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51)

고자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밀실 안에 앉아 있는 벽우와 자객 사일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곳에 들어온 강공공은 벽우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제게는 세 명의 자객만 들일 거라 하셨는데 아니었군요. 한명을 더 들이셨소.”

환관의 말에 벽우는 움찔했다.

강공공의 말대로 벽우는 흑수영에 부탁하여 자객을 한 명 더 요구했다.

고정엽을 죽이기 위해 그가 따로 부른 자객이었다.

강공공은 약속을 어긴 벽우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늙은 환관의 말에 벽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한편, 자객 사일은 방금 그를 막은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고수인가? 황궁 안에 여자 고수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사일은 어찌 된 영문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벽우는 막막함에 고개를 저었다.

봉천전에 금의위가 들이닥쳤다는 말을 전해 들은 벽우는 즉시 황궁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금의위가 사전에 출궁하는 통로를 죄다 막아놓아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운녕각에 있는 이곳 밀실로 도망쳐 온 것이다.

벽우가 강공공을 보며 말했다.

“강공공. 우리를 탈출하게 도와주시오. 조용해지면 다시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벽우가 사정했지만 강공공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의 기회가 날아가서 세 번째는 더욱 힘들어졌다.

“창음각 화재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은밀히 진행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사고로 알지요. 하지만 이번 일은 지난번처럼 쉽게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궁에 자객을 들였으니 고정엽과 엄세록은 궁을 모두 해체해서라도 자객을 잡으려고 들겠지요.”

“그러면 어찌한다는 말입니까?”

잠시 말이 없던 강공공이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양왕 전하께서 부리려고 데려가신 환관으로 위장하시면 됩니다.”

“환관으로 위장을 해요? 나 벽우가요?”

사일은 어차피 환관으로 위장하고 이곳에 왔기에 좋은 생각이라 여겼지만 벽우는 달랐다.

장군인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양물이 없는 환관이라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찌하여 환관으로 위장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절대 그렇게는 못 합니다.”

강공공은 안색이 굳은 벽우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럼, 궁녀로 변장하실 것입니까? 둘 다 양물이 없으니 비슷한 것 같은데요?”

“강공공. 말씀이 지나치시오.”

***

운녕각에 도착한 경정은 방금 그곳에서 나온 강공공을 보고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강공공은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왔고 곧 밀실의 문이 닫혔다.

강공공을 오랜 세월 동안 모신 소친자가 그를 부축했다.

“공공. 어서 감란원으로 돌아가시지요. 궁이 어수선합니다. 이런 와중에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안 될 일이지요.”

“나 같은 늙은 환관을 누가 관심이나 두겠는가?”

강공공은 운녕각을 나와 소친자와 함께 걸었다.

나무 아래로 내려온 경정은 몰래 뒤따르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소친자. 도자장(거세하여 환관을 만드는 장인)이 황궁 안에 들어와 있지?”

“그렇사옵니다. 신입 환관을 들이면 그들의 양물을 검사해야 하므로 도자장도 함께 들어 오곤 하지요.”

“잘되었구나. 내일 운녕각 밀실 바깥에 이 훈향을 피우고 그 안에 도자장을 집어넣어라.”

강공공이 건네는 것을 받아든 소친자가 놀라 물었다.

“이것은 마취제가 아닙니까?”

“운녕각에 숨어 있는 놈들을 자궁할 것이니 마취가 필요하겠지.”

“공공. 대체 어쩌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벽우가 고정엽을 끌어내리고 고위성을 황위에 앉히려 나를 이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황후를 죽이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것이니 피차일반이지. 하지만 더는 그자를 믿을 수 없구나.”

“그렇다면 그냥 밀실에 가둬놓고 죽이시지요. 어찌하여 그들을 거세하시려는 것입니까?”

“환관을 비웃는 놈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소친자는 잠시 놀라긴 했으나 말없이 강공공을 따랐다.

그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경정은 생각했다.

‘다 큰 성인을 자궁하면 목숨이 위험하다. 강공공이 무서운 분이셨군. 치욕스럽게 신체를 훼손하고 죽일 셈인 거야.’

