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251)

이름이 없는 여인과 얼굴을 숨긴 사내가 만나다.

무명검이 회강으로 몸을 던지자 제갈원이 놀라 손을 뻗었지만 그를 붙잡지 못했다

미쳐 날뛰던 야제를 제압한 벽서온이 제갈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갈원은 망연자실하게 삼봉(三峰) 아래, 회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있던 백의인은 어디로 갔는가? 그자가 무명검이 아닌가?”

“잘 모르겠네. 물어봐도 답하지 않고 그냥 강으로 뛰어내렸네. 혹여 흑시의 잔당일까? 뱀을 부리는 여인이 야제의 수하라고 하지 않았나?”

남궁후와 당철한이 다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뱀을 부리는 여인은 저기 있네.”

남궁후가 가리킨 곳에 시뻘건 옷을 입고 절명해 있는 백사가 보였다.

제갈원은 풍죽오우가 나타나자 당황한 무명검을 떠올리며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벽서온이 시커먼 회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도망친 자가 무명검이라면 확실히 수상한 자가 맞는 것 같네. 영화산 때도 우리가 오기 전에 도망치지 않았나?”

남궁후가 강에 뛰어들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어찌할까? 지금이라도 강에 뛰어들어 놈을 잡을까?”

남궁후가 회강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벽서온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곳곳에 무림맹원이 깔렸으니 도망치지 못할 것이네. 그리고 무명검이라 확신할 수도 없지.”

그때 제갈원이 끼어들었다.

“아니네. 무명검은 확실한 것 같네.”

“왜 그렇게 확신하는가? 아까는 아닐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제갈원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림맹 신호탄을 들어서 벽서온에게 보였다.

섭(燮)이란 글자가 신호탄에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벽서온은 굳은 얼굴로 무림맹 신호탄을 바라봤다.

‘정말로 무명검이란 말인가? 대관절 정체가 뭐길래 매번 우리를 피해 도망치는걸까?’

벽서온은 무명검을 줄곧 의심했다.

무림맹원들이 사용하는 검법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늘 일도 그렇다.

마치 무림맹의 흑시 토벌 작전이 벌어지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등장하지 않았던가?

‘분명 뭔가 있다.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

삼봉도에 도착한 고정엽은 벽서온의 만류로 따라오지 못하고 아래에서 무림맹원들을 기다렸다.

풍죽오우가 삼봉에 올라간 후, 무림맹 청풍단이 하나둘 삼봉도에 도착했다.

청풍 단주 운평을 본 고정엽이 그에게 물었다.

“흑의인들은 어찌 되었는가?”

“모두 제압했으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고정엽은 회강에 깔린 수많은 불빛을 보며 물었다.

“배를 띄운 것인가?”

“예. 남은 잔당이 회강에 숨어 있다가 도망칠 수도 있으니 배를 띄어 샅샅이 살필 것입니다.”

“그렇군. 무림맹이 잘하고 있어. 아주 훌륭해.”

운평은 갑자기 등장해 맹의 일을 따져 묻는 풍운검을 보며 기분이 나빴다.

고정엽은 언짢아하는 운평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또다시 물었다.

“이 배를 타고 온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풍운검 대협. 제가 좀 바빠서 그러니 이만 놓아주시죠.”

“알겠네. 어서 일을 보게나.”

운평은 방해꾼인 풍운검을 떼어놓고 무림맹원들을 데리고 삼봉 위로 올라갔다.

혼자 있기 심심했던 고정엽은 운평이 맹원들과 함께 타고 온 나룻배에 올라탔다.

“할 일이 없으니 나도 이 섬 주위를 수색해주지.”

고정엽은 위험한 일에 끼지 말라며 자신을 버리고 간 친우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정엽이 노를 움직여 삼봉도 근처를 도는데 저 앞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옷이었다.

“도망가던 잔당인가?”

순간 고정엽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꼼짝마라. 나 풍운검이 잡아주마.”

