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51)

두번째 스승님이 생기다.

인시(寅時, 새벽 3시).

순찰을 하는 시위만 깨어있는 황궁에 장포를 뒤집어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열흘 만에 냉궁에 돌아온 경정이었다.

드디어 건청궁을 나와 연희궁으로 옮겨 운신하기 편해진 경정은 야음을 틈타 이곳에 왔다.

담을 넘은 경정은 소풍영과 만났던 냉궁의 첫 번째 전각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냉궁의 여인들이 한데 모여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여인들이 혹시라도 잠에서 깰까 경정은 조용히 전각 안을 살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만졌다.

“아이고! 깜짝이야!”

경정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능글맞게 웃는 소풍영의 얼굴이 보였다.

“늦었구나. 열흘이라 했더니 진짜로 열흘 만에 왔어.”

“그동안 말도 못 하게 바빴습니다. 특히나 이 근처에는 올 생각도 못 했지요.”

“황궁 안에 자객이 들어서 그런 것이냐?”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냉궁 밖에는 못 나가신다면서요?”

“척하면 척이지. 나는 병필태감까지 지낸 사람이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느냐? 이 주위에 쫙 깔린 금의위를 보고 알았다. 아마도 자객은 불이 난 운녕각에 숨어들었겠지.”

“와.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경정은 역시 환관 역사서에 오른 인물은 눈치도 대단하다며 감탄을 금치못했다.

소풍영은 경정을 데리고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저기를 봐라. 폐하께서 계신 양심전(養心殿)도 보이고 금의위가 있는 조천궁(朝天宮)도 보이고 감란원, 동창 건물이 다 보인다. 이곳 냉궁에 있어도 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경정은 눈을 크게 뜨며 소풍영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안 보이는데요?”

“예끼. 눈을 크게 뜨고 보라고.”

경정은 눈을 크게 떴지만, 눈만 시리고 여전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잘 안 보입니다.”

“안력을 키우는 수련을 게을리해서 그런 것이다.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겠어.”

“안력을 키우는 수련도 있습니까?”

“그래. 내가 만든 수련법이 가장 뛰어나니 내 수련법을 따라 해라.”

“벌써 저를 가르치시려는 것입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어? 너를 내 제자로 키울 것이라고.”

소풍영이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하자 경정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수의 가르침. 놓치지 않을 거예요.’

경정은 즉시 일어서서 소풍영에게 절을 올렸다.

“뭐 하는 거냐?”

“소태감께서는 제 스승님이 되셨으니 마땅히 구배지례(九拜地禮)를 올려야 도리죠. 제자의 절을 받아주십시오. 스승님.”

경정이 절을 올리자 소풍영도 내심 좋은지 광대가 씰룩거렸다.

‘절도 올렸으니 낙장불입(落張不入)입니다. 스승님과 영원히 함께 할 겁니다.’

경정이 일어서자 소풍영이 그녀를 불렀다.

“그래. 제자야. 가까이 와보아라.”

경정은 냉큼 앞으로 달려가 소풍영의 앞에 앉았다.

“먼저 안력을 키우는 수련법을 알려주겠다. 매일매일 조석으로 해야 할 것이야.”

“그럼요. 스승님의 말씀은 하늘과도 같으시니, 따라야죠.”

“우선 단전의 내공을 열어 눈으로 흘려 보내라.”

경정은 소풍영이 시키는 대로 눈으로 내공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등이 타들어 가는 듯이 따가웠다.

“스승님. 지난번에 제 등에 표식을 남기셨지요? 그것 먼저 없애 주십시오. 등이 따가워서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겠습니다.”

“뭐라? 등이 아파?”

“예. 내공을 쓰면 등이 아픕니다.”

경정의 말에 소풍영의 두 눈이 커졌다.

“어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소풍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내가 사실은 네놈에게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이라고요? 무슨 거짓말인데요?”

“제자의 등에 남긴 것은 표식이 아니라 내가 가르칠 무공을 배우기 쉽도록 혈도를 넓힌 것이다. 열흘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허풍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제자에게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입니까?”

경정은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경정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암튼 아프니까 원래대로 돌려놔 주세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소풍영이 고개를 들었다.

“돌려놓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규화보전을 익히려면 혈도를 넓혀야 한다. 그것이 배움의 첫걸음이야.”

“그럼, 이대로는 규화보전을 익히지 못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상한 일이로고. 옷을 풀어헤치고 등을 내게 보여라.”

