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251)

빙공의 극의를 선보이다.

소풍영은 질끈 묶은 머리를 흩날리며 엽선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조심!”

소풍영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치니 엽선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엽선이 부르자 소풍영이 고개를 획 돌렸다.

“왜 그러시나?”

“지금 나를 치고 가지 않았는가? 어서 와서 사과하게.”

소풍영은 웃으며 엽선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하주경의 얼굴을 한 엽선을 빤히 쳐다봤다.

‘역시 내가 쓰고 있는 인피면구의 질이 훨씬 좋군. 가까이서 보니 질감이 푸석푸석하고 피부가 두꺼운 것이 표가 나.’

엽선은 소풍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면구를 썼더니 불편하구나.’

엽선은 황급히 소풍영을 피해 자리를 떠났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시게. 젊은 사람이 단정하지 못하군.”

소풍영은 떠나는 엽선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리며 작게 말했다.

“흥. 계속 이럴 건데.”

***

드디어 무림맹 비무대회 예선전의 막이 올랐다.

다행히 소풍영과 엽선의 비무는 첫 번째 순서였다.

“황후 마마. 이 비무만 보고 봉황대회를 보러 가시지요. 나설희 무인의 비무를 봐야 하니까요.”

“그러자꾸나. 백빈. 나도 소각주가 어떤 싸움을 할지 궁금하구나.”

그때 주위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비무대에 소풍영과 엽선이 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잘생긴 소풍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분은 대체 뉘신 데 저렇게 잘생기셨나요?”

“빙각에서 오신 소풍영 무인이랍니다.”

“빙각이라면 지난번에 북해 빙궁에 괴롭힘을 당한 문파 말입니까?”

그때 소풍영이 자연스럽게 그가 쓴 가발을 뒤로 젖혔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자 구경꾼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엽선은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소풍영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은 아까 나를 밀친 그자가 아닌가? 저자가 소풍영이었다니.’

그때 무림맹원이 비무대 위에 오르더니 예선전의 규칙을 말해줬다.

“각자의 병기는 사용해도 됩니다. 비무 시간은 제약이 없으나 한 명이라도 치명상을 입으면 그 자리에서 비무를 멈추십시오. 저기 계시는 감독관이 나서도 비무는 중지됩니다. 아시겠소?”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소풍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엽선을 바라봤다.

엽선은 불편한 얼굴을 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시작하시오.”

무림맹원의 말과 함께 비무가 시작되었다.

엽선은 즉시 뒤로 몸을 날려 소풍영과 거리를 벌렸다.

‘빙공은 내공 소모가 큰 무공이다. 그러니 이렇게 멀리까지는 공격하지 못하겠지. 저자가 인내심을 잃고 달려들면 그때 혼쭐을 내주리라.’

엽선은 소풍영을 이십 대의 청년이라 생각하여 그가 이런 탐색전을 참지 못하고 먼저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엽선의 예상과 달리 소풍영은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비무장을 걷기 시작했다.

‘엽선. 네놈이 노리는 것을 내가 모를까봐? 내가 달려들면 단칼에 나를 제압하고 이기고 싶겠지. 멋있게 이기고 싶어서 환장했어. 흥.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소풍영과 엽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무장을 빙빙 돌기만 하자 관객들은 따분해하며 떠들었다.

“빙각에서 온 무인의 상대가 동창이라고? 동창이 대체 뭔가?”

“황궁에서 왔다던데?”

“관무불가침인데 어찌하여 황궁에서 무림맹 비무대회에 참가한 것인가?”

“황궁에 동창이라는 환관 세력이 있는데 그들이 무공을 꽤 한다더군. 그리고 지난날 동창에서 비무대회의 우승자를 배출한 적도 있네.”

“잠깐! 그렇다는 것은 저자가 내시라는 말인가?”

“그렇다네.”

“허. 고자 놈이 감히 신성한 무림맹 비무대회에 참가했다는 말인가?”

관객석에서 고자 놈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소풍영과 엽선이 동시에 쳐다봤다.

말을 내뱉은 사람은 두 사람의 살기에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사라지니 동창의 위엄에 땅에 떨어졌구나. 거세한 채로 무공을 익혀 고수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대들이 아는가?’

소풍영은 편치 않은 얼굴로 엽선을 보다 흠칫 놀랐다.

엽선의 손바닥에서 수상한 기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풍영은 엽선의 손목 힘줄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해냈다.

‘열화권(烈火拳)이로구나. 놈이 규화보전을 익힐 깜냥이 되지 않으니 정반대의 무공을 익혔어.’

규화보전은 양기를 내공으로 치환해야 하는 무공이기에 아무나 익힐 수 없었다.

