
“누각선에 탄 여인들을 취하면 대법에 필요한 백 명의 여인이 모두 채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가주.”
풍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하늘이 날 돕는구나. 이제 독을 해독하면 떳떳하게 천산에 돌아갈 수 있음이야.”
“감축드리옵니다. 가주.”
일혈이 포권을 하자 도열해있던 혈사자가 함께 포권을 하며 외쳤다.
“감축드리옵니다. 가주.”
“감축드리옵니다. 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