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도를 찾아라!
“소인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풍운검 대협.”
장호는 허리를 굽혀가며 연신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박달나무 가면을 쓴 고정엽은 맹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그때 청풍 단주 운평이 달려와 고정엽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맹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네.”
고정엽은 운평과 함께 곧장 맹주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장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망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백빈 마마도 모자라 풍운검께도 결례를 범했으니 내 출셋길은 꽉 막힌 셈이다.’
장호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
고정엽은 운평의 안내를 받아 맹주전의 서재에 들어갔다.
벽서온은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무림맹주가 아닌 평범한 남자인 벽서온의 자유롭고 고고한 모습을 본 고정엽은 감정이 상했다.
“멋있는 척은 홀로 다하고 있구나. 여기에 대체 누가 있다고 그러고 책을 보고 있는가?”
“풍운검. 왔느냐?”
벽서온은 고정엽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국의 황제에게 말이 짧구나.”
“박달나무 가면을 쓰고 왔으면 황제가 아니라 풍운검으로 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편하게 대할 수밖에.”
“쳇. 말이나 못 하면.”
벽서온은 오랜만에 만난 고정엽과 서로 격이 없이 인사를 나눴다.
이내 무림맹의 노비가 차를 내왔고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자네가 무한에 온다고 해서 놀랐네. 여름에는 주로 도성 근처에 있는 열하 행궁에 가지 않았는가?”
“무림맹 비무대회나 구경할까 해서 왔네. 그런데 예상밖에 남궁후가 우승했더군. 아무래도 비무대회도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네. 남궁후가 우승한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나도 심각하게 폐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네.”
“그래서 비무대회 축하연도 보러 가지 않고 이곳에서 멋있는 척이나 하고 있던 것인가?”
“우승한 남궁후가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느니 이곳에서 책을 한 줄 더 읽겠네.”
농담을 주고받던 고정엽과 벽서온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하하. 멋있는 척을 안 하니 이제야 조금은 내가 알던 벽서온 같으이.”
“황제 노릇이 힘든가 보지. 언제부터 그렇게 실없는 사람이 된 것인가?”
“자네도 만만치 않아. 까칠한 무림맹 장로들을 상대하느라 능구렁이가 다 됐군.”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고정엽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맹주. 나를 대체 무슨 일로 찾았는가? 자네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부르지는 않았을 텐데?”
벽서온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고정엽을 응시했다.
“나는 오늘 자네를 풍운검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황제 폐하라 생각하고 부른 것이네.”
“나를 황제로 생각했으면 자네가 나를 알현하러 왔어야지.”
“진지하게 듣게.”
“갑자기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강호에 자신을 색마(色魔)라 칭하는 자가 나타났네.”
“색마? 색(色)에 미친 놈인가? 설마 내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인가?”
“지금까지는 강호인, 그것도 여인만 노렸다네.”
“자신을 색마라 부를 정도라면 무공 수위가 높다는 말인가?”
“그렇네. 초절정 고수네.”
고정엽은 의심의 눈초리로 벽서온을 바라봤다.
“그런 일이 있다면 맹주인 자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무림맹이 현상금을 걸고 악인을 쫓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닐 텐데? 왜 나를 보자고 했지?”
“아무래도 그자의 신분이 석연치 않아서 그렇네.”
“신분이라 했는가? 설마, 그자가 고관대작의 아들이기라도 한가?”
“그자가 쓰는 무공이 괴이하네. 아무래도 마교 출신인 듯 보여. 그리고 그자를 천산(天山)에서 봤다고 증언한 사람이 있네.”
순간 고정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산이라면 마교의 본거지가 아닌가?”
“그렇다네.”
“마교는 백 년 전 정마전쟁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었나? 천산도 금제 구역이 되어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이 없을 텐데?”
“살아남은 마교의 잔당들이 천산 인근에 흩어져 숨어지낸다는 이야기를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알고는 있지만 이미 오십 년 전에 검선께서 강호 십대 고수를 데리고 그 일대를 싹 돌아보셨네. 결국은 헛소문이라는 결론이 나지 않았는가?”
