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51)

열비, 동창을 움직이다.

‘대체 열비와 무림맹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경정은 해운 전당포를 통해 알아 낸 정보를 속으로 복기했다.

‘엄세록 스승님과 열비는 엄씨 집성촌에서 함께 나고 자랐다. 스승님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무관에서 제일 유명한 인재셨다고 했지. 하지만 열비는 그저 엄가의 딸 중 한 명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자다. 수녀가 되고 비로 품계가 오른 뒤에야 엄가에서 그녀를 떠받들기 시작한 것이란 말이다. 아무리 봐도 무림맹과 접점이 없는데?’

경정은 하오문도 찾지 못한 내막이 숨어있다고 여겼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열비 마마. 제가 황후 마마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경정의 말에 열비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백빈은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호호호.”

경정은 애써 큰 소리로 웃으며 열비를 살폈다.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한 열비는 더는 청초각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경정은 갈 준비를 하는 열비를 이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한 가지만 더 알아보자.’

경정이 일어서려는 열비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엄세록 도통께서는 곧 황궁을 떠나실 것이니 열비 마마께서 적적해지시겠네요.”

엄세록이 황궁을 떠난다는 말에 열비의 눈이 커졌다.

엄세록이 궁을 떠나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열비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긴장했다.

경정은 당황하는 열비를 보며 미끼를 던진 보람을 느꼈다.

“마마께서는 처음 들으시나 봅니다. 두 분은 친척이시니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엄세록 도통과 왕래하지 않습니다.”

열비는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신가요? 두 분께서 친척이시라 친하게 지내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친척인 것은 맞지만 남녀가 유별하니 함부로 왕래할 수는 없지요.”

“송구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역시 열비 마마님은 남다르시네요.”

경정은 열비를 칭찬하며 입을 닫았다.

결국 열비가 참지 못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백빈은 엄도통이 황궁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아시나요? 혹시 금의위를 그만두는 것인가요?”

“폐하께서 황궁 밖에서 사실 때, 서훈 선생이 운영하시는 학관에 다닌 사실을 열비 마마님도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당시 폐하와 동문수학하셨던 분 중에 벽서온이란 분이 계십니다. 지금의 무림 맹주시지요.”

열비는 강호의 일은 알지 못해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맹주님과 상의하여 엄도통을 무림맹에 파견을 보내시기로 하셨답니다. 무림맹에 파견을 나가면 꽤 오랫동안 궁에 돌아오지 못하시겠지요. 어쩌면 영원히 못 돌아오실 수도 있습니다. 아예 무림맹원이 되실 수도 있는 일이지요.”

원생에서 실제로 무림맹에 파견 간 자는 엄세록이 아니라 엄세록이 직접 뽑은 환관이었다.

바로 환관 백경정, 그녀 자신이었다.

열비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이 굳었다.

비단옷을 쥐어뜯는 열비를 보며 경정은 조소를 흘렸다.

경정은 행궁에 가기 전에 확실하게 확인해 보고 싶었다.

‘원생에서 스승님은 동창의 병필태감인 엽태감에게 음해당해 죽음을 맞이하셨다. 자, 이번에는 어찌할 텐가? 열비. 그대가 정녕 동창을 움직일 수 있는지 그것이 알고싶다.’

***

열비는 함복궁에 도착하자마자 침전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침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열비가 멈추어 섰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직 엄세록에게 어찌 복수해야 할지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그가 궁을 떠나다니. 혹시 백빈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열비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백빈은 매일 밤 폐하를 모시니 사실이겠지. 그리고 백빈은 나와 엄세록 사이의 은원을 알지 못하니 그 일을 일부러 흘린 것도 아니야.”

고민하던 열비는 결국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탁자로 걸어가 지필묵을 꺼냈다.

서찰 두 장을 완성한 열비가 순아를 불렀다.

순아가 침전 안으로 들어오자 열비는 밀봉한 서찰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마님?”

“이것은 사가에 계시는 아버님께 보내거라.”

“주인 나리께 보내시는 서찰이군요. 알겠습니다. 마마님.”

순아는 엄가로 보낼 서찰을 챙겨 넣었다.

“이것은 소엽자에게 전해라.”

두 번째 서찰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받는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마마님.”

“소엽자에게 건네면 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마마님.”

순아가 나가자 침전에는 열비 홀로 남았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읊조렸다.

“그자의 손을 잡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엄세록이 궁을 나가기 전에 처리해야 해.”

***

병필태감의 집무실로 소엽자가 들어왔다.

“엽태감 나리. 함복궁에서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이것을 태감께 전해달라 했습니다.”

소엽자는 열비가 보낸 봉투를 엽선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열비가 엽선에게 보낸 서찰이 있었다.

서찰을 꺼내 읽은 엽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열비는 어찌하여 엄세록을 음해하려는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엄세록이 있기에 열비의 지위가 확고해지는 것을. 어찌하여 자신의 뒷배를 없애려고 하는 것인가?’

서찰 안에는 동창에서 엄세록을 음해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열비는 동창과 금의위 사이에 알력 다툼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동창의 손을 빌려 엄세록이 출궁하기 전에 일을 치르고 싶었다.

‘내가 병필태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금의위와 껄끄러운 일을 만들 수는 없지. 열비가 엄세록과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열비의 청을 그대로 들어줄 수는 없다.’

엽선이 내공을 끌어올리자 서찰을 든 그의 손에 불길이 일었다.

‘화르르.’

서찰은 엽선의 손에서 재가 되어 흩날렸다.

소엽자는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는 엽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고했다.