“예? 옷을요?”

“그래.”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그런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남녀가 어디에 있어?”

소풍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경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승님이 남자 그리고 제자인 제가 여자.”

“네놈이 여자라고?”

“그럼, 제가 남자겠습니까?”

경정은 말을 하면서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닌가? 내가 남자인가? 백경정 마마님께서 여자이시니 여자가 맞겠지······. 아닌가?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남자인데. 나는 대체 뭐지?’

소풍영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동창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것을 알고 있다. 네놈의 본(本)이 느껴지는데 확실히 너는 남자다. 신체가 여인처럼 변했다고 해서 여인은 아니지. 어서 등을 보여라.”

소풍영은 경정이 입고 있는 장포를 억지로 벗겨냈다.

그러자 그녀가 입고 있는 여인의 복장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것은 일반 궁인의 옷이 아니었다.

소박하지만 고급 비단이었고 황궁의 윗전을 위해 상의감에서 만든 옷이 분명했다.

경정은 오늘 소풍영의 제자가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위해 일부러 여인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소풍영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너 뭐냐?”

“누구긴 누굽니까? 스승님의 제자이지요.”

“궁인은 맞느냐? 동창 소속이라면서?”

“원래는 동창 소속이었는데요. 일이 있어서 지금은 다른 곳 소속입니다.”

“궁 안에 내가 모르는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어디 소속이냐?”

경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놀라시면 안 됩니다.”

“내 나이가 되면 세상에 놀랄 일이 없어진다. 어서 말해 보아라. 너는 대체 어디 소속이냐?”

경정은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무릎을 굽히며 단정하게 예를 올렸다.

“백빈이 스승님께 예를 올립니다.”

“뭐···? 백빈?”

“저는 내명부 후궁입니다.”

“뭐라고?”

소풍영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너무 몰라서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안 놀라신다면서요. 스승님!”

***

희태후의 앞에 양왕 고위성이 무릎 꿇고 앉아 있다.

고위성이 불쌍한 척을 하며 희태후를 불렀다.

“모후. 소자의 다리가 저려옵니다. 이만하셨으면 됐습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만, 일어설까요?”

희태후는 아양을 떨며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고위성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황자라서 때리지 않고 키웠더니 제멋대로 자랐어. 이를 어찌할꼬.’

고위성은 자객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 어젯밤에 금의위에서 풀려나 연희궁으로 돌아왔다.

연희궁에서 돌아온 뒤, 피곤하다며 잠에 빠져들었고 새벽이 된 지금에서야 일어난 것이다.

희태후는 그런 큰일이 있었음에도 잠이나 처자는 아들을 보며 분노가 치밀었다.

고위성이 슬금슬금 일어서려고 하자 희태후가 꾸짖었다.

“내게 남은 아들이 너 하나뿐임을 모르는 것이냐? 정녕 이 어미를 세상에 홀로 남겨둘 셈이야?”

희태후가 죽은 태자와 8황자를 거론하자 고위성은 고개를 숙였다.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설마하니 고정엽이 저를 죽이기야 할까요? 남아있는 황자가 저밖에 없는데 저를 벌하면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겁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시지요.”

희태후는 끝까지 망발을 늘어놓는 고위성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너는 이제 병부를 빼앗겼으니 나를 따라라.”

“모후를 따라요?”

“나와 함께 황릉으로 가자. 너는 그곳에 가서 황릉에 매일 절을 올리며 네 잘못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황릉이라니요. 그것은 유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이번 일을 관대하게 봐주신 폐하께 감사해야 한다.”

희태후의 말을 들은 고위성의 안색이 굳어졌다.

‘고정엽이 대체 뭔데. 내가 놈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희태후에게 대들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며 그러겠다고 했다.

“소자, 모후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황릉에 따라가겠습니다.”

“진시(辰時, 오전 7시)까지 이곳에 꿇어앉아 반성해라.”

“잠도 자지 않고요?”

“연희궁에 오자마자 늘어지게 잠을 청한 놈이 말이 많구나. 정상궁. 문밖에 환관을 시켜 양왕이 반성하는지 살펴보아라.”

“예. 태후 마마.”

희태후는 고위성을 방 안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정상궁은 희태후를 살폈다.

“마마님. 황릉으로 가실 때 양왕 전하도 함께 가시는 것입니까?”