“그들이 검선께서 가시기 전에 천산을 탈출하여 강호에 숨어들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살아남은 마교의 후손이 힘을 키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네.”
“하. 마교라니······.”
고정엽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려 백 년 전에 강호에서 사라진 마교다.
고정엽도 책에서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네. 색마가 강호 곳곳에서 목격이 되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암암리에 납치되어 사라진 여인들이 많은 것 같네.”
“그래서 관의 도움을 받고자 나를 부른 것인가?”
“맞네. 색마는 강호인이니 무림맹에서 쫓을 것이네. 하지만 그를 쫓기 위해서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고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엄세록 도통을 시켜 자료를 내어줄 형부의 사람을 보내겠네.”
“고마워. 풍운검.”
고정엽은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 김에 내 책이나 가져가겠네.”
“무슨 책을 말하는가?”
“이거 왜 이래? 황궁 서고에서 보관 중이던 검선의 강호기행록 말이네. 자네가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주지 않았던가?”
“이미 무림맹 서고에서 보관 중이네.”
“여기서 기다릴 테니 꺼내 오게.”
“그것은 아니 될 말이지. 그것은 원래 강호의 것이었네. 무림맹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맞네.”
“말도 안 되는 소리로구나. 황궁 서고에서 보관하던 책이네.”
“그 책은 무림맹에서 재편찬하여 강호인들이 볼 수 있게 할 것이네.”
“무림맹주가 아니라 순 날강도였군. 이럴 거였다면 빌려주지도 않았어.”
고정엽은 강짜를 부리는 벽서온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무림맹 서고라면 내원의 서쪽 끝에 있는 삼층 짜리 건물에 있겠지? 내가 가서 가져가겠네.”
“이곳은 무림맹이네. 서고의 위치를 알아도 아무도 함부로 서고의 물건을 가져갈 수는 없네. 자네가 풍운검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내가 오랫동안 검을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네. 지난번 회강에서 못 보았는가? 나 아직 살아있다고.”
고정엽은 자신을 무시하는 벽서온을 보며 화를 냈다.
벽서온은 분노하는 고정엽을 보며 웃음이 절로 나왔다.
“웃지 마라. 맹주 놈아. 내가 진짜 몰래 숨어들어서 책을 가져가는 수가 있다.”
“안된다니까. 걸려서 망신당하지 말아라. 일국의 황제 폐하가 무림맹에 들어와 도둑질하려던 것이 밝혀지면 나도 감당하지 못한다. 하하하.”
벽서온은 서재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었다.
***
맹주 전을 나온 고정엽은 배웅나온 운평을 따돌리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림맹 서고에 도착한 고정엽은 눈을 치켜떴다.
“내가 못 들어갈 줄 알고?”
그가 서고 건물로 들어서자 앞에서 지키고 있던 맹원이 막아섰다.
그는 박달나무 가면을 쓴 그가 풍운검임을 알아보고 포권을 했다.
“풍운검 대협.”
“길을 터라. 안에 들어가 봐야겠다.”
“아니 됩니다. 이곳은 함부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고정엽은 코웃음을 치더니 조용히 소매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것이라면 들어갈 수 있겠지?”
서고를 지키던 맹원은 고정엽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놀라 외쳤다.
“맹주패······?”
“맹주를 보고 오는 길이다. 내가 서고에 가겠다고 했더니 이것을 내어주더구나.”
“예. 그러셨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서고를 지키던 맹원들이 반으로 갈라져 길을 텄다.
‘역시 맹주패로다. 이것만 있으면 무사통과로군.’
이 맹주패는 벽서온이 경정에게 준 것으로 강명후의 집에서 발견한 것이 돌고 돌아 고정엽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내가 그냥 갈 줄 알았겠지? 흥. 당당히 내 발로 서고에 들어가 강호기행록을 찾아올 것이다.’
고정엽은 맹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정엽이 서고 안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허름한 옷을 입은 노비가 나타났다.