경정은 강공공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황후 마마님을 해친 이들에게 이보다 완벽한 결말은 없었다.

경정은 저 멀리 보이는 냉궁 지붕을 보며 생각했다.

‘놈들을 빨리 처리하고 냉궁으로 돌아가야한다. 다행이 강공공이 나를 도와주는구나.’

***

다음날 건청궁에 녹씨 남매가 들었다.

녹경은 경정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미리 들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직접 보러 온 것이었다.

경정은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녹경은 경정의 눈을 흘기며 말했다.

“걱정됩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우리 같이 출궁합시다.”

“갑자기 출궁은 또 무슨 말입니까?”

“자객의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녹경은 어제 연회장에서 희태후가 경정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일을 떠올렸다.

경정이 폐하의 총비라서 황궁에서 편히 지낼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내명부의 가장 높은 어른인 희태후가 경정을 대놓고 싫어하니 그녀의 내명부 생활이 편할 리가 없었다.

“폐하께서 언니를 녹가로 보내 당분간 함께 살게 해주시겠다고 약조를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니의 손이 나으면 우리 출궁해요.”

경정은 막무가내로 출궁하자는 녹경을 보며 당황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녹빙을 바라보니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녹빙도 어제 연회장에서의 일이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녹경과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경정은 소풍영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황궁 최고 고수가 나를 제자로 받아준단다. 소태감이 뇌옥에 오래 갇혀있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지만 진짜로 고수인 것은 맞잖아.’

경정은 소풍영이 그녀의 등에 점혈한 것 때문이라도 반드시 다시 냉궁에 돌아가야만 했다.

‘문제는 녹씨 남매를 어찌 설득하느냐인데.’

경정이 고민하고 있는데 건청궁 안으로 소빈자가 들어왔다.

“백빈 마마. 두 분 태후 마마께서 오셨나이다.”

태후가 왔다는 말에 경정은 두 눈을 반짝였고 녹씨 남매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 침전의 문이 열리고 희태후와 진태후가 함께 들어왔다.

경정이 침상 위에서 내려가 예를 올리려고 하자 희태후가 달려와 그녀를 내려오지 못 하게 했다.

“백빈은 내려오지 말게.”

“희태후 마마. 저는 괜찮습니다. 예를 올리겠습니다.”

희태후는 경정의 손을 꼭 잡고 놔주지 않았다.

“백빈이 예를 아는 현숙한 후궁이라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그러니 편히 있어라.”

경정은 어제와 사뭇 다른 희태후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희태후가 이번에는 또 어찌 나올까? 긴장하고 있던 녹씨 남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희태후는 경정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어젯밤 자객이 등장하자 경정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객을 막아주지 않았던가?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희태후는 경정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백빈. 그동안 내가 자네를 오해했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후 마마.”

“간신배가 내 귀를 어지럽혔어.”

자기 아들인 양왕을 간신배라 말하는 희태후를 보며 경정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빈이 왜 선녀라 칭송받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네. 자네는 하늘에서 황궁에 내려준 보배야.”

희태후가 손을 들어 정상궁을 불렀다.

정상궁이 달려와 경정의 앞에 커다란 족자를 바쳤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희태후 마마?”

“펼쳐보게.”

경정은 의아해하며 정상궁이 건넨 족자를 펼쳤다.

그 안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목록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희태후 마마?”

“내가 자네에게 내리는 하사품 목록이네. 대부분 연회궁과 황릉의 태현궁에 있지. 다 가지고 올 수 없어서 목록으로 준비했네.”

“이것이 다 하사품이라고요?”

경정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족자를 확인했다.

족자에는 희태후가 가지고 있던 진귀한 보물은 물론이고 연희궁 뒷길에 심어진 나무까지 있었다.

“모두 선황께서 내게 내려주신 것들이지. 나는 이제 늙어 쓸데가 없으니 자네가 써주게.”

“희태후 마마. 이것은 너무 많습니다.”

경정은 하사품이 너무 많다고 사양했지만, 속으로는 그것의 값을 따져보고 있었다.

‘이게 다 얼마야? 출궁할 때 이것을 가져가면 난 갑부가 된다.’

