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251)

황후, 눈을 뜨다.

경정은 창문을 열고 종수궁 밖으로 나가는 엄세록을 관찰했다.

엄세록은 황제가 계신 양심전(養心殿)도 아니고, 금의위가 일하는 조천궁(朝天宮)도 아닌 서쪽 궁으로 향했다.

‘황궁 출입자 명단을 확인하시려는 것이구나. 황후 마마께 위해를 가한 놈들이 조만간 드러나겠어.’

경정이 창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저 멀리 종수궁 입구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어라? 저것은······?’

경정은 창문을 닫는 척을 하며 입구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환관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비질을 하고 있었다.

‘이강. 네 놈이로구나. 그런데 네 놈의 팔이?’

경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강은 팔을 다쳤는지 왼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두 겹 종이로 수작을 부린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주인에게 크게 혼이 난 모양이로구나. 역시 예귀인은 온화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무섭도록 차가운 사람이다.’

경정은 방금 이강이 엄세록과 자신이 대화를 나눈 것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었다.

경정이 창문을 완전히 닫고 돌아서자 소이자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마마님. 왜 그렇게 환히 웃으시는 것입니까?”

“일이 잘 풀리고 있으니 웃을 수밖에.”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차 알게 될 터이니 조급해하지 마라. 그건 그렇고 내가 준비해 놓으라던 그것은 다 준비해 놨겠지?”

“그럼요. 마마님.”

경정이 처소의 안쪽에 가보니 소이자가 그녀를 위해 차려 놓은 것이 보였다.

경정은 자리에 앉아 어화원에서 가져온 말린 꽃의 향을 맡았다.

“좋구나. 은목서를 말리니 그 향이 더욱 진해졌어.”

“마마님. 이 말린 은목서로 향을 만드시려는 것이죠? 지난번에도 한 번 만드셨잖아요.”

“그렇다. 이것으로 향을 만들어 나를 아껴주신 분들께 선물하려고 한다.”

경정은 꽃향기를 맡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황후가 긴장한 채 경정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종수궁에는 황제는 물론 태후까지 와 있었다.

고정엽이 태의 당지계에게 물었다.

“태의. 황후의 병이 차도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백빈 마마께서 주신 약초가 효험을 보여 눈을 상하게 한 화기를 거의 몰아냈습니다.”

당지계의 말에 종수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상궁은 나 대신에 황후 마마님의 눈을 가린 천을 풀어주시게.”

“예. 알겠습니다.”

안상궁이 일어서자 경정이 그녀를 막아섰다.

“내가 하겠네.”

경정은 안상궁을 뒤로 보내고 황후의 뒤에 가서 섰다.

“황후 마마. 제가 직접 천을 풀게 해주십시오.”

“백빈. 그대에게 맡기겠네.”

황후는 경정을 믿었고 종수궁에 모인 모두가 그녀를 신임했기에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경정은 황후의 눈을 가리고 있던 흰 천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안상궁. 처소를 좀 더 어둡게 해주게.”

“예. 백빈 마마님.”

안상궁은 즉시 창에 병풍을 대서 처소 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경정은 황후의 눈을 가린 끈을 풀어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후 마마. 준비되셨습니까?”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정은 끌러낸 흰 천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

황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경정은 자리로 돌아와 황후의 손을 꼭 잡았다.

“황후 마마.”

“백빈. 너무 무섭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의 영감이 어떤 분이십니까? 태의께서 다 나았다고 하셨으니 분명 눈이 보이실 것입니다.”

경정이 손을 잡아주자 황후의 떨리던 손이 그제야 멈추었다.

“황후 마마.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눈을 떠보시지요.”

“그렇네. 황후. 어서 눈을 떠보게.”

태후까지 거들자 황후는 용기를 냈다.

경정은 긴장 한 채 황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황후는 천천히 눈을 떴고 그녀의 동공에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황후의 눈은 초점 없이 흔들리다가 이내 또렷하게 돌아왔다.

황후는 고개를 돌려 경정을 바라봤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경정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백빈이로구나.”

“황후 마마. 보이십니까?”

