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대회의 막이 오르다.
열비는 백빈이 저자에 나갔다가 수상한 여인들을 데려온 사실을 알게 됐다.
“마마님. 그들은 영고탑에서 온 강호인이라고 합니다.”
“여인도 무공을 익힌단 말이냐?”
“무림맹에서 열리는 비무대회에 참가하려고 왔다가 북해에서 온 새외 무림인에게 죽을 뻔한 것을 백빈이 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백빈과는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마마님.”
열비는 경정의 오지랖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분이 불분명한 자를 데려왔는데 황후 마마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냐?”
“황후 마마께서도 걱정이 되어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이 마음에 들어 궁까지 하나 내어주셨다고 하네요.”
“황후 마마께서 중심을 잘 잡아주셔야 할 것을. 어찌하여 백빈에게 휘둘린단 말이냐.”
열비는 머리가 아픈지 머리에 이마를 짚었다.
“마마. 머리가 아프십니까? 어의를 불러올까요?”
“되었다. 너는 이만 나가보아라.”
“예. 마마님.”
순아가 나가자 열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창이 또 일을 그르칠까 봐 잠이 오지 않는구나.”
열비는 눈을 감고 마음을 편히 가졌지만, 그의 얼굴에는 증오의 감정만이 느껴졌다.
***
나설희와 최정이 행궁에서 요양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내일부터 무림맹 비무대회의 예선전이 열리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 행궁을 떠나기로 했다.
나설희가 황후의 앞에 서서 포권을 취했다.
“황후 마마. 그동안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
최정도 덧니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황후 섭부용이 나설희와 최정의 앞에 섰다.
“아니네. 그대들을 보는 내가 더 즐거웠네. 여인의 몸으로 무공을 익히다니 참으로 대단하네.”
황후는 몸이 회복되자 행궁에서 빙공을 수련하던 나설희를 떠올렸다.
무복을 입고 하얀 서리를 날리던 그녀의 모습에 황후는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비무대회에 후궁들을 데리고 꼭 가보마.”
“황공합니다. 황후 마마.”
“꼭 본선에 나갈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황후 마마.”
나설희와 최정은 이제 경정과 강하연의 앞에 섰다.
누가 뭐래도 가장 고마운 사람은 바로 경정이었다.
“백빈 마마.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나도 황후 마마님과 같았네. 자네들이 무공 수련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네.”
경정은 말을 마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소이자가 달려와 나설희와 최정 앞에 커다란 상자를 내려놨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백빈 마마?”
“열어보게. 내 선물이네.”
나설희는 주저하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좋은 천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무복이 있었다.
나설희와 최정이 놀라서 경정을 바라봤다.
“빙각의 무인들은 흰색 무복만 입는다고 들었네. 화려한 비단은 싫어할 것 같아서 좋은 무명천을 골라 옷을 만들라 시켰네. 다만 소매와 밑단에 아주 조금의 비단은 덧댔으니 고려해주게.”
최정이 상자 안에서 무복을 꺼내 살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낡은 무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소각주. 이것을 보시어요. 선녀님이 입으시는 날개옷 같습니다.”
경정은 새 옷을 보고 좋아하는 최정을 보며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설희는 경정에게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저희들을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새 무복까지 내려주시다니요.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네.”
“예?”
나설희가 놀라 고개를 들자 황후가 안상궁을 불렀다.
이번에는 안상궁이 궁인들과 함께 상자 다섯 개를 가져와 나설희와 최정의 앞에 놓았다.
황후가 눈짓하자 안상궁이 말했다.
“상자를 열어보아라.”
“예. 상궁 마마.”
궁인들이 상자를 열자 약초 냄새가 당청 안에 퍼졌다.
그것은 나설희와 최정이 약재상에서 사려고 했던 난화초였다.
“이것들을 구하려다 빙궁의 횡포로 사지 못하였다고 들었네. 맞는가?”
“그러하옵니다. 황후 마마.”
“자네들을 위해 사람을 시켜 난화초를 구해왔네. 약초를 캐서 내다 파는 심마니들에게 웃돈을 얹어서 산 것이니 품질이 좋을 걸세.”
나설희와 최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의 난화초는 빙각이 십 년은 넘게 사용할 양이었다.
“황후 마마.”
