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51)

자객이 모습을 드러내다.

경정은 즉시 태화전 안을 살폈다.

상석 위에는 희태후만 앉아 있고 진태후와 황후는 보이지 않았다.

‘황후 마마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당황한 경정은 희태후에게 인사를 올리러 가지 않고 황후를 찾아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상석에 앉아 있는 희태후는 인사하러 오지않는 경정을 보고 화가 났다.

‘백빈이 어찌하여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인가? 내가 곧 황릉에 갈 사람이라고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양왕도 없고 진태후와 황후도 없고. 나만 홀로 남았구나.’

희태후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편, 연회장을 돌아다니던 경정은 드디어 황후를 발견했다.

내실에서 쉬고 돌아온 진태후와 황후가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저기 계시는구나. 가서 두 분 옆에 꼭 붙어 있어야겠다.’

경정이 상석으로 가는데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녹경의 목소리였다.

“언니!”

경정은 고개를 돌려 녹경을 바라봤다.

“언니. 대체 왜 이리 늦은 것입니까? 오라버니와 제가 언니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경정은 녹경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녹경의 뒤에는 녹빙 공자도 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경정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라버니도 오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소공공에게 물어보니 마마님께서 아프셨다지요?”

“아프긴요. 음식을 잘못 먹어서 탈이 난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께 인사는 올리셨는지요?”

“아직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폐하께서도 보이지 않으셔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럼, 저와 함께 가실까요?”

경정은 즉시 녹씨 남매를 이끌고 상석으로 향했다.

황후는 경정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태후 마마. 백빈이 왔습니다.”

“그렇군. 얼굴이 좋아 보이네. 몸이 다 나은 것 같군.”

황후와 진태후는 경정을 보고 좋아하는데 옆에 있는 희태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하여 저리 멀쩡해 보이는가? 역시 내게 보인 행동은 모두 거짓이었군. 양왕의 말대로 나를 모시기 싫어서 병을 핑계로 도망친 것이 맞았어.’

희태후는 고개를 돌린 채 경정의 시선을 외면했다.

경정은 상석으로 오며 주위의 모든 것을 살폈다.

‘궁인들은 다 아는 사람들이다. 수상한 이는 보이지 않아. 근처에 무공이 고강한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한번 살펴볼까?’

경정은 은밀히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자 아까 소풍영에게 맞은 등이 따끔거리는 것이 아닌가?

‘왜 이러지? 등이 너무 아프구나.’

경정은 고통을 참아가며 주위를 확인했다.

그런데 태화전 안에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이의 기운의 느껴지지 않았다.

근처에 배치된 시위와 병사들은 경정이 지난번 봤던 살수의 기운에 미치지 못했다.

‘살수이니 기척을 숨기는데 도가 텄을 것이다. 분명히 태화전 어딘가에 숨어서 황후 마마를 해칠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황후 마마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켜야 한다.’

경정은 굳은 결심을 하고 상석에 올라갔다.

“두 분 태후 마마님을 뵙습니다.”

“황후 마마님을 뵙습니다.”

경정은 태후와 황후에게 각각 예를 올렸다.

녹경과 녹빙도 경정을 따라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황후는 녹씨 남매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녹가에서 오신 손님분들이시군요.”

“황후 마마.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황후와 진태후는 녹씨 남매의 안부를 물으며 편히 대해줬다.

하지만 희태후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그들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마침 희태후의 명을 받았던 정상궁이 돌아왔다.

“정상궁. 양왕은 찾았는가?”

“태후 마마. 소공공께 연락이 왔는데 폐하와 양왕 전하께서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 오늘 연회장에 못 오신다고 하십니다.”

“무슨 중한 일이 있다고 종친이 모두 참석하는 연회에 못 온다는 말이냐?”

희태후는 불만을 늘어놨고 상석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경정은 우선 녹씨 남매를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희태후가 경정을 불렀다.

“백빈.”

“예. 희태후 마마.”