“보인다. 아주 또렷이 잘 보이는구나.”

황후가 눈을 뜨자 황제가 벌떡 일어서서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황후는 다가온 황제의 손을 잡았다.

“폐하. 신첩의 눈이 이제 보입니다. 어찌 이렇게 살이 빠지셨습니까? 혹여 신첩 때문입니까?”

“아니네. 황후. 짐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 것이네.”

태후는 기뻐하며 황후를 치료한 태의 당지계를 불렀다.

“이렇게 기쁠 수가. 황후가 눈을 떴으니 경사로구나. 태의는 이리 오거라.”

당지계는 태후의 앞에 서서 예를 올렸다.

“태후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태의도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오늘 일의 일등 공신은 소신이 아니옵고 바로 여기 계신 백빈 마마님이십니다. 태후 마마.”

당지계는 모든 공을 경정에게 돌렸다.

태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황후의 곁에서 기뻐하는 경정을 불렀다.

“백빈. 이리 오게.”

경정이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태후의 앞에 섰다.

그녀를 보는 태후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백빈. 어쩜 이리 예쁠고. 심성이면 심성. 외모면 외모. 재능이면 재능. 모든 것이 빠지지 않고 완벽하구나. 이런 아이를 곁에 두고 있으니 나는 물론이고 황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백빈은 내명부의 보배로다.”

태후가 경정을 극찬하자 황후가 기뻐하며 말했다.

“태후 마마. 녹가에서 백빈이 돌아온 뒤로 어두웠던 제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보였습니다. 백빈이 없었다면 긴 치료의 과정을 어찌 견뎠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백빈이 소망한 것처럼 저도 백빈이 친동생처럼 여겨집니다.”

“그러고 보니 백빈이 황후에게 시를 지어 올렸다지?”

“그러하옵니다. 백빈은 저를 두고 자매의 정을 논한 것이 대역무도하다며 죄를 청했으나 저는 그 시를 듣고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태후는 황후와 경정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벅차올랐다.

태후는 경정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백빈에게 선물을 주고 싶구나.”

“태후 마마. 이미 분에 넘치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태후궁에 있는 모든 것을 백빈에게 내어줘도 아깝지 않아.”

“태후 마마.”

경정은 자꾸만 그녀에게 보물을 내어주는 태후가 너무 좋았다.

‘태후 마마께서 내리시는 하사품이 제일이다. 다른 것과 비교가 안 되지.’

태후가 진상궁을 불렀다.

“진상궁. 천축국에서 진상한 투광경(投光鏡)을 백빈에게 상으로 내줘라.”

“알겠습니다. 태후 마마.”

태후가 경정에게 투광경을 준다는 말에 고정엽은 놀랐다.

“그것은 이 땅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모후께서 아끼는 물건이 아니십니까?”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니 백빈에게 주고 싶구나.”

태후가 경정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것을 보는 고정엽은 가슴이 뿌듯했다.

“알겠습니다. 모후께서 원하시니 그리하시지요.”

경정은 태후가 아끼는 투광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투광경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거울 같아 보이지만 실은 놀라운 능력이 숨겨져 있었다.

일반거울이 아니라 반사거울이라서 투광경에 빛을 비추면 특정한 형상이나 무늬가 벽면에 맺히기 때문이다.

천축국에서 진상한 투광경에 빛을 비추면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형상이 보인다고 했다.

불심이 강한 태후는 자주 투광경을 꺼내 관세음보살을 보며 예불을 올렸다.

경정은 태후가 그녀에게 하사한 물건이 이 땅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진귀한 물건임을 알기에 즉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태후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태후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경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경정은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보물을 얻었구나. 좋구나. 좋아!’

***

백빈이 황후 마마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문이 온 황궁에 퍼졌다.

예귀인이 사는 영화궁에도 이 소식이 들렸고 그녀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녀가 미간을 누르자 시녀 채옥이 다가와 차를 올렸다.

채옥은 경총이 죽고 예귀인이 사가에서 데려온 시녀였다.

채옥은 예귀인의 어머니를 오랫동안 곁에서 모신 시녀로 경총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했다.

