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다.
이곳은 악악산.
고위성은 황궁에서 온 태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고위성의 아랫입술에는 동상을 치료하기 위한 고약이 붙어 있었다.
태감은 커다란 고약을 얼굴에 붙인 고위성을 보며 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사옵니다.”
태감은 웃음을 참으며 황제가 보낸 성지를 펼쳐 들고 읊었다.
“양왕 고위성은 들어라. 양왕이 황릉 근처의 악악산에 사찰을 짓고 있으니 실로 황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상하도다.”
시작은 고위성을 칭찬하는 말이었으나 그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고위성은 고정엽이 왜 이런 성지를 보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내 태감이 성지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여 양왕이 짓는 사찰을 황가에서 관리하는 사찰로 명하고 정식 설계도를 하사한다. 양왕은 장인과 함께 사찰을 짓도록 하라.”
태감은 성지를 모두 읽고 설계도가 든 보합을 고위성에게 건넸다.
고위성은 보합을 받아들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양왕 전하. 보합을 받으시지요.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것이옵니다.”
태감이 재촉하자 고위성은 입술을 깨물며 보합을 받았다.
“폐하의 명을 받사옵니다.”
고위성은 보합을 손에 든 채 황궁이 있는 남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태감이 떠나자 고위성은 그제야 보합을 꺼내 설계도를 확인했다.
소혜자가 달려와 고위성과 함께 설계도를 살폈다.
고위성은 쓰러져가는 사당이 있던 자리에 대웅전을 지을 생각이었다.
대웅전 하나만 있는 작은 사찰 말이다.
대신 백 살이 넘는 소나무를 입구로 하여 절의 품격을 올리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설계도 속의 사찰에는 건물이 여러 개였다.
“전하. 폐하께서 주신 설계도는 1탑 3금당의 형식이옵니다. 이는 한 개의 탑과 금당이 세 개 있는 것을 가리키지요. 그중에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이 여기에 있고 다른 전각이······.”
“시끄럽다. 머리가 아프니 그만 떠들어라.”
“예. 소인이 각주로 정리하여 따로 올리겠습니다.”
고위성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부여잡았다.
‘고정엽 이 자식이 지금 나를 물 먹이려고 작정한 것인가? 장인을 데려오면 뭐 해? 그날 밤, 부처님께서는 내게 홀로 절을 지으라 명하셨다고!’
고위성은 황제가 내린 명을 모른 체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좌절하던 고위성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고정엽이 갑자기 내게 이런 명을 내리다니.’
고위성의 머릿속에 찻주전자를 들고 얄밉게 웃던 백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얀 것 같으니라고. 이것은 필시 백빈이 계략을 꾸민 것이 분명하다.’
고위성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고위성이 경정을 떠올리며 화를 내고 있는데 소혜자가 다가와 방금 내린 따뜻한 차를 바쳤다.
“이것을 드시고 마음을 편히 하시지요. 전하.”
소혜자는 차를 건네고 사찰의 설계도에 각주를 단 것을 고위성에게 보였다.
이 짧은 시간에 각주를 달아온 소혜자를 보며 고위성은 눈을 크게 떴다.
“소혜자야. 벌써 각주를 단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소혜자는 사찰 건축을 모르는 고위성을 위해 금당(金堂, 절의 본당을 이르는 말)의 이름과 땅을 파는 데 얼마나 걸릴지에 대해 상세히 적어 놓았다.
“소혜자야. 너는 군기창(軍器廠, 군기와 탄약 등을 만들던 관청)에서 일했다고 했지? 그곳에서 이런 것도 가르쳐주더냐?”
“부끄럽지만 소인이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근처 성곽을 짓는 데 투입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기관진식(機關陣式)의 대가인 대사 선사의 제자께서 관리자로 계셨는데 그분의 수발을 들으며 어깨너머로 배운 것입니다. 변변치 못한 재주입니다. 전하.”
소혜자가 겸손하게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위성은 그런 소혜자를 보며 답답했던 가슴이 한결 나아졌다.
