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자매, 몰락하다.
경정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한심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경정은 슬쩍 주위를 돌아봤다.
황후는 물론이고 내명부의 후궁들이 대경실색하여 화씨 자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궁들 뿐이겠는가?
그들이 부리는 궁녀와 환관들도 자매의 추태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궁의 여인들은 말로 싸우면 싸웠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손을 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 화씨 자매는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것이 아닌가?
황후를 본 채옥과 운송이 놀라 그들의 주인을 말렸다.
“마마님. 그만하시지요. 황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운송. 시끄럽다. 오늘 내가 못된 것의 머리털을 다 뽑아놓을 것이다.”
“화선의. 너야말로 오늘 내 손으로 목을 비틀어 버릴 것이다.”
겁에 질린 운송이 화빈을 말렸으나 오늘따라 화빈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편, 채옥은 운송과 달리 대충 말리는 시늉만 했다.
‘화씨 자매는 모두 죽어야 해. 화빈도 예귀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채옥은 이번 일로 두 사람이 모두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랐다.
경정은 화어의가 만든 광증을 일으키는 약의 효과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
‘화씨 자매는 제 꾀에 자기가 걸려들었군.’
경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황후의 팔을 붙잡았다.
“황후 마마. 이것이 대체 무슨 일입니까? 두 분 마마님이 왜 저러고 계시는 것입니까?”
“백빈. 떨지 마라. 나도 무척이나 놀랐다.”
그때 강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후 마마. 방금 화빈께서 연회장에서 있었던 사통 사건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흠. 나도 확실히 그런 말을 들었네.”
“황후 마마님. 이 일을 확실히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범인이 예귀인과 화빈 마마님이라면······.”
강귀인은 후폭풍이 두려워서 말을 아꼈다.
황후는 손을 들어 안상궁에게 명을 내렸다.
“안상궁. 미쳐 날뛰는 화빈과 예귀인을 무릎 꿇리게.”
“알겠습니다. 황후 마마.”
안상궁은 황후의 명에 따라 환관을 시켜 서로 엉겨 붙어 있는 화빈과 예귀인을 떼어내 무릎 꿇렸다.
화빈과 예귀인은 그제야 그들이 황후와 후궁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을 알고 대경실색했다.
‘내가 방금 어떻게 됐었나? 어찌 화를 참지 못하고 화예희와 싸운 것인가?’
예귀인은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으나 아직 정신이 온전한 화빈은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동생을 몰아내고 재기를 노렸으나 이번 일로 그녀가 재기할 방법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황후 마마. 오해이시옵니다.”
“무슨 오해라는 말인가? 그동안 화빈이 폐인이 되어 말도 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었는가?”
“황후 마마. 저도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맑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피를 나눈 친동생과 죽일 듯이 싸웠다는 것인가?”
황후는 평소 온화하게 후궁들을 대했으나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황후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화빈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망연자실한 화빈의 모습을 보는 예귀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화선의. 꼴 보기 좋구나. 폐인이 된 척 연기를 했던 것이 모두 들통이 났어.”
“시끄럽다. 화예희. 그 입 닥치거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화선의.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하하하.”
황후는 화씨 자매의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안상궁. 폐하께는 내가 고할 것이니 당장 청초각을 폐쇄하고 저들을 이곳에 가둬라.”
“예. 황후 마마.”
황후는 명을 내리고 뒤에서 떨고 있는 경정에게 다가갔다.
경정은 혼신의 연기를 하며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백빈. 놀랐느냐?”
“황후 마마.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두 분이 이렇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인사까지 해 주셨는걸요.”
“백빈. 당분간 청초각에서 지내지 못할 것 같다. 나와 함께 종수궁으로 가자꾸나.”
황후와 경정의 곁으로 강귀인이 다가와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백빈 마마. 종수궁으로 가셔서 지내시지요. 이곳은 정말 사람이 살 곳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그리고 강귀인 마마님.”
경정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쥐어 짜내며 손수건으로 그것을 훔쳤다.
예귀인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댔고 화빈은 멍한 얼굴로 동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궁들은 화씨 자매의 몰락을 보며 속으로 고소해하고 있었다.
