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251)

진짜 오대악적의 제자가 되다.

“백의선자와 검선께서 연인 관계셨다고요? 하지만 백의선자는 홍귀(紅鬼)잖아요. 오대악적 홍귀.”

경정이 놀란 얼굴로 묻자 소풍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백의선자는 악인이 아니다.”

“그럼, 문파 하나를 하룻밤 새 도륙한 것은 왜 그런 것입니까? 그 일로 백의선자께서 홍귀로 불리게 되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검선 형님께서 백의선자는 잘못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백의선자에게 추살령을 내린 무림맹의 까칠한 노인네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검선 형님의 말씀은 믿지.”

굳은 표정의 소풍영을 본 경정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네가 어찌 검선 형님의 비급을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익혔으니 너는 검선 형님과 백의선자의 제자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스승님께 누가 되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그런데 사실은······.”

경정은 말꼬리를 흐리며 소풍영을 바라봤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이냐?”

“제자가 얼굴을 가리고 강호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언제?”

“얼마 전의 일입니다.”

“그럼, 후궁의 몸으로 출궁하여 강호를 싸돌아다녔다는 말이냐?”

“어찌하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옵고. 제자가 당시 무명검이라는 이름으로 강호의 악인들을 처단한 적이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무림맹이 저를 악인과 한통속이라고 오해하더군요.”

“그것 보아라. 무림맹 놈들은 하나같이 앞뒤가 꽉 막혀서 정파의 인물이 아니면 멸시하고 악당으로 몰아간다.”

“꼭 스승님이 당해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흥. 나는 무림 십대 고수에 이름을 올린 실력자인데 누가 나를 무시하겠느냐? 그건 그렇고 무림맹 것들이 너를 오해해서 어찌 되었다는 것이냐?”

“제가 분한 무명검이 여인이다 보니 그들이 저를 오대악적 홍귀의 제자라 생각하더군요.”

“어찌하여 오대악적과 얽힌 것이야? 백의선자는 그들과 관련이 없지만 오대악적 놈들은 정말로 못된 놈들이다.”

“오대악적 중에 흑천야제가 있었지요? 야제의 제자가 오대악적이 남긴 보물이 그려진 장보도(藏寶圖, 숨겨진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그림, 혹은 지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찌하다보니 그를 잡게 되었고 그자가 가지고 있던 장보도를 얻게 되었지요. 비록 반쪽짜리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뭐라! 오대악적이 남긴 보물이라고!”

소풍영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때였다.

선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보화전 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빈 마마. 기침하셨는지요?”

경정은 재빨리 얌전한 목소리로 바꿔서 답했다.

“예. 법사님. 일어났습니다.”

“준비되시면 말씀하십시오. 마마님께서 정화 기도를 올리는 것을 도와드리겠나이다.”

“감사합니다. 법사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천천히 준비하시지요.”

경정이 소풍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스승님. 이만 청초각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정화 기도가 끝나고 이따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정말로 네가 오대악적이 남긴 장보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저를 오대악적의 제자라며 무림맹이 잡으려고 드는 것이겠지요.]

[아까 분명 반쪽짜리 장보도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반쪽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그것은 무림맹이 가져갔습니다.]

[허··· 무림맹이라. 그걸 다시 가져오려면 놈들을 또 봐야겠구나. 환관이라고 무시하는 잡것들을 말이다.]

[스승님. 어서 돌아가시라니까요. 저는 이제부터 정화 기도를 시작합니다.]

경정은 울분을 삼키는 소풍영을 달래서 간신히 돌려 보냈다.

소풍영이 뒷문으로 사라지자 경정은 그제야 일어서서 절을 올릴 준비를 했다.

“법사님. 준비되었습니다.”

“예. 마마님. 시작하시지요.”

***

이곳은 건청궁.

고정엽은 오늘도 어두운 얼굴로 침상에서 일어났다.

“폐하. 어젯밤에도 잘못 주무셨나 봅니다. 얼굴이 까칠해지셨습니다.”

“백빈은 간밤에 무탈하게 지냈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지내셨습니다.”

침상에서 일어난 고정엽은 차로 입을 헹구고 소공공을 가까이 불렀다.

