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51)

가짜 어사, 백려가 등장하다.

경조윤부로 끌려간 경정이 대청 앞에 섰다.

갑자기 죄인을 끌고 나타난 형 때문에 경조윤 허청은 심기가 불편했다.

“형님. 어찌 함께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경조윤부를 이렇게 제집 드나들듯 오시면 사람들이 어찌 보겠습니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 데리고 온 여인에게 반드시 국법의 지엄함을 알려야 한다.”

“설마 끌고 온 자가 형님이 손에 넣으시려는 자수점의 주인입니까?”

“그렇다.”

허영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망신을 준 경정이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못된 것이 상인들 앞에서 나를 망신 주지 않더냐. 분을 참지 못해 끌고 왔다. 나를 거역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상인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대체 무슨 죄로 처벌하라는 것입니까?”

“탈세한 증좌가 있지 않으냐? 자료를 들이밀고 고문을 가하거라. 못된 것의 기를 확 꺾어 놓으란 말이다.”

허청은 막무가내로 나오는 형님이 짜증이 났다.

하지만 허영이 벌어다 주는 뇌물의 양이 상당했기에 허청은 형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대청에 들어서자 허영이 말했던 자수점의 주인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허청은 여인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피부가 백옥같이 새하얗고 우수에 찬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기에 얼핏 봐도 미인이었다.

‘저렇게 단아한 여인이 형님을 열받게 했다고?’

허청은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봤다.

경정은 허청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네놈이 바로 곧 목이 떨어질 경조윤 허청이로구나.’

허청은 상석에 앉아 경정을 바라봤다.

경정은 죄인의 몸으로 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아전(衙前)과 경조윤부의 병사들도 함부로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허청이 아전에게 명을 내렸다.

“어찌 죄인을 이렇게 서 있게 하는가. 당장 꿇어 앉혀라.”

“예. 나리.”

병사들이 다가오자 경정은 허청을 보며 대청이 떠나갈 정도로 꾸짖었다.

“경조윤이나 되는 사람이 어찌하여 사사로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오.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경정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허청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

“허씨 형제의 악행이 하늘을 찌르고 있소. 상단의 일은 하나도 모르는 무식한 자가 청허 상단을 물려받은 지 일 년 만에 도성의 상계를 흙탕물로 만들어놨으니 이를 어찌할 것이오?”

허영과 허청은 경정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경정이 내공을 섞어 말한 것이라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허청은 잠깐이었으나 여인이 참으로 아름답고 단아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탓했다.

저 여인이야말로 당장 치워버려야 할 극악무도한 죄인이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여봐라. 형틀을 대령해라.”

허청이 명을 내리자 관병들이 커다란 형틀과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소곤(小棍, 버드나무로 만든 길이가 짧은 곤장)을 들고 등장했다.

저자에서 이곳까지 따라온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분노했다.

“경조윤이 참으로 독하군. 저런 흉악한 것으로 여인을 때린다는 것인가?”

“왜긴? 여인이 청허 상단과 계약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니 상단주가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

“허씨 형제가 도성 상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군. 대체 윗분들은 뭐 하고 계신 것이야? 저런 몹쓸 것들을 잡아가야지.”

“그나저나 큰일이네. 가녀린 여인이 어찌 저 흉악한 형벌을 받을꼬.”

백성들이 경정을 걱정하는데 허영은 크기가 작은 곤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영이 허청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이보게. 동생. 소곤은 너무 관대한 것 같네. 더 큰 것으로 때려야지.”

“형님은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시오. 저 짧은 것을 한 대만 맞아도 여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합니다. 중곤(中棍, 중간 길이의 곤장)이나 대곤(大棍, 가장 큰 곤장)을 맞으면 살아남지 못하고요.”

“흥. 알겠네. 알아서 하게.”

경정은 죄를 묻지도 않고 고문부터 하려는 허청의 작태에 어이가 없었다.

관병들이 다가오자 경정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순순히 곤장을 맞을 생각이 없었다.

