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켜줘, 예귀인 명예소방관
“예귀인. 지금 번견(番犬)의 추적을 피하고자 영화궁에 불을 지른 것이냐? 허. 대단하구나. 대단해.”
경정은 황궁에 불까지 지른 예귀인을 미쳤다고 여겼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예귀인의 임기응변이 대단한 것 같았다.
“잠깐! 이 정도로 치밀한 수를 생각해 냈다면 단지 금의위의 추적을 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썼으니 분명 뭔가를 얻으려고 하겠지.”
경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소이자가 소리쳤다.
“마마님! 영화궁에 불이 났습니다.”
불을 보고 놀랐는지 소이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소이자. 나는 잠시 나갔다 오마.”
“이 밤중에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영화궁에 불이 나서 밖이 혼란스럽습니다.”
소이자는 대경실색하여 경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험하니 이곳에 계시지요.”
“예귀인이 낸 불이다. 번견을 피하고자 몸소 궁에 불까지 냈는데 내가 가야 하지 않겠느냐?”
경정을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바깥으로 사라졌다.
“마마님. 소인과 함께 가시지요.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뒤늦게 따라 나온 소이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경정을 찾으러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아이고. 마마님. 벌써 가신 것입니까?”
소이자는 울상이 된 채 옷자락을 움켜쥐고 영화궁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
예귀인이 화빈의 처소에 들어와 그녀의 언니를 찾았다.
예귀인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진 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화선의. 일어나라.”
예귀인이 언니의 이름을 부르며 발로 툭툭 쳤지만, 화빈은 눈을 뜨지 않았다.
두 손에 떡을 손에 꼭 쥔 채 침상에 엎어져 있는 꼴이 마치 폐인과도 같았다.
“채옥! 화선의를 들어라.”
“예. 마마님.”
시녀 채옥이 의식이 없는 화빈을 등에 업었고 예귀인이 옆에서 부축했다.
“어서 가자. 이곳까지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다.”
“예. 마마님.”
예귀인은 화빈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몰려온 시위와 환관들이 예귀인의 궁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귀인 일행을 발견하자 예귀인이 채옥의 팔을 꼬집었다.
눈치 빠른 채옥은 화빈을 예귀인의 팔에 맡기고 뒤로 빠졌다.
예귀인은 마치 자신이 화빈을 구해온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마님을 보필하라!”
예귀인을 알아본 시위들이 그녀에게 몰려갔다.
화빈은 여전히 떡을 두 손에 쥔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예귀인은 화빈을 꼭 안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마마님. 괜찮으십니까?”
“이보게. 내가 앞이 보이지 않네.”
“예?”
예귀인은 두 눈을 꼭 감고 마치 창음각 화재 때 황후가 그랬던 것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영화궁의 궁인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 예귀인의 앞에 주저앉았다.
“마마님이 앞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우리 마마님을 구해 주십시오.”
“예귀인 마마님. 눈을 뜨셔요. 마마님!”
예귀인은 겉으로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은가? 어림도 없는 소리지.’
예귀인은 이강이 달고 온 향을 없애기 위해 초강수를 뒀다.
영화궁에 불을 지르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영화궁에 직접 불을 내면서 기가 막힌 수를 떠올렸다.
‘내가 화선의를 구하다 황후 마마처럼 눈이 다친 것으로 위장하면 분명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나를 가엽게 여길 것이다. 이번 기회로 윗전의 신임을 회복하고 폐하의 총애도 얻을 것이다.’
예귀인은 황제 폐하가 이곳 영화궁에 도착해서 이 모습을 보기를 바랐다.
그때 따뜻한 손길의 예귀인의 어깨를 매만졌다.
예귀인은 이것이 황제 폐하의 손길일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올렸다.
“폐하시옵니까?”
“아니요. 백빈입니다. 예귀인 마마님.”
“백빈이라고요?”
예귀인은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의 원수인 백빈이 제일 먼저 영화궁에 달려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어찌하여 백빈 마마께서 오신 것입니까? 종수궁과 이곳은 꽤 멀지 않습니까?”
예귀인은 환관들이 지내는 숙소에 먼저 불을 내고 다음으로 그녀가 지내는 궁에 불을 냈다.
불길이 커지는 것을 보자마자 화빈의 처소로 달려와 언니를 끌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불을 낸 지 일다경(一茶頃, 약 15분) 정도 흘렀을 뿐이다.