그래서 동창이 가진 가장 훌륭한 무공임에도 불구하고 대성한 사람이 소풍영밖에 없었다.

하지만 열화권은 달랐다.

불의 성질을 띤 이 무공은 몸에 양기를 더해주기 때문에 환관들이 환장하며 배우는 무공이었다.

‘네놈 역시 다른 환관들과 마찬가지로 사내다움을 갈망했구나. 열화권은 보기에는 그럴듯한 무공이지만 대성하려면 엄청난 양의 영약이 필요하다. 네놈이 열비와 결탁하여 광산을 노리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소풍영은 엽선이 어찌하여 후궁을 위해 움직이는지 이유를 깨닫고 조소했다.

‘무인은 수련을 통해 강해진다. 지름길은 있을 수 없지. 네놈에게 정도(正道)란 무엇인지 알려주마.’

소풍영은 아까 나설희에게 빙공을 익히며 쌓아뒀던 내공을 모두 건네줬다.

하지만 딱 한 번 사용할 정도는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일격(一擊)에 나를 제압하고 싶지? 그렇다면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소풍영이 그 자리에 멈춰서 고개를 숙였다.

엽선은 갑자기 탐색을 멈춘 소풍영을 보며 조소했다.

‘빙공을 사용하려는 것인가? 역시 어린놈이라 그런지 인내심이 부족하군.’

엽선의 손에는 이미 열화권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공을 슬쩍 만 흘려도 이 작은 비무장을 홀라당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엽선은 소풍영이 공격하면 즉시 열화권을 방출하여 그의 빙공을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풍영이 눈을 떴다.

소풍영은 갑자기 비무대 한복판으로 걸어가더니 바닥에 손바닥을 댔다.

사람들은 소풍영이 왜 저러는지 궁금해했다.

“백빈. 저자는 빙각의 객경이라 했는가?”

“그렇습니다. 황후 마마.”

“나는 강호인의 비무는 칼과 검이 서로 부딪히며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적일 수도 있구나.”

“원래는 날아다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가?”

“예. 황후 마마.”

“그럼, 저들은 왜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는가?”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이미 비무는 시작되지 않았는가?”

“저들은 아마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비무를 끝내려는 것 같습니다.”

“흠. 그렇다면 재미가 없겠군.”

황후는 내심 무인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기대했기에 소풍영과 엽선의 모습에 실망했다.

“황후 마마. 이제 재미있어질 것입니다.”

“흠. 그래?”

황후가 비무대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소풍영의 손에서 엄청난 내공이 쏟아져 나왔다.

멀리 있는 특별석에서도 소풍영이 쏟아내는 시리도록 차가운 내공이 느껴질 정도였다.

경정은 소매를 펼쳐 황후의 앞을 가리며 보호했다.

“황후 마마. 보십시오. 저것이 바로 빙공(冰功)이라는 것입니다.”

“백빈. 비무대가 얼어붙고 있네. 어찌 저 큰 비무대를 얼린단 말인가?”

황후뿐만 아니라 비무를 구경하던 사람들도 대경실색했다.

소풍영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비무장에 얼음을 뒤덮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 모든 것을 얼음으로 뒤덮는다. 이것이 빙공의 극의(極意)다. 참으로 멋들어진 무공이야.’

소풍영이 비무대를 얼리자 엽선은 대경실색하여 뒤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의 다리가 비무대와 함께 꽁꽁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엽선은 놀라서 황급히 열화권을 분출했다.

그의 손에서 희뿌연 연기가 나오며 불꽃이 튀었다.

“이보게. 저 동창의 손에서 불이 나오고 있네.”

“빙공과 화공이 만나다니. 대진표가 참으로 오묘하네. 무림맹이 알고 이 두 사람을 붙인 것일까?”

사람들은 얼음과 불의 싸움을 기대하며 즐거워했다.

비무대를 모두 얼려버린 소풍영은 손바닥을 털며 일어섰다.

그는 지금 남겨뒀던 빙공의 내공 모두 소모한 상태지만 그 빈자리는 규화보전의 음명신공(陰明神功)으로 자연스럽게 채워졌다.

소풍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엽선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엽선은 불꽃으로 얼음을 녹이려고 했지만 녹지 않았다.

이것은 그냥 얼음이 아니라 설니홍조의 극의를 제대로 담은 것이기에 당연했다.

엽선의 앞에 선 소풍영이 그를 보며 웃었다.

잘생긴 미남자의 얼굴이 지옥에서 내려온 사신으로 보였다.

엽선은 이마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고 면구를 붙여놨던 풀이 녹아 내렸다.

“안색이 별로구나.”

소풍영이 손을 들어 엽선의 땀을 닦으려 했다.

엽선은 인피면구가 벗겨질까 봐 두려워 소풍영의 손을 쳤다.

