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요? 내가 보물 찾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이세요?
“스승님. 제가 결계를 깨트릴 요령을 찾아오겠습니다.”
“너는 내명부에 갇힌 후궁이다. 어찌 녹림왕을 찾아간단 말이냐?”
소풍영은 안될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경정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풍영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스승님. 얼마 전에 녹림 이인자가 녹림왕의 보물을 털어 도주했습니다.”
“선사께서 쓰시던 요령(搖鈴)이 녹림왕에게 없단 말이냐? 대체 누가 훔쳐 갔어?”
“놈은 이미 무림맹에 사로잡혔지요.”
“그렇다면 무림맹이 녹림왕의 보물을 거둬 갔을 것이 아니냐? 녹림이나 무림맹이나 거기서 거기다. 너는 못 가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보물은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요.”
“뭐라? 그것이 정말이냐?”
소풍영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미소짓던 소풍영의 얼굴이 굳었다.
“여전히 황궁 밖의 일이다. 너는 내명부 후궁인데 보물이 있는 곳을 안다 해도 소용이 없지 않느냐?”
소풍영의 말에 경정이 해맑게 웃었다.
“아닙니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저만 믿어주십시오.”
***
희태후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방금 뭐라 하였느냐? 백빈?”
“희태후 마마님께서 조만간 황릉으로 돌아가실 거라 들었습니다. 그때 저도 데리고 나가주실 수 있는지요? 황릉의 태현궁에 가서 태후 마마님을 모시겠습니다.”
희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백빈. 몸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본궁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냐?”
“제가 아파 연희궁을 자주 비워 희태후 마마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황릉에 가서라도 태후 마마님을 모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백빈이 본궁을 생각하는 것은 가상하지만 어찌 먼 황릉까지 가겠는가? 안될 일이지.”
희태후는 말은 그렇게 했으나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상궁은 기뻐하는 희태후와 기꺼이 황릉에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백빈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백빈 마마께서 태후 마마님의 마음을 눈치채셨구나. 태후께서 제발 윤허해 주셨으면 좋겠어.’
희태후는 잠시만이라도 경정을 데리고 황릉에 가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지내는 것은 유배나 다름이 없었으니 차마 그러자고 하지 못했다.
경정은 주저하는 희태후를 보며 생각했다.
‘평소의 희태후 마마님이라면 당장 나를 데려가겠다 하셨을 텐데. 이번 일에 양왕이 엮여 있어 눈치를 보시는 것이로구나. 암튼, 양왕은 진짜 도움이 안 돼요.’
경정이 울망울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후 마마. 제가 거짓을 고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경정이 울면서 무릎을 꿇자 희태후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백빈. 왜 그러느냐? 바닥이 차다. 일어서거라.”
“태후 마마. 실은 저를 위해 청을 드린 것입니다. 마마님을 보필하기 위해 따라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니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겨우 그 정도 일을 가지고 무릎까지 꿇었는가? 어서 일어서라.”
희태후는 경정을 직접 일으켜 세웠다.
“백빈은 어찌하여 황릉에 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편히 말해 보아라. 백빈의 청이라면 모두 들어줄 것이야.”
경정은 다소곳한 표정을 지으며 이유를 말했다.
“자객이 자꾸만 꿈에 나옵니다. 황궁이 두려워졌어요. 듣자 하니 황릉 근처에 악악산이 있다지요? 그곳은 절경인데다 온천도 있다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태후 마마님과 함께 쉬고 싶습니다.”
경정이 본심을 이야기하자 희태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맞아. 악악산이 태현궁의 지척에 있지. 온천이 유명한 것도 사실이야.”
‘뿐만 아니라 악악산에는 녹림왕의 보물도 숨겨져 있지요.’
경정은 좋아하는 희태후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반드시 태후 마마님을 따라서 황릉에 갈 테다. 가서 결계를 깨부술 요령을 찾아오자.’
***
함복궁(咸福宮)에 사는 열비는 오늘도 궁 밖에 나가지 않고 책만 보고 있었다.
그때 열비의 시녀인 순아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순아는 처소를 지키는 궁인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열비의 앞에 섰다.
“마마님. 차를 드시지요.”