“제가 청초각에 일이 있어서 그곳에 갔다가 오던 길에 영화궁에 불이 난 것을 보았지요. 그래서 빨리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
예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폐하를 만나야 하는데 갑자기 방해꾼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그녀의 귀에 들렸다.
“드디어 불길이 잡혀가네요. 다행입니다.”
“천운입니다. 이곳 영화궁에 화재용 수조(水槽)가 많아서 다른 궁에 물을 빌리러 가도 되지 않아서 쉽게 불길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어쩐지 환관들이 건네는 물동이가 끊이질 않길래 이상하다 했습니다.”
예귀인은 벌써 불이 꺼졌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손을 꽉 쥐었다.
경정은 놀라는 예귀인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곳에 당도하자마자 당영각(堂影閣)에 달려가 그곳에 있는 수조를 모조리 영화궁 뒷마당에 옮겨놨다.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기분이 좋구나.’
경정이 수조를 옮겨놨기에 궁인들이 그 안의 물을 이용하여 불길을 쉽게 잡은 것이었다.
예귀인이 원했던 것은 영화궁이 완전히 전소되어 그녀가 머물 곳이 없어서 경정처럼 종수궁에서 머무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길이 예상보다 일찍 잡히는 바람에 그녀의 바람이 허사로 돌아갔다.
“다행입니다. 예귀인께서 머무시던 궁만 조금 불탔고 화빈 마마의 궁은 불길이 전혀 닿지 않았네요.”
“그렇습니까?”
“아! 궁인들의 숙소는 전소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네요.”
“아. 그렇군요.”
예귀인은 눈을 떠서 눈앞의 상황을 보고 싶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예귀인께서는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보살펴 드리죠.”
경정은 예귀인과 화빈을 함께 잡아끌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이곳에서 폐하를 기다리시려고요?”
“그것이 아니라······.”
예귀인은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불탄 영화궁 앞에서 폐하를 만나야 극적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경정은 예귀인이 바라는 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가시지요. 영화궁 바로 옆에 당영각(堂影閣)이 있으니 그곳에서 쉬세요.”
경정은 예귀인과 화빈을 부축한 채 당영각으로 걸었다.
예귀인은 갑자기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깜짝 놀랐다.
경정은 화빈과 예귀인의 혈도를 짚어 움직이지 못 하게 하고 힘으로 들어서 그녀들을 데리고 갔다.
“우리는 당영각에서 쉬고 있겠네.”
“예. 백빈 마마님.”
수령 태감에게 명을 내린 경정이 예귀인과 화빈을 들고 당영각으로 사라졌다.
***
고정엽이 소공공을 대동하고 영화궁 앞에 섰다.
황후도 오고 싶어 했으나 고정엽은 안된다며 그녀를 말렸고 황후는 종수궁에 남았다.
고정엽이 도착하자 영화궁의 수령 태감이 달려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이냐?”
“폐하. 송구하옵니다. 환관이 묵는 숙소에서 불길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 촛대가 넘어진 것 같사옵니다.”
“인명 피해는 없는가?”
“영화궁의 마마님들은 무사하십니다. 하지만 영화궁에서 일하던 환관 하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 혹시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니고?”
“불길이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그자의 처소이옵니다. 아무래도 불길이 거세 살아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곳은 완전히 불타 없어졌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고정엽은 황궁에 화(火)로 인한 사고가 끊이질 않자 걱정이 앞섰다.
“영화궁에 살던 후궁들은 무사하다고 했지?”
“백빈께서 두 분 마마님을 모시고 당영각에서 손수 돌보고 계십니다.”
“백빈이 이곳에 왔는가? 백빈은 다치지 않았고?”
“백빈 마마께서는 털끝도 다치지 않으셨으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경정이 무사하다는 말에 고정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태의 당지계가 영화궁에 당도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태의는 어서 당영각으로 가 보게. 태의가 봐줘야 할 사람들이 그곳에 있어.”
고정엽은 마음이 급했다.
‘홍아는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온 것이야.’
고정엽은 방금 연회장에서 사통했다는 누명을 쓸뻔했던 그녀가 이런 일까지 연달아 당하니 안쓰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
예귀인은 두 눈을 감은 채 주위를 살폈다.