고정엽은 환하게 웃으며 옷이 떠 있는 곳으로 노를 저었다.

***

회강에 뛰어내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정의 머릿속엔 계획이란 것이 있었다.

‘그땐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거야. 그러니 물에 빠지자마자 몸을 둥글게 말아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거다. 그리고 허공을 계단 삼아 뛰어올라 삼봉도의 기암괴석에 딱 붙는 것이지. 이 정도면 완벽한 계획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녀의 몸은 예상보다 물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정이 회강에 빠진 순간 그녀의 계획이 산산조각이 났다.

몸을 말지도 못하고 지난번 연못에 빠졌을 때처럼 곧장 통나무 조각이 되고 만 것이다.

경정은 입과 코로 물이 들어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정검을 먼저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헤엄치는 것을 먼저 배웠어야 했어.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면사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이거라도 떼어 내야겠다. 숨을 못 쉬겠어.’

경정이 얼굴에서 면사를 떼어 내려고 하는데 그녀의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안돼. 저승사자가 벌써 왔다고? 이보시오. 저승사자 나리. 사기그릇을 삼켰을 때도 오지 않으시더니 왜 벌써 오셨소? 너무 급한거 아닙니까?’

경정은 죽을힘을 다해 굳어버린 몸을 움직이려 애를 썼다.

검은 그림자는 경정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왜 저분이 보이는 거지?’

경정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알고 놀랐다.

그는 저승사자가 아니었다.

박달나무 가면을 쓰고 경정의 팔을 낚아채는 사내를 보며 경정은 정신을 잃었다.

‘저분은······? 풍운검?’

***

고정엽은 회강에서 건진 백의인을 배 위에 눕혔다.

흰색 무복에 흰 끈으로 질끈 묶은 머리.

“설마 이분이 무명검인가? 확실해. 섭이가 말한 그대로잖아. 그런데 어찌 물에 빠지신 것이지?”

고정엽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 문득 찢긴 무명검의 무복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속살이 그의 눈이 들어왔다.

놀란 고정엽은 황급히 걸치고 있던 장포를 벗어 무명검의 몸에 덮었다.

“말도 안 돼. 무명검이 여인이었다는 것인가?”

고정엽은 너무 놀라서 손까지 떨렸다.

그런데 무명검은 물에서 나온 지 한참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뜰 줄 몰랐다.

“이보시오. 무명검 대협. 눈 좀 떠보십시오.”

고정엽이 그를 불렀으나 무명검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대협. 말 좀 해보십시오. 괜찮습니까?”

놀란 고정엽이 손가락을 무명검의 코에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고정엽의 눈이 커졌다.

“이보세요. 정신을 차리십시오. 무명검 대협.”

고정엽은 무명검이 이대로 죽을까 봐 겁이 났다.

그때 지난날 어화원 연못에 빠진 경정에게 숨을 불어넣었던 것을 떠올렸다.

“미안하오. 그대가 여인인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하십시오.”

의식이 없는 무명검에게 사죄의 말을 한 고정엽은 자세를 낮추고 그녀의 입에 그의 입을 가져다 댔다.

차마 무명검의 얼굴을 가린 면사를 치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고정엽이 숨을 불어넣자 장포에 가려져 있던 무명검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정엽은 그때부터 무명검의 가슴을 압박하며 숨을 불어넣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정엽이 입가에 묻은 물을 닦으며 뒤로 물러섰다.

무명검이 드디어 물을 토해낸 것이다.

고정엽은 기뻐하며 무명검을 일으켜 세우고 경정에게 했던 것처럼 등을 쓸어내린 후에 손바닥을 대고 진기를 밀어 넣었다.

무명검은 기침하며 물을 계속 토해냈다.

고정엽은 무명검이 더는 물을 토해내지 않자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 다시 바닥에 눕혔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차린 경정은 눈을 껌벅거렸다.