희태후는 경정의 차림새를 빤히 쳐다보고는 물었다.

“오늘 연회는 황제의 종친들이 참석하는 연례 행사이네. 그런데 백빈은 어찌 그리 소박하게 입고 나타난 것인가?”

경정은 냉궁에서 오느라 제대로 꾸미지 못하고 왔다.

의복은 그렇다 치고 손가락에 끼는 호갑도 하지 않고 머리 장식이라고는 달랑 비녀만 한 개 꽂았을 뿐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희태후 마마.”

“연회가 끝나면 어디로 갈 것인가?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 청초각으로 가려는가?”

“당연히 연희궁으로 돌아가야겠지요. 태후께서 황궁에 계시는 동안 제가 모실 것입니다.”

“말은 그리해놓고 또 아프다는 핑계로 청초각에 숨으려고?”

녹경과 녹빙은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화들짝 놀랐다.

희태후가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경정을 공격하니 참을 수 없었다.

경정은 녹경이 나서지 못하도록 눈짓을 하고 희태후의 앞에 다가와 고했다.

“제가 태후 마마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지요.”

희태후는 경정이 용서를 구하자 그제야 손을 내렸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겠네. 다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희태후 마마.”

경정은 희태후의 노기를 가라앉히고 녹씨 남매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녹씨 남매는 내명부가 녹록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눈앞에서 직접 기싸움을 목격하니 분이 치밀어 올랐다.

“오라버니. 안 되겠습니다. 새해가 되면 당장 언니를 녹가로 데리고 와야겠어요.”

“그러자꾸나. 희태후 마마님이라는 분이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다.”

녹경과 녹빙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며 상석을 바라봤다.

***

금의위 심문실에서 흑의를 입은 세 명의 사내가 몸을 떨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이내 움직임이 사라졌다.

“폐하. 놈들이 독을 먹고 절명했습니다. 어금니 안에 독약을 숨기고 있었나 봅니다.”

“독한 놈들 같으니라고.”

“송구합니다. 폐하.”

고정엽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양왕은 어디에 두었는가?”

“금의위 내실에 계십니다. 양왕 전하께서는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 풀어달라고 하고 계십니다.”

“양왕은 오늘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 감금하라. 나중에 친히 심문하겠다.”

“알겠습니다. 폐하.”

고정엽이 일어서더니 죽은 살수들의 시체 앞으로 걸어갔다.

고정엽은 살수들의 몸과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느냐 그들의 몸에 뭔가 증거가 될만한 것이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고정엽은 그때 자객의 손목에 새겨진 숫자를 발견했다.

“엄도통. 이것이 무엇인가?”

“문신인 것 같습니다.”

“문신으로 숫자를 새겨넣었다고? 저자의 손에도 숫자가 새겨져 있나?”

“예. 그렇습니다. 구일(九一)과 구삼(九三)이 새겨져 있습니다.”

“흠. 이자는 구칠(九七)이네.”

고정엽은 생각했다.

대체 이 숫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순간 고정엽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 숫자가 살수단 내에서의 이들의 지위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금의위도 입단한 기수로 사람들을 부르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이자들이 죄다 구십번대의 번호를 달고 있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살수단에 입문한 자들이라는 것인데. 엄도통.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금의위도 일을 할 때 보통 경험이 풍부한 이를 한 명은 조에 넣지 않는가?”

“그렇지요. 그래야 조직의 운영이 되니까요.”

“이자들은 같은 기수의 자객이네. 그렇다면 조장이 되는 자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

엄세록이 놀란 눈으로 고정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구나. 어서 태화전으로 가자.”

***

흑수영 살수 사일(四一)은 지금 태화전 상석 아래 마룻바닥에 숨어 있었다.

그는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상석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여인들의 화려한 치마가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표적은 옥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다.

사일의 부하들이 봉청전의 대들보 위에 숨어 있는 동안 그는 환관으로 위장하여 황궁 주위를 돌아봤다.