나설희와 최정이 황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경정은 일부러 난화초 이야기를 황후에게 흘렸고 속이 깊고 정이 많은 황후가 사람을 시켜 난화초를 구해온 것이었다.
경정 또한 감동하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역시 우리 황후 마마님이 최고야.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에 또 있을까?’
***
엽선은 거울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 보이는 젊은 사내의 모습에 흡족한 것이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소엽자는 소름이 돋았다.
지천명에 이른 노회한 환관이 젊은 사내의 얼굴을 하고 만족스러워하다니.
“소엽자.”
엽선이 부르자 소엽자가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예. 엽태감 나리.”
“오늘 나는 누구와 맞붙는가?”
“소인이 대전표를 관리하는 맹원에게 돈을 써 알아본 결과, 청남파의 후기지수인 이호명이라는 무인과 겨루게 되실 것입니다.”
“청남파라? 처음 듣는 이름이구나. 대전표를 가져와 봐라.”
“예. 태감 나리.”
소엽자는 맹원에게 받아온 예선전 대전표를 엽선에게 건넸다.
“풍죽오우가 참가했구나. 이자들은 그동안 비무대회의 참가를 꺼리던 자들이 아니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남궁세가의 둘째 공자와 사천당가의 소가주가 참가했더군요.”
“풍운검은 없느냐?”
“그자는 강호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흠. 그렇군.”
엽선은 대전표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참으로 잘되었어. 내가 풍죽오우를 이기고 비무대회에서 우승한다면 동창의 이름이 널리 퍼져나가겠군.’
대전표를 훑던 엽선은 갑자기 눈이 커졌다.
“소엽자. 빙각에서 나온 출전자는 누구냐?”
“그자는 소풍영이라는 자인데 소인이 알아보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빙각이라면 얼마 전에 저자에서 빙궁과 맞붙었던 영고탑에서 온 문파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일로 한동안 무한이 시끄러웠습니다.”
엽선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소엽자. 대전표를 관리하는 맹원에게 얼마를 찔러줬는가?”
“은자 열 냥 정도가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자에게 은자 백 냥을 내어주고 대전표를 바꿔달라 해라.”
“어떤 상대를 원하시는지요? 남궁세가 둘째 공자이옵니까? 아니면 사천당가 소가주이옵니까?”
소엽자는 엽선이 풍죽오우를 지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엽선의 입에서 예상 밖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빙각의 소풍영. 그자가 바로 내 상대니라.”
소엽자는 놀랐으나 엽선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엽선이 시키는 일은 뭐든지 군말 없이 해야 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소엽자가 나가자 엽선은 대전표를 내려놓고 다시 거울을 감상했다.
“동창의 고수였던 소풍영과 같은 이름이라니. 운명이란 참으로 신기해. 하하하.”
하주경의 오만한 얼굴에 엽선의 고약한 미소가 더해져 거울 속의 남자는 마치 악신 같았다.
***
무림맹 비무대회의 예선전이 밝아왔다.
예선전은 비무대회에 도전하는 수많은 무인을 골라내는 과정이었으나 간혹가다 대전표가 잘못 나오면 우승 후보가 먼저 붙는 경우도 상당했다.
예전선 대전표가 뜨자 비무대회를 보러 온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무인들이 맞붙게 된 것이다.
“허허. 빙각과 빙궁이 또 붙게 되었네.”
“그것이 무슨 말인가? 또 붙다니?”
“자네는 무한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외 비무에 대해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빙궁의 소궁주가 장외 비무에서 사람을 죽일 뻔했다가 백빈 마마님에게 훈계를 들은 것을 말하는가?”
“맞네. 그때 북해 빙궁 소궁주가 죽이려고 했던 자들이 바로 빙각의 무인들이었네. 이들이 예선전에서 다시 맞붙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할꼬.”
“빙궁의 소궁주가 그토록 대단한가?”
“말도 말게. 손에서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그것을 정통으로 맞으면 건장한 사내라도 골로 갈걸세.”
“어이구. 빙각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대단한 자에게 걸렸으니 예선전에서 탈락하겠구먼.”
“탈락이 문제가 아니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할걸세.”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구경꾼들이 갑자기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푸른색 무복을 입은 여인들이 걸어왔다.
북해 빙궁의 소궁주인 위라서와 빙궁의 무인들이었다.