당영각으로 예귀인과 화빈을 데려온 경정은 제일 먼저 화빈을 살폈다.
‘화빈이 폐인이 되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원생에서 백경정 마마님을 죽인 자가 바로 화빈이니 이렇게 죗값을 치르는 것이겠지.’
경정은 화빈이 이리 된 것이 모두 자업자득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이를 잃고 폐인이 된 여인의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화빈은 그녀의 아이를 죽인 진귀인을 증오하며 그녀가 냉궁에 있을 때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했다.
하지만 진귀인이 독주를 마시고 죽자 마치 과녁을 잃은 화살처럼 증오의 대상을 찾지 못하고 미쳐갔다.
예귀인은 친언니가 괴로움 속에 폐인이 되었는데도 언니를 보살피기는커녕,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암투에 바빴다.
경정이 고개를 돌려보니 예귀인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예귀인 마마. 눈을 좀 떠보시지요. 아까는 불을 보고 놀라서 눈을 못 뜨신 것입니다. 이제는 괜찮겠지요?”
예귀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저었다.
“어찌 태의께 보이지도 않고 함부로 눈을 뜨겠습니까? 제가 다치면 황궁에 홀로 남을 제 언니는 누가 지킬까요?”
경정은 끝까지 친언니를 이용하는 예귀인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래? 관심도 없으면서.’
그때 채옥이 들어와 예귀인에게 따뜻한 차를 바쳤다.
“마마님. 이것을 좀 드시지요.”
“고맙구나. 그런데 폐하께서는 아직이시냐?”
“소인이 영화궁에 다녀와 볼까요?”
“그래. 다녀와라.”
“예. 마마님.”
채옥이 일어서는데 문밖에서 소공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듭시오.”
황제가 왔다는 말에 예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귀인이 손을 내밀자 채옥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부축했다.
예귀인은 채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화선의에게로 가자.”
“예. 마마님.”
예귀인은 침상에 누워있는 화선의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경정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황제 고정엽이 들어왔다.
고정엽은 당영각에 들어서자마자 경정을 먼저 찾았다.
“폐하. 오셨습니까?”
경정은 보란 듯이 달려 나가 고정엽의 앞에 예를 올렸다.
고정엽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다친 곳은 없는지 먼저 살폈다.
“폐하. 신첩은 괜찮습니다. 예귀인께서 다치셨으니 예귀인 마마님을 먼저 살펴주시어요.”
“예귀인이 다쳤다고? 영화궁의 수령 태감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예귀인 마마께서 화기에 상해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십니다.”
“뭐라?”
고정엽은 황후와 마찬가지로 예귀인이 화기에 눈을 상했다고 하니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태의는 어서 예귀인을 살펴라.”
“예. 폐하.”
태의 당지계가 예귀인의 앞으로 달려갔다.
“신첩도 가 보겠나이다.”
경정은 그녀의 손을 꽉 잡은 고정엽의 손을 떼어 버리고 태의 옆으로 달려갔다.
태의는 예귀인의 맥을 짚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예귀인의 눈은 멀쩡했다.
황후 때처럼 눈가에 화기가 심하게 들지 않은 것이다.
경정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의 영감. 어떻습니까? 예귀인 마마께서 지척에서 불길을 보셨다고 하네요.”
“무척 놀라셨겠군요. 하지만 마마님의 눈은 황후 마마님 때처럼 심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참말로 다행입니다.”
예귀인은 진맥하는데도 끼어드는 백빈이 미워서 치를 떨었다.
그때 경정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 마마님께 드렸던 약초가 아직 청초각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으로 또 약을 지어 볼까요?”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태의는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예귀인의 눈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경정은 눈을 뜨지 못하는 연기를 하는 예귀인을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태의 영감. 왜 주저 하십니까? 시력이 멀쩡한 상태로 약초를 먹으면 눈이 상해 시력을 잃을까 봐 그러십니까?”
“뭐라고요?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구요?”
예귀인은 흠칫 놀라 그녀의 치마를 꽉 움켜잡았다.
경정은 예귀인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흥. 거짓말이지롱. 이쯤했으니 그만합시다. 이제 출궁할 때가 되었소.’
경정은 예귀인의 손을 잡고 다른사람들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소량의 내공을 흘려보냈다.
"예귀인 마마."
"헉!"
순간 예귀인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오호. 기적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