‘예귀인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군. 폐하께서 멀리하신 이유가 있었어.’
‘화가의 세력을 등에 업고 그동안 화씨 자매가 내명부에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아주 잘 되었어.’
‘화빈. 감히 재기하기를 바랐느냐? 꿈도 꾸지 말아라.’
***
고정엽은 뒤늦게 이 일을 고해 듣고 깜짝 놀랐다.
“뭐라? 청초각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냐?”
소공공은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봐 최대한 순화해서 말을 전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고정엽은 분노했다.
“그렇다면 백빈과 엄도통의 두 번째 사통 사건을 꾸민 자가 예귀인이었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영화궁에 불을 낸 것도 일을 시킨 환관과 증좌를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사람까지 해쳤다는 말인가?”
“송구하지만 그렇사옵니다. 금의위가 번견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환관을 찾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화씨 자매가 눈에 뵈는 것이 없구나.”
소공공은 화를 내는 황제가 이해됐다.
백빈이 두 번이나 엄세록과 사통했다는 누명을 썼는데 그것이 화씨 자매의 소행이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양심전으로 금의위 송범한이 들어왔다.
송범한은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고정엽을 보며 침을 삼켰다.
“폐하. 소신이 청초각의 일을 조사하고 왔습니다.”
“화씨 자매가 꾸민 악행이 더 있더냐?”
송범한은 긴장한 얼굴로 품속에서 약첩을 꺼내 황제에게 바쳤다.
“이것이 무엇인가?”
“청초각에서 발견한 약이옵니다.”
“약이라고?”
“예. 먹으면 광증에 걸리는 약이라고 합니다. 태의께서 보시기에 현재 예귀인 마마님은 이미 광증이 도지셨고 화빈 마마께서도 증상이 엿보인다고 하십니다.”
“뭐라? 그렇다면 자매가 서로에게 미치는 약을 먹였다는 것이냐?”
“송구하지만 그런 것 같사옵니다. 이 약을 처방한 이는 어의 화준성입니다.”
“또 화씨인가? 화가의 세력이 아주 대단했구나. 황궁에 심어 놓은 세력이 이리 대단했어.”
고정엽은 송범한이 바친 약을 던지려다 말고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경정이 소의였을 때 그녀의 심병을 치료하던 이가 바로 화준성이었다.
“송도통. 화준성을 잡아들였느냐?”
“예. 폐하. 청초각의 궁인들은 모두 심문하였고 이제는 그의 차례이옵니다.”
“가서 알아 와라. 화씨 자매가 그토록 악독하다면 분명 백빈에게도 해를 가하려 했을 것이다.”
“예. 분부 받들겠습니다.”
송범한이 가고 소공공이 황제의 옆에 섰다.
“폐하······.”
“왜 그러는가?”
“밖에 예부상서 화진충이 와 있습니다.”
고정엽은 화씨 자매의 아비인 화진충이 왔다는 말에 비웃음을 흘렸다.
“아직 죄가 다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딸들을 구명하러 온 것인가? 소공공. 당장 화진충를 돌려보내라. 일의 결과가 나오면 그때 다시 부를 거라 해라.”
“예. 폐하.”
고정엽은 황제의 말을 전하러 가는 소공공을 보며 생각했다.
‘화진충. 다음에 양심전에 올 때는 관복을 벗고 와야 할 것이다.’
***
경정은 화준성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미소를 흘렸다.
일이 일어나기 전 경정은 청초각에 화어의가 보냈던 약을 숨겨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금의위는 경정이 지내던 처소에서 약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거로 가져갔다.
“이제야 화빈까지 완벽하게 엮을 수 있겠구나.”
경정은 이번 일로 화씨 자매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을 알고 기뻐했다.
“드디어 발 뻗고 잘 수 있겠어. 연초에 스승님께서 황궁으로 돌아오시면 남은 일만 처리하면 된다.”
경정이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데 처소 문이 열리고 소이자가 고개를 숙인 여인과 함께 들어왔다.
소이자가 데려온 이는 다름 아닌 채옥이었다.
금의위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던 채옥은 지금 신형사에 갇혀 있었다.