“이거 놔라.”

“괜찮은가? 괜찮을 리가 없는데?”

“감히 내게 하대를 하는가?”

“그게 어때서? 너와 나는 같은 연배가 아닌가?”

엽선은 새파랗게 어린 놈이 그에게 하대하자 속에서 열불이 났다.

엽선의 손에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그가 소풍영을 공격하려는데 소풍영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여름이라 그런지 파리가 날아다니는군.”

소풍영이 파리를 잡겠다며 엽선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몸이 굳은 엽선은 화들짝 놀랐다.

‘이놈이 대체 무엇을 하려고?’

엽선은 몸도 움직일 수 없고 말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파리는 자고로 쓰레기를 좋아하는 법이지.”

소풍영은 자연스럽게 엽선의 단전을 손으로 툭툭 쳤다.

감독관은 이것이 별일이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맞는 엽선은 죽을 것처럼 아팠다.

‘헉! 헉!’

소풍영이 손을 댈 때마다 엽선의 단전에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소풍영은 음명신공으로 만든 기운을 엽선의 배에 동그랗게 심었다.

엽선의 단전이 마치 감옥에 갇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정도면 깨끗해졌군. 다시는 파리가 들러붙지 못할 것이야.”

엽선은 방금 소풍영이 그의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혈도를 찍어놓고 파리 운운하며 놀린 거라 생각했다.

소풍영은 할 일을 모두 끝내자 엽선의 혈도를 풀었다.

엽선은 양손이 자유로워지자 소풍영에게 열화권을 날렸다.

그러나 엽선보다 소풍영이 한 수 빨랐다.

소풍영이 동창에 들어가면 제일 처음 배우는 풍파권의 일 초식으로 엽선의 배를 쳤다.

‘크헉!’

엽선은 대경실색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가 풍파권의 초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엽선의 입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여전히 발이 묶인 채 어색한 자세로 비무대 위에 엎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동창의 무공을 아는 것이냐? 누구냐 넌?”

소풍영이 엽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소풍영.”

“뭐라?”

“소풍영이라고. 벌써 귀가 먹었나?”

“허. 허억!”

엽선은 끝내 참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소풍영이 비무대를 얼린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승부가 결정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환호했다.

예선전의 첫 번째 우승자가 탄생한 것이다.

“와아! 소풍영! 대단하다.”

“빙각이 이렇게 대단한 문파였다니.”

“방금 보았나? 복부를 강타한 일격에 쓰러졌네.”

황후 섭부용은 지금 손수건을 꽉 움켜쥔 채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빈. 지금 내가 본 것이 대체 무엇인가?”

“소풍영이라는 자가 빙각의 숨은 고수였나 봅니다. 비무대를 통째로 얼려버렸네요.”

“백빈. 강호의 고수란 이런 것이었나? 참으로 놀라워.”

“그렇지요. 강호는 이렇듯 멋진 곳이랍니다.”

경정은 황후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웬일인지 그녀의 기분이 뿌듯했다.

“황후 마마. 더 놀라운 것을 보러 지금 당장 봉황대회로 가실까요?”

“봉황대회?”

“빙각의 객경인 분도 저런 실력자인데 소각주인 나설희 무인은 얼마나 더 멋질까요? 어서 보러 가요. 황후 마마.”

“하지만 폐하의 친우분들인 풍죽오우가 잠룡대회에 나온다고 했는데. 그분들을 보고 가야지.”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 잠룡대회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어찌하여 그런가?”

“어서 가시지요. 황후 마마. 늦겠습니다.”

“백빈이 그렇다면 가야지.”

경정은 황후와 떠나며 비무대 위에 있는 소풍영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승님은 역시 최고세요.]

[허허허. 이 정도쯤이야. 나의 본 실력을 숨기느라 힘들었다.]

[숨겨지지 않던데요? 그나저나 저는 먼저 봉황대회에 가볼게요.]

[나도 곧 따라가마.]

[스승님은 못 가실 것 같은데요?]

[아니 왜?]

비무대에서 내려와 봉황대회로 가려던 소풍영이 무림맹원에게 붙잡혔다.

“소풍영 대협은 그 자리에 서시오.”

“왜 그러십니까?”

“참. 이것을 어찌해야 할지.”

맹원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씀하시지요. 왜 그러시는데요? 제가 비무의 규칙을 어기기라도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참나.”

잠룡대회를 감독하던 감독관과 맹원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 잠룡대회 비무대회는 이것으로 끝내야겠소.”

“왜 그렇지요?”

“비무대가 녹질 않소. 다른 사람들이 설 수 없단 말이오.”

소풍영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으며 읊조렸다.

‘큰일이네. 저거 잘 안 녹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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