눈을 뜰 때마다 눈앞에 박달나무 가면이 보였다 사라졌다.

“풍운검······?”

무명검의 입에서 풍운검의 이름이 나오자 고정엽은 화들짝 놀랐다.

“저를 아십니까?”

“꿈인가요?”

“꿈이 아닙니다. 여기는 회강입니다. 당신은 무명검 대협이시지요?”

“제가 살았습니까?”

“강에 빠지신 것을 제가 구했습니다.”

경정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구한 사내를 바라봤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풍운검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던 것이었다.

경정은 그제야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꿈이 아니었군요. 정말로 풍운검이셨어요.”

경정은 풍운검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순간 경정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얼굴에 면사가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혹시라도 얼굴에서 면사가 떨어질까 두려워 풀까지 발라놔서 그런지 면사는 떨어지지 않고 얼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아. 다행이구나. 풍운검에게 내가 누군지 들키지 않았어. 다행이야.’

경정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가 숨을 내쉬니 가슴이 한껏 위로 올라왔다 내려왔다.

순간 경정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내렸다.

자신은 지금 풍운검이 덮어준 듯한 장포를 덮고 있었다.

경정은 손을 꼼지락거려 장포 안의 상황을 확인했다.

찢어진 그녀의 무복이 만져졌다.

‘망했구나. 망신살이 뻗쳤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량인 풍운검의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경정은 두 눈을 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정엽은 눈을 크게 떴다가 감기를 반복하며 놀라는 무명검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가 아는 누군가와 무명검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비슷했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섭이를 두 번이나 구한 대협이고 그가 떠올리는 여인은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가녀린 내명부의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제가 풍운검인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풍운검이 묻자 경정은 그의 박달나무 가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이것 때문에 아셨군요.”

“풍운검께서는 제가 무명검인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섭이라는 꼬맹이를 아십니까?”

“섭이를 만나셨나요? 섭이는 괜찮습니까?”

“그럼요. 무명검께서 미끼가 되어 마두를 유인하셨다지요? 섭이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무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풍운검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경정에게 포권을 했다.

“은인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경정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허세만 가득한 풍류 공자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꽤 달라보이네.’

경정은 나중에라도 풍운검을 만나면 무시하지않고 잘 대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정이 풍운검의 장포를 걸치고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합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요. 헤엄을 못 치는 것 빼놓고는 멀쩡합니다.”

경정은 무명검으로 있을 때는 사내처럼 목소리를 굵게 냈는데 여인인 것이 들통난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경정은 풍운검과의 대화가 어색해서 웃지도 못했다.

“그냥 습관이 돼서 그렇습니다.”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요. 그냥 편하게 하셔도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대협의 비밀은 절대 발설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구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풍운검의 장포를 빌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가져가십시오. 협객께 드리는 것인데 영광입니다.”

“제가 협객이라고요?”

“예. 영화산에서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협객이 아니면 못 할 일을 하셨습니다.”

경정은 협객이라는 말에 기뻐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협객이라니. 말도 안 돼. 내가 협객이라니.’

경정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갑자기 고정엽이 먼곳을 응시했다.

“무림맹의 배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무림맹 배를 타고 가시지요.”

“예?”

경정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무림맹 깃발을 단 범선이 삼봉도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범선 옆에는 작은 나룻배도 여럿 보였다.

경정은 재빨리 풍운검의 뒤로 몸을 숨겼다.

“왜 그러십니까? 무명검 대협?”

경정은 지난번 제갈원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무림맹과 마주치면 안 된다. 내가 악부생을 해치울 때 무림맹에서 배운 검법을 사용해서 무림맹에서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했어.’

경정은 고개를 돌리는 풍운검의 얼굴을 뒤에서 잡았다.

“대협? 왜 그러십니까?”

고정엽은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경정은 풍운검의 몸 뒤에 바짝 붙은 채 그에게 속삭였다.

“풍운검 대협. 저 좀 도와주십시오. 무림맹을 피해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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