“순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로구나. 어서 말해 보아라.”
순아가 열비의 가까이에 서서 고했다.
“희태후께서 황릉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다.”
“연회가 끝났으니 돌아가실 때가 되었지. 겨우 이런 일로 말을 꺼낸 것은 아닐 것이고. 내가 들어야 할 것이 또 뭐가 있지?”
“희태후께서 혼자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알고 있다. 양왕 전하도 함께 가시는 것이겠지.”
“희태후께서 양왕 전하와 함께 황릉에 돌아가실 것은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지요. 하지만 뜻밖의 인물이 따라간다고 합니다.”
“뜻밖의 인물?”
열비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백빈인 것이냐?”
“영명하십니다. 마마님. 맞습니다. 백빈이 따라간다고 하더이다.”
“황궁에 자객이 든 일로 백빈의 위상이 하늘을 찌른다. 빈이 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비의 품계까지 거론될 정도인데 어찌하여 황릉에 따라가는 것이지? 그곳은 유배지나 다름이 없는데 말이야.”
“자객이 희태후 마마님께 칼을 겨누었으니 태후 마마님이 크게 놀라셨지요. 백빈이 그런 희태후 마마님이 걱정되어 황릉에 따라가겠다고 자청했다고 합니다.”
“허. 백빈의 명성이 하늘 끝에 닿았는데도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열비는 백빈이 이해되지 않았다.
“백빈이 원하는 것이 대체 뭘까? 정말로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백빈은 선녀일까? 순아.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소인이 어찌 함부로 말을 보태겠나이까?”
“너는 이미 백빈을 조사해보지 않았느냐? 기탄없이 말해 보아라.”
“그리 말씀하시니 소인의 짧은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인이 생각하기에 백빈 마마님은 진심이신 것 같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지?”
“윗전의 마음에 들려고 본모습을 숨기는 후궁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자신이 부리는 노비에게까지 다정한 사람은 없지요. 하지만 백빈은 부리는 노비에게도 다정하게 구시니 필시 선한 분일 테지요.”
“그렇구나. 너는 그리 생각하는구나.”
열비는 순아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순아는 열비가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께서는 뭐라 하시더냐? 윤허하셨는가?”
“희태후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느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윤허하시고 엄세록 도통을 호위로 딸려 보내라 명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또 엄세록이구나.”
차분하던 열비의 눈빛이 순간 섬뜩하게 변했다.
“마마님.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엄도통을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열비는 분을 삭이며 이미 식어버린 차를 들이켰다.
“순아. 황릉 행차에 사람을 심을 수 있겠는가?”
“힘써 보겠나이다. 마마.”
“그래. 너는 이만 나가보아라. 나 혼자 생각할 것이 있다.”
“예. 마마님.”
순아가 나가고 처소에는 열비 홀로 남았다.
열비는 다시 섬뜩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원수와 어찌 같은 하늘 아래 살겠는가? 폐하께서 엄세록을 총애하시니 조만간 끝을 봐야겠구나.”
***
오랜만에 황궁의 정문이 열렸다.
궁에 자객이 들어온 이후로 정문이 열린 것은 한 달 만에 처음이었다.
희태후의 행렬을 보러 온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였다.
“황릉에 백빈 마마께서도 따라가신다지?”
“맞네. 그러니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것일 테지. 모두 선녀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모였네.”
“나도 소식을 듣고 어젯밤부터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네. 여기가 명당이거든.”
백성들은 도성을 휩쓸고 있는 이야기 ‘내 아들의 후궁’에 열광했다.
경정이 하오문을 통해 낸 소문은 인기를 끌어 그림자극으로 탄생했고 그 이야기를 엮은 책까지 나왔다.
경정은 도성에서 황제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된 셈이었다.
희태후의 행렬이 보이자 백성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백빈 마마!”
“마마님! 사랑합니다.”
“얼굴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백빈 마마!”
희태후와 함께 마차에 앉아 있는 경정은 사람들의 환호성에 얼굴을 붉혔다.
“희태후 마마. 송구하옵니다. 저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하. 괘념치 말게. 백빈의 덕이 깊은 것을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다지?”