‘아직 엄도통과 풍죽오우가 오지 않았으니 놈들과 조금은 놀아줘도 되겠지?’

경정은 관병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스리슬쩍 몸을 틀었다.

멀리서 보면 살짝 몸을 튼 것처럼 보이지만 눈앞에서 당하는 병사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눈앞의 죄인이 사라지자 병사들의 손이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그들은 갑자기 사라진 죄인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시나?”

“어?”

관병들이 놀라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경정은 거구의 병사가 들고 있던 소곤을 빼앗았다.

“설마 이 무시무시한 것으로 나를 핍박하려는 것인가?”

경정은 실소하며 소곤에 힘을 줬다.

그러자 버드나무로 만든 두꺼운 나무가 턱!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졌다.

병사는 물론 지켜보는 백성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경정은 두 동강 난 소곤을 바닥에 내던지고 큰소리로 외쳤다.

“경조윤께서는 경조윤부의 살림은 신경 쓰지 않고 뇌물만 받아 처먹느라 곤장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 같소이다. 그냥 만지기만 해도 부서지는구려.”

경정의 말에 지켜보던 백성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속이 시원하구나.”

“맞는 말을 했지. 경조윤이 돼서 도성과 백성의 치안보다 청허 상단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는가?”

“저 여인은 대체 누군가? 참으로 대범하네.”

“청풍명월이란 자수점의 진짜 주인이라 하네. 나도 오늘 처음 보았어.”

백성들은 경정이 맞는 말을 했다며 손뼉까지 쳤다.

허청은 대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런 못된 것 같으니라고. 여봐라. 어서 대곤(大棍, 큰 곤장)을 가져와라.”

경정은 지금쯤이면 엄세록과 풍죽오우가 등장할 거라 예상하고 거침없이 굴었다.

“대체 어느 나라 법이 죄를 묻지도 않고 치도곤부터 시작하는 것이오?”

“죄인이 미쳐 날뛰는구나!”

“저자에 나가 물어보시오. 청허 상단의 상단주가 말도 안 되는 상계의 법도를 운운하며 상인들에게 폭리를 취하려고 하였소.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 따진 것인데 어찌 나를 죄인 취급을 하는 것이오?”

경정이 또박또박 따지고 들자 허청은 분노하여 손까지 벌벌 떨었다.

마침 병사들이 커다란 대곤을 가지고 나타났다.

경정은 무지막지하게 생긴 대곤을 보고 실소했다.

대곤이 어찌나 큰지 평범한 사람이 한 대 맞으면 훅 갈 것 같았다.

그때 경정의 양옆으로 험악하게 생긴 병사들이 칼(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을 가지고 등장했다.

“이보시게. 보다시피 나는 가녀린 여인이네. 그런 것을 내 목에 씌우고 대곤으로 치려는 것인가? 대체 염치가 있는가? 나보고 죽으라는 것이야?”

병사들도 허청의 명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담을 넘어 구경하던 백성들도 화가 나는지 한마디씩 던졌다.

“경조윤의 작태가 도를 넘어섰소.”

“이것은 도성의 백성들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 아니오?”

“죄 없는 여인을 저리 대하다니.”

허청은 주저하는 병사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뭐 하는 것이야? 어서 죄인에게 칼을 씌우고 대곤을 쳐라!”

병사들은 허청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경정에게 다가왔다.

그들이 경정의 팔을 붙잡아 형틀에 묶으려는 순간, 대청 안에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손 놓지 못할까!”

경정은 내공이 실린 근엄한 목소리를 듣고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드디어 왔구나.’

경정은 병사의 팔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렸다.

당상관(堂上官) 이상만 입을 수 있는 관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손님을 모셔 온 아전이 몸을 벌벌 떨며 허청에게 고했다.

“도찰원의 백어사께서 오셨습니다.”

“백어사라니······?”

순간 허청의 눈이 커졌다.

“백어사라면 설마 어사 백려?!”

허청은 대경실색하여 의자에서 일어나 관복을 입은 사내 앞으로 달려갔다.