고위성은 소혜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까짓거 해보자꾸나. 기한이 삼 년으로 늘어났으니 급하지 않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의 성심을 알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고위성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황제의 인정 따위는 필요치 않다. 요망한 백빈이 내가 지은 사찰을 보고 놀라 자빠지길 바랄 뿐이로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고위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혜자를 보며 말했다.
“소혜자. 너는 모른다. 백빈은 악독한 여인이다.”
“그런가요? 소인이 보기에는 선녀처럼 고운 분이시던데요?”
“선녀가 다 죽었구나. 세상에 그런 선녀도 있더냐?”
“아닌데요. 정말 고운 분이셨는데요.”
소혜자는 지난날 무한에서 본 백빈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께서는 왜 저러실까? 백빈 마마님은 정말로 좋은 분이시던데.’
***
경정은 당소소의 약방에 들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었다.
“추명생과 두억이 재인 마마님을 괴롭혔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경정이 묻자 당소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열음과 소천이 대신 나서서 그들과의 악연에 대해 고했다.
“백빈 마마님. 재인 마마께서 아까 잡혀간 두대협의 단전을 치료해 주신 일을 아시나요?”
“두대협은 무슨. 그놈은 녹림도다. 한마디로 도둑놈이라는 말이지.”
“맞습니다. 추명생과 두억은 정말로 막돼먹은 놈들입니다. 특히나 두억은 재인 마마님께 치료를 받아놓고 추명생의 호위로 들어가 우리를 핍박하였으니 은혜를 모르는 금수같은 자입니다.”
열음과 소천은 그동안 추명생과 두억에게 당한 것이 많았는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재인 마마님이 두억의 단전을 치료하신 일이 소문이 났습니다. 강호인의 망가진 단전을 치료했다는 소문이 난 이후로 천진이 아니라 사방에서 병자들이 몰려오더군요.”
“그런 것이었어?”
“예. 약방을 찾는 병자들이 많아지니 소인과 소천도 합세하여 재인 마마님을 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음과 소천은 당소소가 잘 가르쳐서 이제는 어엿한 의녀가 되어 있었다.
경정은 열음과 소천을 칭찬했다.
“잘했다. 재인 마마님은 재주가 출중하시어 두억이 아니었어도 신의로 이름을 떨치게 되셨을 것이다.”
“그렇지요? 소인들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인 마마님만 모르고 계신다니까요.”
경정은 부끄러워하는 당소소를 보며 물었다.
“이렇듯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돈은 좀 버셨습니까?”
돈 이야기가 나오자 당소소는 또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열음과 소천은 다시 열을 내며 고했다.
“백빈 마마님. 우리 약방은 지금 막대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빚이라고? 설마? 가난한 병자에게 돈을 받지 않은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허. 그랬구나.”
경정은 오는 길에 길가에서 봤던 병자들의 행렬을 떠올렸다.
막돌처럼 가난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소소의 성품으로 보아 그녀는 가난한 백성에게 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이곳에 남기고 간 비자금이 있을 텐데 그것은 어찌했느냐? 다 썼느냐?”
총명한 열음이 장부를 가지고 오더니, 경정에게 보여줬다.
“이것을 좀 보시지요. 하루에 찾아오는 병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략 병자들이 늘어나는 수를 계산하면 일 년이면 스무배에서 백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경정은 병자를 기록한 장부를 보며 혀를 찼다.
“이 정도면 내 비자금으로도 감당이 안 되겠는데?”
“맞습니다. 온통 돈 들어갈 곳뿐이지요. 지난달에는 어쩔 수 없이 황금 전장에서 돈을 빌렸는데 이자가 자그마치 5할입니다. 정말 못된 놈들입니다. 게다가 날이 가면 갈수록 자꾸만 이자가 불어나서 원금을 넘은 지 오래입니다.”
“어찌하여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린 것이냐? 녹빙 오라버니와 녹경에게 말했으면 도와줄 것인데.”
“두 분께선 영화산에 공부하러 가셔서 일 년에 두 번만 녹가로 오십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열음과 소천은 그동안 돈에 쪼들리고, 추명생과 두억에게 괴롭힘을 당한 설움이 몰려왔는지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열음, 소천. 너희들이 그동안 애를 썼겠구나. 재인 마마님은 금전에는 영 소질이 없는 분이니 너희들이 약방의 살림을 꾸리느라 고생했겠어.”