“그래야지. 그나저나 백빈은 어떠한가?”

“백빈 마마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손도 다 나으셨습니다.”

“백빈에게 참으로 고마워. 내 어찌 마음씨가 백옥처럼 고운 아이를 의심했을꼬. 이 모든 것이 양왕 때문이야.”

“마마님. 그리 백빈이 좋으시면 황릉에 갈 때 데리고 가시면 어떻습니까?”

정상궁의 말에 희태후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되네.”

“하지만 태후 마마의 말씀이라면 폐하께서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양왕의 말처럼 황릉은 유배지네. 우리 백빈을 유배지에 끌고 갈 수는 없네. 백빈은 황궁에 남아 폐하의 총애를 받고 황자를 생산해야 하네.”

희태후는 아니라고 했지만 정상궁은 느꼈다.

‘마마께서 정말로 백빈 마마님을 살피시는구나. 황릉 생활이 무료하실 텐데 잠시라도 백빈 마마님과 함께 가면 좋으련만.’

정상궁은 안타까워하며 희태후의 뒤를 따랐다.

***

정신을 차린 소풍영이 경정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정말 후궁이냐?”

“예. 보시는 바와 같이요.”

“그것도 품계가 비(妃)라는 것이지?”

“어찌하다 보니 단기간에 품계가 올랐습니다.”

“품계가 그리 빠르게 올랐다는 것은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일 터.”

“폐하께서 저를 좋아하시긴 합니다.”

“그런데 어찌 네가 동창이라는 것이냐? 너는 분명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너를 동창이라 소개하지 않았더냐?”

“그것이 말입니다.”

경정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원래 동창이었는데 죽어서 여인으로 회귀했다고 하면 믿지 않으시겠지?’

경정은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뿔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일어났는데······.”

“일어났는데? 그래서?”

소풍영은 흥미진진하게 경정의 말을 경청했다.

경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그 기억이 동창이던 환관의 기억이냐?”

“그렇지요. 동료의 모함을 받아 죽은 불쌍한 환관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황궁에서 놈을 딱 마주쳤습니다.”

“환관의 원수 말이냐?”

“예. 그래서 알았지요. 아!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환관의 기억이 진짜구나 하고 말입니다.”

소풍영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지만, 경정이 동창은 물론 환관의 일을 속속들이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원수놈은 어찌하였느냐?”

“원수와 어찌 같은 황궁 아래 살 수 있겠습니까? 놈은 이미 죽었습니다. 황궁 뇌옥에서 죽었지요.”

뇌옥이라는 말에 소풍영이 두 눈을 번뜩였다.

“이제야 알겠구나. 제자가 뇌옥을 처음 방문했을 때 중간 방에서 불타 죽은 이가 그놈이구나.”

“그때부터 저를 아셨습니까?”

“네놈들이 그 안에서 그 난리를 피웠는데 어찌 모르겠느냐? 놈이 불타 죽은 것 같은데 참으로 잘되었어.”

경정은 소풍영이 자신의 말을 믿자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내 소풍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자가 진짜 여자인 것을 몰랐구나. 그렇다면 규화보전을 어찌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여인은 못 익히는 무공입니까?”

“규화보전은 태생이 환관이 만든 무공서다. 양기와 음기가 어그러진 몸을 가진 환관이 만든 무공으로. 그것을 익히면 음기가 강해져 여인처럼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음기가 강한 여인으로 태어난 너를 어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구나.”

“방법이 있겠지요. 가르쳐 주십시오.”

경정은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네가 이곳에 묶여 있는 몸만 아니라도 방법을 찾아 볼 터인데. 황궁 감옥 근처를 벗어날 수 없으니.”

“정녕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법사가 만든 결계라 내 힘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진법의 대가이신 대사 선사께서 살아생전에 지니고 계셨던 요령(搖鈴) 같은 신력이 있는 물건이라면 모르지. 그런 것이 있다면 결계를 깰 수도 있을 것이다.”

“구하면 되지요.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백 년 전에 녹림왕이 탈취하여 녹림이 보물로 간직하고 있거든.”

녹림왕의 보물?

경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느냐?”

“녹림왕의 보물이라고요?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가 그걸 대체 어디서 들어?”

“어! 악부생!”

순간 경정의 눈이 커졌다.

‘악부생이 녹림왕의 보물을 털어서 도망쳤다고 했는데? 심지어 나는 그가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도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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