경정은 하오문이 낸 소문이 이토록 파급력이 클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책을 써서 판매하는 건데. 아쉽도다. 떼돈을 벌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
경정이 아쉬워하는데 마차 옆으로 엄세록이 다가와 말했다.
“백빈 마마. 엄세록입니다. 창을 열어 주십시오.”
엄세록은 열린 마차 창으로 곱게 접은 서신을 집어넣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윤영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저자에서 크게 자수점을 하는 여인이지요. 저와도 친분이 깊습니다.”
“윤영이라는 분이 주시고 가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살펴보지요.”
경정은 윤영이 무슨 말을 보냈을지 궁금해하며 서신을 열었다.
[백빈 마마. 소인 윤영입니다. 마마께서 큰일을 당하셨는데 소인은 이미 출궁하여 마마님을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부디 황릉에 가서 편히 요양하고 오시길 바랍니다.]
윤영은 경정의 안부를 묻고는 자수점 청풍명월에 대해 자세히 써 놓았다.
자수점이 어찌 운영되는지 궁금했던 경정은 서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서신의 마지막 장을 넘기자 놀라운 말이 적혀 있었다.
[도성에 마마님과 희태후 마마님의 이야기가 인기입니다. 소인이 보기에 황궁의 실제 사정과 조금 다른 것이 있기에 이야기를 고쳐 책으로 편찬하였습니다. 그 책이 인기를 끌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다음번에 소이자를 보내시면 책으로 얻은 이익을 마마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서신을 읽은 경정의 눈이 커졌다.
‘뭐라? 그럼, 그 책이 윤영이 낸 것이었어?’
경정은 서신의 마지막에 적힌 책 판매 수익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금 이백 냥이라고?’
경정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자 희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빈. 왜 그리 놀라는가?”
“아닙니다. 태후 마마.”
“사가에서 알고 지낸 친우가 보낸 서찰인가?”
“그렇습니다. 태후 마마.”
“자네가 크게 다쳤는지 알고 친우가 놀랐나 보군. 황릉에서 한 달만 지내고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돌아가는 길에 친우를 만나보게. 폐하께서도 그 정도는 윤허해 주실 것이네.”
“그리하겠습니다. 태후 마마.”
경정은 윤영이 보낸 서신을 소매 안에 넣으며 생각했다.
‘황금 이백 냥이라니. 몸이 약한 소이자가 그걸 어찌 들고 오겠는가? 도성에 올 때 내가 직접 가서 들고 와야지. 하하하.’
***
두팔은 성산에 자리를 잡은 지 이제 한 달째 되는 비적이었다.
이곳 성산은 황릉이 있는 산이라 관병이 지키고 있어 비적이 없었다.
두팔을 이것을 노리고 성산이 아닌 산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노렸다.
“크하하. 이곳에 이리 큰 행렬이 지나가는 것은 처음 보는구나.”
두팔은 짐이 가득 실린 수레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수레 뒤에 따라오는 마차는 장인이 만든 것인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두목님. 마차를 장식한 것을 보니 안에 여인이 타고 있는 듯합니다.”
수하의 말에 두팔이 눈을 번뜩였다.
“남자는 죄다 죽이고 여인만 살려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두팔의 명령에 비적들이 큰 소리로 복창했다.
비적들은 길이 좁아 엄세록과 관병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두팔은 알지 못했다.
황릉에 황궁의 마마님이 살고 있으며 그분이 한 달 전에 황궁으로 떠나셨다가 오늘에서야 돌아오신다는 것을 말이다.
한편, 희태후의 행렬을 몰래 뒤따르는 강호인들이 있었다.
당철한과 남궁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인데? 그렇지 않은가? 남궁후야.”
“그러게, 말이다. 뭔가 익숙하다. 한번 겪어본 일 같아.”
당철한과 남궁후의 앞에 제갈원이 등장해 백우선을 들었다.
“시끄럽고 검이나 빼 들어라. 비적 놈들이 설치게 이대로 둘 것인가?”
“그럴수는없지. 감히 우리 마마님의 행차를 막아서다니. 놈들이 목숨이 두 개인가 보군.”
당철한과 남궁후가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비적 앞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