“엽태감 나리. 열비 마마께서 자꾸만 태감 나리를 수족처럼 부리려고 하시는데 그냥 이대로 놔두실 것입니까? 소인은 열비 마마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손에서 잿가루를 털어낸 엽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이다. 내가 열비의 일을 도와주면 그에 따른 보상이 따르지.”

“보상이라니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엽선은 웃으며 방금 열비가 보낸 서찰의 마지막에 적힌 글귀를 떠올렸다.

‘열비가 급하긴 했군. 그녀의 아비가 관리하는 철광석 광산의 이권을 일부 양도하겠다니. 열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이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

열비의 아버지인 엄관은 산서성(山西省) 있는 철광석 광산의 관리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열비가 후궁이 되고 비의 자리에 오르자 그도 신분이 상승하여 지금은 광산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엽선은 열비의 수령태감으로 있을 때부터 이 광산의 이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열비가 순순히 거래를 응하지 않자 심기가 불편하던 참이었다.

엽선이 웃으며 소엽자에게 말했다.

“아직은 괜찮다. 열비 마마께 입은 은혜가 있으니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

엽선이 평소와는 달리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자 소엽자의 얼굴이 굳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됐다. 너는 나가서 하주경을 불러오너라.”

“예. 태감 나리.”

소엽자가 물러나고 얼마 후에 하주경이 엽선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엽선은 그의 무공 성취를 먼저 살폈다.

“드디어 규화보전 일성에 도달했구나. 속도가 매우 빨라. 흡족하도다.”

“모든 것이 태감 나리께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주경의 말대로 엽선은 동창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를 돕고 있었다.

하주경이 먹은 영약의 가격이 천금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이런 막대한 지원이 가능한 것은 동창이 지닌 재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엽선이 철광석 광산을 노리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엽선이 하주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금의위 엄세록을 알고 있는가?”

“들어 보았습니다. 금의위에서도 촉망받는 인재로 많은 사람의 신임을 받는 자라 하더군요.”

“네가 엄세록을 죽여줘야겠다.”

“예?”

하주경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폐하를 모시는 금의위를 죽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하주경은 크게 당황했다.

엽선은 열비의 청을 들어줄 생각이었으나 그로 인해 동창과 금의위 간의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 이참에 하주경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점검해보자꾸나. 어차피 열비가 바라는 것은 엄세록의 죽음이다. 그가 동창과 금의위 두 세력의 권력 싸움의 희생양으로 죽던지. 의문의 고수에게 죽임을 당하던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엽선은 당황한 하주경에게 명령했다.

“엄세록이 금의위에서는 실력자이나 아직 일류 수준의 무사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영약의 복용으로 절정의 내공을 얻었고 규화보전도 일성의 성취를 이루어냈다. 그러니 엄세록은 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무림맹 비무 대회의 연습이라 생각하고 임해라.”

하주경은 하늘 같은 병필 태감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엽태감 나리.”

***

지금은 술시(戌時, 저녁 일곱 시).

경정은 청초각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소이자가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님. 방금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밤은 폐하께서 오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는가?”

“서하공주께서 입궁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종수궁에서 황후 마마님과 함께 계십니다.”

고정엽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경정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옳지. 스승님께 가야겠다.’

경정은 자신은 고정엽 때문에 나갈 수 없으니 소풍영을 동창에 보내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경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작은 소이자야. 당장 내 환관복을 가져와라.”

이제는 당당히 내 환관복이라 말하는 경정이었다.

그리고 소이자도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마마님의 환관복을 대령하겠습니다. 이미 소인이 잘 다려놓았습니다. 하하하.”

***

소풍영은 동창 근처의 나무 위에 올라 그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변함없는 동창의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여전하구나. 전각의 주위에 배치된 인력도 똑같고 시위들의 교대 시간도 똑같다.”

소풍영은 그가 병필태감이었을 때 만든 규칙을 아직도 훌륭히 따르고 있는 동창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쳇. 규칙만 잘 지키면 뭐할 것인가? 놈들이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고 폐하를 모시는 데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구나. 재물에만 관심을 두니 실력이 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소풍영은 자신을 죽이려고 들던 동창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었다.

지금은 황궁 안에 살기 때문에 조용히 있는 것이지 출궁하기 전에 동창을 한번 손봐줘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경정이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구나. 어찌하여 동창이 열비의 말을 듣는다는 말인가? 후궁들의 싸움에 낄 동창놈들이 아닌데?’

소풍영은 의아해하며 계속 전각을 지켜봤다.

그때 전각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체격의 그는 다름 아닌 하주경이었다.

“저놈은······?”

소풍영은 나무 아래로 내려와 그의 뒤를 밟았다.

하주경은 엽선의 명을 수행하러 출궁하는 길이었다.

소풍영이 하주경의 뒤를 쫓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경정의 전음이 들렸다.

[스승님. 접니다.]

이미 경정의 기를 느끼고 있던 소풍영은 놀라지 않고 답했다.

[경정아. 네가 왜 왔어? 폐하는 어찌하고?]

[폐하는 오늘 오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승님. 지금 쫓고 계신 저자는 누구입니까?]

[동창이다. 수상해 보여서 쫓고 있다.]

그때 경정의 눈에 하주경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 보였다.

한밤중이고 거리까지 멀었지만 안력을 높이는 수련을 열심히 한 경정은 종이에 뭐가 쓰여있는지 볼 수 있었다.

종이에는 객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 객잔은 나도 아는 곳이다. 엄세록 스승님과 무관 동기들이 모여 회포를 푸는 장소잖아. 매년 이맘때쯤 모이셨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가······?’

날짜를 따져본 경정의 눈이 커졌다.

‘뭐야? 오늘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