채옥은 자신을 신형사에서 빼낸 사람이 백빈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예귀인을 증오하여 내게 대신 화풀이하려는 것이다.’
채옥은 차라리 잘 되었다며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노비로 사는 것이 신물이 났다.
경정이 소이자를 향해 눈짓하자 소이자가 금창약(金瘡藥)을 가져와 채옥의 팔에 발랐다.
채옥은 화들짝 놀라 소이자와 경정을 노려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죽이시려면 당장 죽이십시오.”
경정은 악을 쓰는 채옥을 보며 웃으며 답했다.
“내가 너를 죽여서 무엇에 쓰겠느냐?”
“뭐라고요?”
“경총이 네 동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채옥은 백빈의 입에서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크게 떴다.
“경총은 나와 예귀인의 암투에 말려들어 죽게 된 것이다. 미안하구나. 채옥.”
경정은 일어서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채옥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소이자가 재빨리 의자를 대령했다.
경정은 채옥을 의자에 앉히고 직접 금창약을 발라줬다.
“내가 경총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용서해 주게. 예귀인이 그리 악독한 사람인지 정말 몰랐네.”
채옥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주인들은 노비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법이 없었다.
채옥은 백빈이 화씨 자매를 완전히 몰락시키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게 술수를 부리려고······.”
말을 하려던 채옥이 놀라 입을 닫았다.
소이자도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은 것이다.
그는 챙겨온 간식을 탁자 위에 올렸다.
채옥은 세 개의 찻잔과 산처럼 쌓아 올린 떡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채옥 누님. 좀 드시오. 신형사에서 물도 주지 않았다지요?”
소이자는 대추 떡을 입에 문 채 채옥에게도 그것을 건넸다.
채옥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경정은 소이자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소이자. 오랫동안 굶은 사람에게 떡이 뭐냐? 탕이나 죽을 가져왔어야지.”
“궁녀들에게 물어보니 채옥 누님과 경총이 대추 떡을 좋아한다고 해서요. 소인이 실수 한 것이옵니까?”
“그랬어?”
“예. 소인이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럼, 됐다. 어서 먹어라. 채옥. 자네도 들게.”
채옥은 손에 들고 있는 대추 떡을 내려놓고 물었다.
“백빈 마마.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미안해서 그런다고 아까 말하지 않았나?”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한 가지 더 있다.”
경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채옥은 긴장했다.
‘역시 내게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인가?’
그런데 채옥의 예상과 달리 경정은 그녀에게 지도와 서찰을 건넸다.
“그 지도에 나온 것은 상의감 궁녀 출신인 윤영이라는 자가 운영하는 자수점이네.”
“예?”
“내가 자네를 위한 추천서를 적어줄 테니 그곳에서 새 인생을 살게.”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오?”
“화가를 모시던 시녀 중, 악행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내가 모두 살려줄 것이다. 그러니 노비였던 지난날은 잊고 새 인생을 살아라.”
채옥은 손에 든 지도와 서찰을 보며 손을 떨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주인은 모두 노비를 이용하고 착취하기만 했다.
그런데 눈앞의 여인은 어떠한가?
환관과 서로 마주 앉아 스스럼없이 대추 떡을 나눠 먹고 있지 않은가?
채옥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경총도 이렇게 좋은 주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다.
“울지마라. 난 우는 것은 딱 질색이다.”
“감사합니다. 백빈 마마.”
“대추 떡이나 먹어봐라. 먹어보니 맛있네.”
“이 은혜를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마마님.”
“뭘 죽기까지 하나? 윤영을 도와 자수점을 크게 키워주게. 내가 그 자수점의 최대 투자자네. 하하하.”
경정이 호탕하게 웃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경정은 내공으로 귀를 열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 확인했다.
[소공공께서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안상궁. 당분간 황후 마마께 화씨 자매의 소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주게.]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소공공?]
[큰일이 났네. 예귀인의 죄가 추가로 밝혀졌는데 그것이 황후 마마님과 관련된 것이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만 알고 있게. 지난날 창음각 화재 때 예귀인이 황후 마마님을 밀었다는 정황이 밝혀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