머리 속으로 바쁘게 셈을 하는 경정을 보며 희태후는 착한 경정이 하사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고 오해하고 진태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태후 마마. 백빈을 좀 말려주세요. 우리 백빈이 너무 착해서 내 하사품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제도 백빈이 얼마나 소박하게 꾸미고 연회장에 왔습니까? 이 정도는 지니고 있어야 폐하의 총비라 할 수 있지요.”

진태후가 경정의 앞에 다가와 말했다.

“백빈은 어찌하여 희태후께서 주시는 하사품을 받지 않으려는 것인가? 사양하지 말고 받게.”

“진태후 마마.”

경정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희태후 마마. 저를 이리 어여삐 여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더 고맙다. 우리 예쁜 백빈.”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녹씨 남매는 어찌할 줄 몰랐다.

“오라버니. 희태후께서 언니에 대한 오해를 푸셨나 봅니다.”

“오해를 푼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총애하게 되신 것 같구나.”

녹씨 남매는 갑자기 친해진 경정과 희태후를 보며 얼떨떨했다.

그들은 경정을 녹가로 데려가는 일이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

밀실 앞에 선 도자장은 눈앞의 환관을 보며 물었다.

“소친자가 보내서 왔는가?”

“예. 나리. 이미 마취제를 뿌려 놓았으니 안심하고 들어가시지요.”

“흠. 알겠네.”

화관으로 위장한 경정이 운녕각 밀실에 찾아온 도자장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윽고 안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마취제를 들이마시면 뭘 할 거야. 자궁하는 고통은 장군이라 해도 참기 힘들 것이다.’

이내 비명이 잦아들었고 안에서 얼굴이 벌게진 도자장이 나왔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놈들이 반항이 심해 오래 걸렸다. 어서 의원을 불러 지혈하게 해라. 시기를 놓치면 목숨이 위험하다.”

“곧 의원이 당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알겠다.”

도자장은 손에 묻은 피를 닦고 밖으로 나갔다.

경정은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펴고 밀실 안으로 들어왔다.

밀실 안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의자에 묶여 있는 두 명의 사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하성군의 장군 벽우와 자객 사일이었다.

그들은 방금 자궁한 참혹한 모습으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벽우는 혼절한 채 깨지 못하고 있었으나 사일은 강호인이라 그런지 깨어 있었다.

경정은 사일에게 다가가 그의 혈을 짚었다.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한 것이다.

사일은 눈앞에 나타난 환관이 무공을 쓸 줄 안다는 사실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너는 누구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는 누구지? 어디 소속이냐?”

사일이 입을 열지 앉자 경정이 그의 환부를 쇠꼬챙이로 찍었다.

‘크아아아!!!’

처절한 비명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더 맞고 말할래? 아니면 지금 말할래?”

“...나는 흑수영의 살수 사일이다.”

“흑수영이라고? 설마 돈이면 어린아이까지 죽인다는 못돼먹은 놈들이 바로 너였냐?”

“난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았다.”

“가녀린 부녀자는? 힘없는 노인은 죽였고?”

“흠···”

사일이 입을 다물자 경정은 코웃음을 지었다.

“고자가 되어 죽는 것이 불쌍했는데 아니었구나. 나쁜 놈 같으니라고.”

사일은 자신이 죽는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살 도리가 없어 보였다.

경정은 환약 하나를 들고 말했다.

“이봐. 살수. 이걸 먹으면 고통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다. 어때? 원하는가?”

“나한테 뭘 원하지?”

“그래도 눈치는 있구나. 맞다. 네 놈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말해봐라. 쿨럭.”

사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졌다.

“원래 궁에 들어오기로 했던 신입 환관들은 어찌했지? 죽였는가?”

“겨우 그것이 궁금한가?”

“대답해. 어서!”

사일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시귀(屍鬼)에게 팔아넘겼다.”

사일의 말에 경정의 눈빛이 요동쳤다.

“죽은 사람의 신체를 모은다는 그 시귀 말이냐? 내 시신을 시귀에 팔았어?”

“시귀를 잘 모르는군. 시귀는 시체를 모으지 않는다. 숨이 간당간당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를 원하지. 크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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