일을 마치고 도망가는 퇴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봉천전 주위에 무장한 이들이 깔리는 모습을 보고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는 바뀐 연회장인 태화전에 홀로 숨어들었고 일을 시작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탈출로는 모두 확인했다. 황후를 죽인 뒤에 곧장 황궁을 탈출한다.’

그는 허리춤에 찬 연검(軟劍)을 매만지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 자색의 화려한 치마와 푸른색의 단아한 치마를 입은 여인이 동시에 일어섰다.

그들은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상석을 떠났다.

상석 위에는 오로지 옥색 비단을 입은 여인과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다!’

사일은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일은 알지 못했다.

옥색 비단옷을 입은 이는 황후가 아니라 희태후라는 사실을.

***

“황후. 나는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다녀오겠네.”

진태후가 일어서자 황후도 일어섰다.

“저도 따라가겠나이다. 태후 마마.”

후궁들이 옷을 갈아입고 온다는 말은 진짜로 옷을 갈아입고 온다는 뜻이 아니었다.

화장실(化粧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풀어서 하는 것이었다.

진태후와 황후가 함께 일어서자 경정은 긴장했다.

화장실이야말로 자객이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아닌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경정이 일어서자 희태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도 가려고?”

“밖이 어둡습니다. 태후 마마님과 황후 마마님을 살펴야 할 것 같아서요.”

“진태후께는 진상궁이 있고 황후에게는 안상궁이 있네. 자네가 상궁의 일을 대신하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백빈은 따라가지 말고 내 곁을 지키게.”

“하지만 희태후 마마.”

다른 후궁 같으면 태후 마마의 눈 밖에 날까 봐 걱정하겠지만 경정은 아니었다.

고작 이런 일로 희태후에게 잡힐 경정이 아니었다.

경정은 발에 힘을 주고 힘껏 진각(震脚, 권법에서 자주 등장하는 발을 구르는 행동)을 밟았다.

그러자 경정이 신고 있는 화분혜(花粉鞋, 내명부 여인들이 신는 굽이 높은 신발)의 굽이 똑하고 부러졌다.

“어머나 이를 어쩌나. 굽이 부러졌습니다.”

“뭐라?”

“신을 갈아 신으러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경정이 총총걸음으로 태후와 황후를 따라가니 희태후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역시 양왕의 말이 맞았구나. 백빈은 간사하기 그지없는 요물이로다.’

희태후가 경정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는 그 순간이었다.

‘쩌어억!’

나무판자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닥에서 흑의를 입은 사내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경정이 놀라 허공에 튀어 오른 사내를 확인했다.

검은 흑의.

허리에 찬 연검을 뽑아내는 솜씨.

‘살수다!’

때마침 태화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고정엽과 엄세록이 무장한 금의위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가 허공에 솟구친 자객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자객을 잡아라!”

하지만 자객은 어느새 연검을 뽑아들고 옥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에게 검을 내질렀다.

태화전 문 앞에서 상석까지 거리가 있어 제아무리 고강한 신법을 가진 고수라도 자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척에 서 있던 경정은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객을 잡으러 달려가던 경정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소풍영이 그녀의 등에 짚은 혈도가 타들어 가는 듯이 아팠다.

‘아! 그렇구나. 여기서 무공을 쓰면 안 된다. 내 정체를 들키게 될 거라고.’

연검이 뱀처럼 똬리를 틀며 허공을 날아오고 있었으나 경정은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무공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좋지? 어찌해야 저 자객을 막을 수 있을까?’

순간 경정의 눈이 번뜩였다.

경정은 그녀의 오른손에만 내공을 집중시켰다.

등이 따끔거리며 아팠지만 참을 만했다.

사일이 내지른 검이 희태후의 바로 코앞에 당도한 그 순간, 흰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사일의 검을 맨몸으로 가로막았다.

경정은 오른손 주먹에만 내공을 실은 채 날아오는 연검을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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