경정은 백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드디어 왔구나. 스승님이 백어사로 분하고 오셨어.’

도찰원 어사 백려는 황제 고정엽이 직접 임명한 암행어사다.

그가 나타났다 하면 비리를 저지른 관원들이 관복을 벗는 일이 허다했기에 관원들은 꿈에서도 백려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경정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백려는 차면선(遮面扇, 얇은 직사각형 옷감 양쪽에 손잡이를 달아 만든 얼굴 가리개)을 펼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백어사의 복장은 나도 처음 보는 거다. 우리 스승님. 너무 멋지다. 도성에서 제일 멋져.’

웃으며 고개를 돌리려던 경정은 순간 멈칫했다.

‘어?’

경정은 다시 고개를 획 돌렸다.

어사 백려의 뒤로 그를 호위하는 사내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풍죽오우였다.

풍죽오우가 엄세록과 함께 있었으니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제갈원의 옆에 서 있는 사내였다.

‘스승님이 왜 거기 서 계시는 것입니까? 그럼, 이 자는 대체 누군데요?’

경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어사 백려를 쳐다봤다.

차면선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얇은 천 위로 보이는 깊은 눈을 본 경정은 대경실색했다.

‘폐하께서 왜 거기 계신 것입니까?’

경정이 놀란 그때, 고정엽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몸을 떨었다.

당청 안에 어질러진 부서진 나무 조각과 무시무시한 형틀 그리고 병사가 들고 서 있는 칼과 대곤까지.

모든 것이 경조윤 허청이 경정을 어찌 대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감히 내 홍아를 이리 대해? 경조윤 허청. 네가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는가?’

고정엽은 당장이라도 허청의 목을 비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허청은 갑작스러운 백려의 등장에 놀랐지만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그의 앞에 달려 나갔다.

“백어사께서 이곳에는 어인 일이 십니까? 지금 죄인을 심문하느라 당청이 어수선하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허청은 아전에게 눈짓을 보내 이곳을 정리하라 명했다.

“어서 드시지요. 백어사.”

고정엽은 그의 팔을 붙잡는 허청의 손을 뿌리쳤다.

고정엽은 분노를 꾹 참으며 엄세록에게 고갯짓했다.

엄세록은 재빨리 앞으로 다가와 경정을 챙겼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엄세록은 경조윤부에서 일하는 관원에게 의자를 대령하라 명했고 그는 허청의 눈치를 살피며 의자를 가져왔다.

“편히 앉으십시오.”

백려의 수하가 죄인에게 깍듯하게 대하자 허청은 어이가 없었다.

경정은 엄세록이 가져온 의자에 허물어지듯 앉았다.

어느새 나타난 소이자가 그런 경정을 붙잡고 속삭였다.

[마마님. 괜찮으십니까?]

[소이자. 저분이 설마 내가 아는 그분이 맞느냐?]

[맞습니다. 마마님.]

[폐하께서 대체 왜 저기에 계신 것이냐?]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소인이 객잔에 가보니 암행 나오신 폐하께서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허. 하필이면 이때 암행이라니.]

경정은 그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때 고정엽이 가까이 다가와 경정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가?”

경정은 즉시 얼굴을 바꾸고 놀란 연기를 시작했다.

“어사 나리. 저는 죄인이 아닙니다.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안다. 내 어찌 모르겠느냐. 혹시 경조윤이 그대에게 고문을 가하였는가?”

“아닙니다. 아직은 고문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저 칼을 차고 형틀에 묶인 뒤에 커다란 대곤을 맞을 참이었지요.”

경정이 또박또박 말하며 칼과 형틀 그리고 대곤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고정엽의 손에 든 차면선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청은 자신에게는 당당하게 막말을 늘어놓던 여인이 갑자기 세상 가련한 여인이 되어 울먹이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백어사. 이쪽으로 오시지요. 죄인의 실성하여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입니다.”

허청이 나서서 설명하려는 순간 고정엽이 고개를 돌렸다.

‘허.’

허청은 순간 몸이 굳었다.

눈앞의 사내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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