“마마님.”
열음과 소천은 그들의 고충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을 치료하는 일밖에 모르는 당소소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자기 탓인 것 같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경정은 축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걱정하지 말아라. 재인 마마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경정의 한마디에 당소소와 열음, 소천이 고개를 들었다.
경정이 자신만만하게 나만 믿으라며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결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소소의 물음에 경정이 웃으며 답했다.
“우선, 황금 전장에 빌린 돈은 갚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해서 그렇습니까? 오늘 추명생이 잡혀가서요?”
“아뇨. 이제 황금 전장은 제 것이거든요. 제가 모든 빚을 변제 해 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당소소와 열음, 소천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기에서 이겼으니 당연히 황금 전장은 내 것이지. 암, 그렇고말고.’
경정은 황금 전장을 고리대금업에서 일반 전장으로 바꾸고 운영할 생각이었다.
열음과 소천이 총명하니 전장을 맡기면 앞으로 당소소의 약방을 운영할 돈이 생길 것이었다.
경정이 그녀의 계획을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약방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네요. 오늘은 병자를 받지 않는다 방을 붙여 놨는데요. 왜 이렇게 밖이 시끄러울까요? 소인이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열음이 일어서자 경정이 그녀를 막았다.
“아니다. 내가 나가보겠다.”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위라서는 약방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나설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위라서는 잘 걷지 못해 가마를 타고 있었고 옆에 선 범세연이 나설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범세연이 나설희에게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신의를 만나러 왔다. 길을 터라.”
“신의께서는 오늘 하루 병자를 받지 않으시니 이만 물러가시오.”
최정은 갑자기 나타난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꼴보기 싫었는지 큰 소리로 말했다.
“약방 입구에 방을 붙여 놓았는데 보지 못하셨습니까? 눈을 좀 크게 뜨고 다니시든가?”
새파랗게 어린 최정이 끼어들자 범세연의 기도가 무거워졌다.
최정은 범세연의 기도에 놀라 나설희의 뒤에 숨었다.
“이보세요.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소각주야말로 감히 북해빙궁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인가? 돈이 궁해 호위 무사가 되었다고 하더니 이제는 신의의 호위 무사까지 된 것인가? 참으로 없어 보이는구먼.”
“방금 뭐라고 하셨소?”
범세연이 빙각이 돈이 없다고 무시하자 나설희의 안색이 달라졌다.
범세연은 나설희에게 가까이 다가가 전음을 보냈다.
[소각주. 그대 때문에 소궁주가 내상을 입었소. 그대가 정파의 무인이라면 의원을 찾아온 병자를 막는 파렴치한 일을 하지 않겠지.]
나설희는 범세연의 전음을 듣고 멈칫했다.
범세연은 자존심이 센 위라서가 듣지 못하게 일부러 전음으로 나설희를 흔든 것이다.
위라서가 다친 것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던 나설희였기에 함부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럼, 우리는 이만 들어가 보겠소이다.”
나설희는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위라서는 가마를 탄 채 문을 넘어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약방의 문이 열리고 경정이 소이자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위라서는 갑자기 등장한 여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범세연이 먼저 경정이 누군지 알아보고 달려와 고했다.
“소궁주. 무한에서 봤던 백빈 마마님이십니다.”
“뭐라? 백빈?”
위라서는 경정을 노려보며 가마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소궁주. 가마에서 내려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병자다. 어찌하여 내려오라는 것이냐? 어서 신의나 불러와라.”
위라서는 내려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나 결국엔 가마에서 내려와 땅을 밟았다.
범세연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온 위라서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경정을 노려봤다.
“소궁주. 이번만 참고 마마님께 예를 올리시지요.”
“꼭 그래야 하는 것이냐?”
“그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소궁주.”
위라서는 이를 악다문 채 결국 경정에게 예를 올렸다.
“북해빙궁의 소궁주 위라서가 백빈 마마님께 인사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