“선방을 감시하는 인력은 내 사람으로 모두 바꿔놓았겠지?”

“그럼요. 말씀하시자마자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백빈 마마께서 갇혀계신 선방의 뒷문으로 사람이 계속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쉽게 드나들도록 교대 시간을 조정하라 명했습니다.”

“잘하였다. 그나저나 지난번에는 소이자가 백빈 대신 백팔배를 올리던데. 지금도 여전히 소이자가 백빈 대신에 정화 기도를 올리는 것이냐?”

“그것은 소인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선방이 굳게 닫혀 있어 그것을 알아내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백빈 마마께서 아실까 봐 그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다. 백빈이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백빈이 어찌 그 모진 기도를 올릴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소이자를 대신하게 시키니 마음이 놓인다.”

“백빈 마마께서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청초각에 연금되어 있다가 풀려나더라도 횡액을 몰고 오는 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보화전에 가서 정화 기도를 올린다고 자청하시니 태사령도 뭐라 딴지를 걸지 못하지 않습니까?”

“맞다. 백빈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지. 그러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보화전의 선방을 택한 것이다. 그나저나 소이자는 내가 선방에 몰래 들린 일을 백빈에게 고하지는 않았겠지?”

“소인이 소이자를 만나 슬쩍 떠보았는데 소이자는 그날 기진맥진한 상태로 절을 올리느라 폐하가 아닌 염라대왕을 봤다고 생각하더군요.”

“소이자. 이놈이 감히 나를 염라대왕이라고 여기다니. 괘씸한지고. 허허.”

고정엽은 괘씸하다고 말하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함께 웃던 소공공은 청초각에 새로 들어온 늙은 환관에 대해서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동창에서 만든 가짜 신분의 환관이던데. 아무래도 폐하께서 백빈 마마님을 지키려고 붙여 놓으신 고수 같다. 나는 계속 모른 척해야겠구나.’

소공공은 그 늙은 환관의 뒤를 봐주라 이미 내무부(內務府)에도 말해 놓은 참이었다.

***

경정이 보화전 선방에서 정화 기도를 올린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경정은 그동안 선방에 갇혀 정화 기도를 올리며 소풍영과 함께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연구를 했다.

그들은 지금 동창 서고에서 몰래 빼 온 규화보전을 보며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소풍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입니까?”

“음기가 강한 여인이기에 규화보전을 잘못 익히면 기의 흐름이 완전히 뒤틀리게 된다.”

“하지만 규화보전을 다 익히면 양기가 몸에서 빠져나가고 음기로 채워진다면서요? 저는 지금도 음기로 가득 찬 상태니, 초반을 건너뛰고 중반부터 익히면 안 됩니까?”

소풍영이 비급을 둘둘 말아 그것으로 경정의 머리를 때렸다.

“예끼. 이놈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헹. 스승님은 저만 미워하십니다.”

소풍영은 둘둘 말은 책을 다시 쫙 펼치고는 말했다.

“이것은 다시 동창 서고에 돌려놔야겠구나.”

그런데 소풍영이 책을 펼치더니 중간중간 종이를 찢어내는 것이 아닌가?

“무얼 하시는 것입니까?”

“규화보전의 중요 부분을 없애는 것이다. 너는 다 외웠지?”

“외우라고 하셔서 외웠지요. 그런데 왜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동창 놈들이 괘씸해서 그런다. 내가 황제의 명으로 뇌옥에 수감될 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오히려 내 자리를 탐내느라 다 같이 나를 잡으려고 몰려들더구나. 그래놓고 나 이후로는 규화보전을 제대로 익힌 동창이 없다니 우스운 노릇이지. 제깟 것들이 나만 사라지면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을 것이라 여기다니.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래서 다른 이들이 익히지 못하게 비급의 중요 부분을 없애시는 것입니까?”

“맞다. 완전하지 않은 비급을 익히면 반드시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다.”

소풍영은 엉망이 된 된 규화보전을 가슴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방을 지키는 시위의 교대 시간이 다가온다. 놈들이 요즘 들어 게으름을 피우느라 자리를 길게 비운다.”

“제가 도망칠 것이라 생각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누가 너를 절정 초입에 다다른 고수라 생각하겠느냐?”

“절정 초입이라고요?”