“마마님. 황후 마마께서 눈뜨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예귀인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채옥은 예귀인에게 가까이 다가와 고했다.

“마마님. 종수궁과 양심전에 못 가신 지 오래되셨지요? 오랜만에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볼 기회이니 준비하시지요. 백빈을 미워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하게 잡수시고 후일을 도모하셔야지요.”

채옥은 오랫동안 규방 여인들의 암투를 겪어왔기에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채옥이 예귀인의 현재 상황을 말하자 예귀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소인이 아는 마마님은 화가에 있을 때는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항상 손쉽게 얻으셨지요. 하지만 이곳 황궁은 사가와는 다릅니다. 황궁의 여인들은 사가의 여인들과는 아주 다르지요. 그러니 한번 일이 틀어졌다고 해서 절대 평정심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예귀인이 고개를 들어 채옥을 바라봤다.

사가의 어머니께 소식을 전해 유능한 아이로 보내달라 청했는데 이렇듯 마음에 쏙 드는 시녀가 올 줄 몰랐다.

“너는 앞으로 나를 돕거라. 나도 너를 의지하마.”

“예. 마마님. 소인은 마마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인을 믿고 일을 맡겨 주십시오.”

“그래. 너를 믿으마.”

예귀인은 새로 들어온 시녀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아둔한 경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

황후를 위한 연회가 열리는 섣달 초하루가 밝았다.

치장을 마친 경정이 나오자 소이자가 일구종(一口钟, 비단으로 만들어 모피를 덧댄 겨울용 겉옷)을 들고 달려왔다.

“마마님.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따뜻하게 입고 가시지요.”

“고맙구나.”

경정은 소이자 건네는 일구종을 어깨에 걸쳤다.

따뜻한 모피의 털이 경정의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마마님이 예상하신 것처럼 소태자가 움직였습니다.”

“그래?”

“어선방에서 일하는 환관 한 명이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그자를 대신해 오늘 연회장에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소이자의 말을 들은 경정은 예상했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마마께서는 어찌하여 소태자가 오늘 일을 벌일 거라 예상하신 것이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냐? 지난번 사통 사건은 인적이 드문 황궁 서고 앞에서 벌어졌다. 가장 중요한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곁에 계셨지만 두 분께서는 나를 의심하지 않으셨지.”

“그렇다면 일부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나와 엄세록 도통은 한번 사통한 적이 있다는 추문에 휩싸인 적이 있으니 일부러 또 엄세록 도통을 끌어들이고, 이번에는 내명부의 후궁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 터트리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두 분이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그 당시에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두 번이나 같은 사람과 사통했다는 오명에 휩싸이면 사람들은 의심하기 마련이다.”

소이자는 웃으며 답하는 경정을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마마님. 지금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걱정되는 것이냐?”

“소태자가 얼마나 악랄한 놈인지 마마님은 모르십니다. 그놈이 꾸민 계략이라면 분명 화빈 마마님의 것보다 지독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더 독한 사람이니까?”

“예?”

“어릴 적 내 이칭(異稱, 별명)이 무엇이었는 줄 아느냐?”

“그것이 무엇인데요? 선녀님? 여신님?”

“미친개.”

미친개라는 말에 소이자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요? 그것이 참말입니까? 어찌 선녀 같은 마마님이 미친개 일 수가 있습니까?”

“사실이다. 나를 겪어본 사람들은 나를 미친개라 불렀느니라.”

경정은 환관이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황궁에서 일했던 때나 무림맹에 파견 나갔을 때나 그는 항상 미친개로 불렸다.

“소태자는 실수한 거다. 미친개는 한번 물면 놔주지 않거든.”

경정은 호탕하게 웃으며 처소 밖으로 나갔다.

소이자는 생뚱맞게 갑자기 옛친구 생각이 났다.

‘미친개라니······. 이러면 안 되는데. 마마님께 돌아버린 내 친구의 냄새가 난다.’

소이자는 백빈의 뒤로 내서당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친우, 백경정의 모습이 떠올라 당황했다.

“마마님! 같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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