“저들이 바로 북해 빙궁에서 온 무인들이네.”
“맨 앞에서 걷는 사람이 소궁주인가? 어려 보이는데 벌써 위엄이 넘치는군.”
“위엄은 무슨. 독하게 생겼구먼.”
범세연이 다가와 위라서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소궁주. 구경꾼들의 말은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나는 벌레 같은 놈들의 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예. 소궁주.”
구경꾼들은 빙궁의 무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떠들었다.
“평소라면 잠룡대회의 구경을 갈 테지만 오늘은 아니네. 난 오늘 봉황대회를 구경해야겠어.”
“맞네. 빙공 싸움이 더 대단할 것이야. 어서 가세. 자리가 없을 수도 있으니.”
구경꾼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봉황대회가 열리는 비무장으로 떠나고 얼마 후, 빙각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빙각의 임시 객경으로 있는 소풍영과 소각주 나설희 그리고 어린 제자 최정이었다.
소풍영이 나설희와 최정을 보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오늘 반드시 이긴다.”
소풍영은 지난 일주일 동안 나설희와 최정의 수련을 도왔다.
나설희와 최정은 소풍영이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임을 알고 밤잠도 설쳐가며 그에게 무공을 배웠다.
“스승님. 제자는 빙궁에 절대로 지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그냥 소대협이라고 부르라니까.”
“아닙니다. 스승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당연히 스승님으로 모셔야지요.”
“그렇다면 편하게 불러라.”
소풍영은 갑자기 생긴 두 제자를 보며 경정을 떠올렸다.
‘내가 말년에 제자 복이 터졌군. 그런데 또 하나같이 여인이야. 참나.’
잠룡대회와 봉황대회의 비무장으로 가는 갈림길에 서자 소풍영이 말했다.
“소각주. 내 비무가 끝나면 바로 소각주를 보러 갈 것이니 기다리게.”
“기다리겠습니다. 스승님.”
나설희가 고개를 돌리자 소풍영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손을 내밀어 보아라.”
“예?”
“어서 내밀어 보아라.”
나설희가 손을 내밀자 소풍영이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나설희는 그녀의 손에 퍼지는 차가운 한기에 화들짝 놀랐다.
나설희가 뒤로 물러서려고 하자 소풍영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한참 동안 손을 마주하고 서 있던 소풍영이 그제야 손을 뗐다.
“허억.”
나설희는 단전에 꽉 들어찬 한기에 놀라 소풍영을 바라봤다.
“스승님. 이것은······?”
“내가 가진 내공의 일부를 소각주에게 넘겼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빙공은 내공 싸움이다. 북해 빙궁의 빙백신장을 막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다.”
“스승님도 오늘 비무를 하시지 않습니까? 대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소풍영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내어준 것은 그가 지닌 음명신공의 내공이 아닌 이번에 설니홍조를 익히며 쌓은 내공이었기 때문이다.
소풍영은 웃으며 나설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반드시 이기거라. 너는 할 수 있다.”
소풍영은 말을 마치고 잠룡대회가 열리는 비무장으로 날아갔다.
나설희는 아직도 손에 가득 찬 한기를 느끼며 작게 속삭였다.
“스승님. 꼭 이기고 빙각의 명예를 되찾겠습니다.”
***
잠룡대회의 비무장에 엽선이 들어섰다.
사내들은 빙각과 빙궁의 비무를 보러 봉황대회를 보러 갔지만 이곳은 사내들의 혈기 넘치는 비무를 보러온 여인들이 많았다.
경정도 황후와 강하연 그리고 열비까지 데리고 무림맹에서 마련해준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강하연은 비무장으로 들어서는 엽선을 보며 말했다.
“저 무인이 들어서니 여인들이 웃으며 떠드는군요. 잘생겨서 그런가 봅니다.”
‘쳇. 잘생기긴 뭐가 잘생겼습니까? 저 면구 안에 노괴(老怪)가 들어있다고요.’
경정은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엽선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비무장이 들썩거렸다.
엽선이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머. 저 사람을 좀 보십시오.”
강하연이 놀라 손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엽선은 여인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받으며 으스대며 걷다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환호하는데 그가 아닌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엽선이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남자가 봐도 잘생긴 사내가 엽선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희대의 미남자로 변한 소풍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