그는 무림맹에서 허드렛일하는 노비였다.
“맹원 나리. 서고를 청소하러 왔습니다.”
맹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처음 보는 놈이로구나.”
“오늘 비무대회의 우승자를 기리는 축하연이 열리지 않습니까? 일손이 부족하여 오늘 하루만 제가 이곳을 청소하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흙칠을 하고 변장한 경정은 맹원을 보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가 서고의 출입패를 가지고 있었기에 맹원은 그러려니 했다.
“들어가 봐라. 빨리 청소하고 나와라.”
“예. 맹원 나리.”
***
무림맹 서고는 총 삼층 건물로 일 층과 이 층에는 무림맹원들이 대여해 갈 수 있는 일반 무공서적이 있었다.
고정엽은 그런 곳에 위대한 검선께서 쓰신 책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즉시 삼층으로 올라갔다.
안쪽 책장부터 살피던 고정엽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린 것이다.
고정엽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주위를 살폈다.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일 층, 이 층을 지나 삼층에 당도했다.
고정엽은 책장 뒤에 몸을 숨기고 누가 왔는지 살폈다.
그는 빗자루를 손에 쥔 체구가 자그마한 노비였다.
‘서고를 청소하는 자로구나. 마침 잘 되었다. 저자에게 물어보자.’
고정엽은 긴장을 풀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빗자루를 들고 서고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경정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지? 조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경정은 비무대회 우승자 축하연에 참석하려고 무림맹에 왔다가 장보도를 훔쳐가기 위해 몰래 서고에 온 것이었다.
“여봐라. 너는 서고에서 일하는 노비이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경정은 대경실색했다.
경정은 다급하게 얼굴에 손을 올려 확인했다.
하오문에서 급히 구한 인피면구가 얼굴에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한 경정은 한숨 돌렸다.
‘설마 나를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
경정이 계속 고개를 돌리고 있자 고정엽이 다시 물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여봐라.”
고정엽은 말없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노비의 앞으로 걸어갔다.
경정은 의문의 사내가 의심할까 두려워 즉시 뒤돌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서고에 귀빈이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내가 귀빈인 것은 어찌 알았느냐?”
경정은 허리를 조아리며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오늘은 무림맹 비무대회의 축하연이 열리는 자리니 강호의 귀빈께서 많이 찾아주셨지요. 그래서 오늘 방문해주신 귀빈 중 한 분이라 생각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부디 살펴주십시오.”
고정엽은 똑 부러지게 답하는 노비를 보며 웃었다.
“몇 살이냐?”
“소인은 올해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너는 이곳 서고에서 일하는 노비가 맞느냐?”
“예. 그렇습니다. 귀빈 나리.”
“마침 잘 되었다. 내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인지 말씀하시지요.”
“검선께서 쓰신 강호기행록이 이 서고 안에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그것을 가져가려고 온 것이다.”
“강호기행록이요?”
경정이 놀라 고개를 들자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따.
그런데 그자는 얼굴에 박달나무 가면을 쓰고 있었다.
“풍운검······ 대협?”
“나를 알고 있구나.”
“대협께서 워낙에 유명하시니까요.”
고정엽은 무림맹에서 일하는 노비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경정은 심장이 두근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풍운검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지?’
고정엽은 노비에게 다시한번 물었다.
“강호기행록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것이냐? 모른다는 것이냐?”
‘저와 목적지가 같으시네요. 그 책은 황궁 서고의 안쪽에 숨겨진 비고(秘庫)에 있습니다. 그리고 비고 안에는 오대악적이 남긴 장보도의 반쪽도 같이 있지요.’
경정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모른다고 발뺌할까? 아니야. 내가 모른다고 하면 풍운검께서는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여기서 강호기행록을 찾으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비고에 들어가지 못한다. 방법은 하나다. 같이 비고에 가는 거지.’
경정은 풍운검과 단둘이 비고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심장아. 나대지마라. 지금 비상사태라고.’
경정은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풍운검 대협. 소인이 책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너를 따라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