경정이 놀란 눈으로 소풍영을 바라봤다.

“규화보전은 익히지 못했지만, 네놈이 한 달 동안 잘 따라와 줘서 조만간 경지를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정은 기뻐하며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스승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인사는 됐으니 훈련이나 계속하거라.”

소풍영이 선방의 뒷문으로 몰래 나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킁. 킁.’

코를 킁킁거리던 소풍영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경정은 이미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있었다.

“스승님. 놈들이 시작했나 봅니다. 최면향입니다. 어서 가십시오.”

“내가 없어도 괜찮겠느냐?”

“스승님. 접니다. 절정 초입에 다다른 무공 천재.”

경정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자 소풍영도 따라 웃었다.

“그래. 누구보다 잘난 내 제자가 이 정도 최면향에 당하지는 않겠지. 안심하고 나는 가마.”

“예. 스승님.”

소풍영이 나가고 경정은 선방에 숨겨둔 약을 꺼냈다.

녹가에서 편히 지내고 있는 당소소에게 연통을 보내 받아온 약이었다.

약을 입에 털어놓고 운기조식하자 이내 경정의 얼굴이 편해졌다.

‘됐다. 이제 준비해볼까?’

경정은 앉은 자세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자 굳게 닫혀 있던 선방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법사로 위장한 태사령 장요였다.

장요는 최면향을 막기 위해 면사로 코를 가리고 있었다.

“기도를 올리다 잠이 들었군.”

장요는 다가와 잠이 든 경정의 어깨를 잡았다.

경정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눈을 감고 최면향에 취해 잠을 자는 척 연기를 했다.

경정을 방 구석에 옮겨 놓은 장요는 선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문처럼 흠이 없는 여인이로고.”

장요는 백빈이 선방에 갇혀 하루 한 움큼의 쌀알만 먹으며 기도를 올릴 거라 생각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여온 음식을 선방 안에 숨겨 놨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선방에는 기도를 위한 물품만 있을 뿐 바깥에서 들여온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선녀같은 여인이 괜히 화씨와 얽혀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겠구나. 하지만 그것도 너의 운명이겠거니 하고 살아야겠지.”

장요는 비웃음을 흘리며 가져온 물건을 선방 안에 숨겼다.

경정은 장요가 어디에 물건을 숨기는지 빠짐없이 지켜봤다.

모든 일을 마친 장요가 뒤돌아서는데 갑자기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요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백빈을 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는 백빈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까?”

장요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경정에게 다가왔다.

경정은 그런 장요의 움직임을 느끼고 어이가 없었다.

‘스승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다. 이 자리에서 저놈을 쳐죽이고 싶구나.’

장요는 경정의 앞에 앉아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치웠다.

그러자 도자기처럼 새하얀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아. 역시 아름답구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 불릴 만해.”

장요는 백빈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이 처음이라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말았다.

장요의 얼굴이 점점 경정에게 가까이에 다가왔다.

‘이놈이 정말 미친 건가?’

경정은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헛. 벌써 깬 건가?”

놀란 장요가 벌떡 일어섰다.

경정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저녁에 먹으려고 들고 있던 쌀알을 바닥에 날렸다.

뒷걸음질 치던 장요가 쌀알을 밟고 미끄러졌다.

몸이 뒤로 넘어지는 장요에게 경정은 내공으로 작은 탄환을 만들어 그의 허벅지에 날렸다.

‘으악!’

장요는 허벅지를 붙잡고 선방 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이고. 나 죽겠네.”

장요의 비명을 듣고 밖이 어수선해지자 그는 다친 허벅지를 끌고 선방에서 기어서 간신히 도망쳤다.

경정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친 장요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쳇. 추잡한 놈 같으니라고. 한꺼번에 일망타진하려고 너를 놓아준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너는 오늘 내 손에 죽은 목숨이다. 며칠을 더 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라.”

경정은 방금 장요가 놓고 간 물건을 찾아 꺼냈다.

황후의 이름이 적힌 저주 주문과 바늘이 꽂힌 인형이었다.

경정은 물건을 챙기며 웃었다.

“고맙구나. 이것들을 내가 잘 쓰겠다. 다가올 선농제가 참으로 기다려 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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